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동백이랑 바람날래

by 생각하는냥

자정이 지나니 화요일은 어느새 사라지고 수요일로 사뿐히 넘어간다. 하루가 넘어가는 건 정말이지 티도 나지 않는다. 그러나 반갑고 즐거운 수요일이다. 야호. 동백이 만나는 날이다.


문득 컴퓨터를 켜고 메모장에 몇 글자 끄적이다 결국 아무것도 쓰지 못한 채 전원을 내렸다. 어두움에 익숙해질 즈음 정신을 잃었고 눈을 떠보니 금세 아침이다. 잠이라는 녀석은 말도 없이 허락도 없이 타임머신을 태워서는 몇 시간 뒤의 미래로 날 보내버렸다.


여느 때처럼 기지개를 켜고 뽀드득 소리 나게 씻고는 현관문을 나섰다. 그리고 녀석을 만났다. 어제도 만났던 익숙한 녀석은 오늘따라 차갑다. '날씨' 이 녀석. 바람맞았구나.


녀석의 괜한 심술에 한 겹 더 껴입을까 싶다가 좀 더 잘생긴 내가 참고 말지 싶어 팔짱을 껸 채로 길을 나섰다. 네가 그래 봤자 얼어 죽이기까지 야 하겠어.


저벅저벅 걷다 보니 어느새 안양길의 알록달록 물든 가로수가 반긴다. 한 걸음 내릴 때마다 밀려오는 울긋불긋한 가로수 물결은 마치 허리춤 높이에서 출렁이는 파도처럼 사람을 둥실둥실거리게 한다. 악취를 뿜어내는 은행나무향에 떠밀리기도 하고 이름 모를 꽃나무 향기로움에 떠밀리기도 하고 빨갛게 익어가는 감나무의 오동통함에 떠밀리기도 한다. 그렇게 온통 정신을 빼앗긴다.


발걸음을 멈추고 악취를 뿜어내는 은행나무 밑이라도 좋으니 가을이랑 손잡고 가출이라도 감행하려고 궁리를 해 본다. 이래 가지고 저래 가지고 어디 어디로 가서 짝짜궁 손잡고 단 둘이서 말이다. 둘만 아는 응큼한 비밀의 장소에서. 아아 좋아.


엉기적엉기적 걷는 사람도 휴대폰에 정신 팔린 사람도 이어폰을 꽂은 채 흥얼거리는 사람도 진한 스킨 냄새를 풍기며 지나가는 누군가도 쩔은 담배냄새를 뿜어대는 누군가도 달콤한 향기로 유혹하는 누군가도 가을이랑 바람나고 싶을게다. 한적한 커피점에 눌러앉아 가을이랑 바람나고 싶을게다.


어여쁜 너를 두고 사무실에서 일만 해야 하는 건 또 다른 고문이다. 맞다. 알고 보면 여기는 지옥이 맞다. 이렇게 아름다운 걸 곁에 두고 같이 놀지를 못하고 온종일 일을 해야 하고 있으니 지옥이 맞다. 그러지 않고서야.


6시 땡 하면 이 아리따운 가을이를 감추려고 어둠이 쫘악 깔린다. 이쁜 건 함부로 보여주지도 않으려고 이쁜 건 함부로 같이 있게 안 하려고 만든 지옥이다. 9시에서 6시까지 일을 시키는 건 사람이 만든 게 아닐 게다. 조물주가 시켜서 누군가가 그렇게 세팅을 한 설정값일 게다. 여기는 정말 지옥이 맞다.


그래도 오늘 저녁엔 동백이를 한다. 같이 안 놀아주는 못 놀아주는 가을이는 실컷 조물주랑 놀아라. 너보다 이쁜 동백이가 오늘 저녁 나를 고이 기다린다. 아, 나 오늘 저녁 동백이랑 바람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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