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생기지 않을까?
단지 4박 6일이었다.
낯선 이국땅에서 낯선 공기와 낯선 경치에 흠뻑 젖어 왔지만 패키지라서 익숙한 음식과 익숙한 소통을 했던 탓인지 여행 후 현실에 적응을 해가는 피로도는 높은 편이 아니었다. 다녀온 곳은 시차도 겨우 2시간밖에 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단지 그 6일 만에 날씨는 변해 있었다. 떠나기 전만 해도 한낮의 얇은 긴팔은 살짝 덥기까지도 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긴팔 위에 외투를 걸치지 않으면 쌀쌀하다. 희한하게 며칠을 강탈당한 느낌이다.
게다가 시차는 겨우 2시간뿐이었는데 일주일이 지나도 여전히 피곤하다. 아니다. 난 원래 늘 피곤해했었지. 아닌가? 모르겠다. 어쨌거나 오늘따라 유난히 피곤하다.
그리고
낯설다.
울려야 했을 알람은 귀신이 꺼버렸는지 어느새 꺼져 있었고, 부랴부랴 씻었건만 평소보다 10분이나 늦게 현관문을 나섰다.
버스를 타나 택시를 타나 걸으나 어차피 사무실까지 가는 시간은 같았다. 버스나 택시를 타고 가는 길이 매일 이 시간대면 막혀 있었기 때문에 걸어가는 게 빠른 날도 있었다. 그런데 오늘따라 도로에 차가 별로 보이지 않았다. 택시를 타면 아슬아슬하게 지각은 면할 것 같았다. 택시를 냉큼 잡아타고 보이지 않았던 도로로 좌회전을 하고 나니 아뿔싸 속았구나. 차가 줄지어 서 있었다. 게다가 택시기사 아저씨는 오늘따라 매우 양심적이었다. 보통의 다른 아저씨들은 조금만 더 앞쪽으로 가서 새치기를 해주시던데 이 아저씨 너무 착하시다. 덕분에 겨우 2분 지각했을 뿐인데 택시비는 6,500원씩이나 들었다.
2분에 6,500원이면 1년 연봉으로 따져보니 대충 42억 원이라는 계산이 나온다. 셈이 맞나? 어쨌든. 2분에 6,500원은 너무너무 비싸다.
에라이.
오늘은 삐뚤어지련다.
근처 편의점에 들려 천 원짜리를 꺼내 로또 한 줄을 달라 그랬다. 그랬더니 아주머니 말하기를 이젠 안 판단다. 안 판 지 일주일이나 됐다고. 겨우 일주일인데 늘 놓던 물건이 어디론가 사라진 느낌이다. "나의 잃어버린 로또를 찾습니다."
혹시 아나. 그 시간에 샀더라면 그게 일등에 당첨될지.
어쨌거나 사지 못했다.
별다방으로 향했다. 이 시간에는 처음이다. 출근 시간이 넘었는데 사람들이 많았다. 대기를 하는데 대기자 명단에 디지털 글씨가 띄워졌다. '웬디', '미미'. '승이', 어쩌고저쩌고 라는 이국적인 이름이 떴다. 뭐야, 원래 이런 식이었나? 언뜻 들은 것도 같은데 처음이라 낯설었다. 그 와중에 나의 대기자 이름은 "B-10"이었다. 뭐야, 무슨 폭격기 이름도 아니고 그렇다고 어린 왕자 행성의 조상뻘도 아니고 이건 뭐야. 로봇 같잖아. 삐릿 삐릿.
음료를 받아 나오려는데 빨대가 보이지 않았다. 그냥 빨대 어딨냐고 물어보면 될 일인데 사람들이 워낙 많았고 대부분이 여자들 뿐이라서 쓸데없는 존심이 튀어나왔다. 물어보는 게 왜 창피했을꼬. 그냥 그대로 뒤로 돌아 나와버렸다.
엘리베이터를 타니 문 앞에서 폰을 만지작거리며 얼쩡대던 여인네는 문이 닫히기 직전에서야 놀란 눈으로 '열림'버튼을 눌러댔다. 문이 다시 열렸는데 이 여인네 문 앞에서 다시 미적거리더니 타지 않는 게 아닌가. 허허허허.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뭐가 자꾸 꼬이는 듯.
뚜껑을 열고 얼음에 뒤섞인 음료를 벌컥벌컥 들이마시는데 얼음을 방파제 삼아 몰려 있던 음료는 마치 폭우에 범람하는 강물처럼 쏟아져 나왔고 놀란 나머지 입술을 크게 벌려 한 방울이라도 덜 흘리려고 발악을 하면서 하체는 뒷걸음질을 쳤다. 그럼에도 차가운 커피는 왕창 쏟아져 상의를 적시고 말았다. 음매.
별스러웠던 하루는 이제 퇴근시간을 향해 열심히 달린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생기지 않는 걸까? 이후로는 잠잠하다. 그래도 역전에 역전, 그리고 재역전을 하는 야구 경기처럼 하루의 굴곡이란 언제 변할지 모르는 일이다.
하루가 오늘따라 왜 이렇게 내게 건방지다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