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 먹고 갈래?
#늑대아홉마리
꿈을 꾸었다.
초저녁 잠의 꿈이긴 했지만 선명하고 아름다웠으나 아쉬웠다. 그러나 따뜻했다.
꿈은 대체로 하나의 스토리가 깔끔하게 이어지지는 않지만 어이없게도 짧은 이야기들이 이어져 나가는 걸 보면 한 편의 단편적 컬트 영화를 보는 것도 같다.
꿈속의 그녀는 같은 회사 동료 직원으로 등장했다. 대부분의 꿈이 그렇듯이 깨고 나면 얼굴은 흐릿하지만 예쁘다는 건 분명했다. 그녀의 직업은 의류 디자이너였다. 의류 디자이너? 같이 일할 일 없는 업종인데 어떻게 그런 직종이었는지는 모르겠다. 어쨌거나 그녀는 많은 남자들이 희망하는 '혼자 사는 여성'이었다.
우리는 썸을 탔고 드디어 늦은 데이트를 마치고 그녀의 귀가를 도울 타이밍이 되었다. 갑자기 등장한 늑대 아홉 마리가 들쑥날쑥 거리며 귓가에 속삭인다. '이 녀석아, 때는 이때야.'
늦은 귀갓길이라서 택시를 타고 그녀를 집에 바래다준 후 가는 걸로 하였다. 그런데 그녀가, 그녀가, 그 혼자 사는 집 방향을 말하는 게 아니었다. 아니 왜 혼자 사는 그 집으로 안 가는 건데. 왜. 왜. 그럼 어디로 가겠다고?
갑자기 본가를 간단다.
본가? 갑자기 본가? 갑자기 뭘 본건가? 그래도 여긴 내 꿈이잖아. 내 꿈속이잖아. 뜬금없이 본가라니. 갑자기 이 타이밍에 왜 본가를 가는 건데. 그것도 내내 혼자 사는 역할이었으면서 왜 갑자기 본가를 간다고 여주가 마음대로 대본을 바꾸는 건데?
대개 이런 스토리는 썸 타던 여자 친구를 집에 바래다 주자 '라면 먹고 갈래?'라는 스토리로 전개되어야 하는 게 정상 아닌가? 그 흔하디 흔한 스토리를 왜 네 마음대로 바꾸는 건데. 내 꿈속의 여주는 왜 다들 이리도 이기적인 건데. 제작도 내가 하고 연출도 내가 하고 대본도 내가 하고 남주도 내가 하는데 왜 뜬금없는 여주가 굳이 이 타이밍에 본가를 가겠다는 건가. 설마 본가에 가서 라면을 끓여주려고?
꿈이 계획대로 될리 있냐만은 그래도 너무하는 거 아니냐. (울먹울먹)
그런데 더 어이없는 건 너무도 착하디 착한 난 그녀를 본가까지 너무도 잘 바래다주었다. 뭐야. 착해도 너무 착해. 원래 내가 이렇게 착한 사람이었어? 아니잖아. 왜 착한 척이야. 진짜 착해. 너어어어무 착해.
그러고 나면 그다음 날의 로맨스가 이어져야 하는 게 당연하지 않겠어?
그런데 갑자기 장르가 바뀐다. 다니던 회사가 어쩌다 보니 노사 간의 갈등이 심화가 되어 있는 상태였다. 난데없이 직장 동료 몇을 설득시키더니 폭로를 하는 거였다. 왜 연애물이 갑자기 장르가 이리 심오해진다니? 늑대 아홉 마리는 어디로 간 거야 대체.
그러더니 어느새 장소는 드넓은 평야로 바뀌어 있었다. 하얀 셔츠의 넥타이 부대들 틈에 있었고 저 멀리에는 거칠게 입었지만 한 손에는 각목과 야구방망이를 든 사람들이 즐비하게 서 있었다. 누가 봐도 사측의 끄나풀들이었다. 갑자기 누군가 외쳤다. '돌격.' 그리고 열심히 달렸다. 아니, 난 왜 달리는 거야.
싸움질엔 지극히 초등 수준만도 못한 내가 지금 여기서 뭐 하는 걸까. 그때 누군가 외쳤다. '학익진으로 펼쳐.'와, 학익진? 꿈속에 학익진이 다 나온다. 이게 무슨 한산대첩도 아니고.
어느덧 사람들 틈에 섞여 사측의 사주를 받은 무리와의 일전이 벌어졌는데 그 사이 다행인 건 화면이 바뀌어 다시 로맨스로 넘어왔다는 게다. 휴, 야구방망이로 안 맞은 게 어디야.
회사는 결국 그렇게 틀어져버렸고 그녀도 떠나고 나도 떠나야 하는 순간이 되었다. 아마 그녀는 유학길에 나서는 듯싶었다.
어쨌든 그녀는 떠나기 전 회사 앞 광장에서 사람들에게 외쳤다.
사랑하는 이와의 장면들이 담긴 순간들이라며 그녀와 함께 하며 찍었던 단 둘의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때마다 입었던 그녀의 옷 스타일들도 같이 전시되었다. 그리고 그녀는 나와의 따뜻했던 순간들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뭐냐. 이 감동. 나의 알흠다웠던 늑대 아홉 마리는 부끄러운 나머지 꼬리를 감추었다.
한참을 그렇게 감동하다 잠에서 깨었다. 안돼. 좀 더 자자. 안돼 안돼.
아까 못 먹은 라면은 먹어야 할 거 아냐. (울먹울먹)
현실로 돌아와 눈을 뜨고 남긴 한 마디.
"여보, 미안."
곤히 자고 있는 아내에게 이 일은 기필코 비밀이다. 쉬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