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션

아프니까 직장인이다.

by 생각하는냥

어려서 큰 병을 앓고 지냈던 건 아니지만 그래도 나름의 잔병치레를 좀 했었다.

그런 덕분인지 성인이 되어서는 덜 아프다.

아니다. 덜 아프다기보다는 종종 아프기는 한데 아픔을 덜 느끼는 게 맞는 것 같다. 통증을 참아내는 게 그냥 아픔을 이겨내는 나름의 노하우랄까?


여름이면 장염에 걸리고 겨울이면 편도가 붓고 고열에 시달리기를 매년 행사처럼 달고 다녔었다.

그럴 때마다 이런저런 고생을 했지만 그런 고통을 많이 경험한 탓에

음식을 대하는 방법에 대한 나름의 노하우가 생겼다.


장염에 걸렸을 땐 굶는 게 최고다. 그 외엔 답이 없다. 굶는 건 의외로 마음이 편하다. 그냥 안 먹는 게 아니라 아예 아무것도 안 하면 그냥 편하다. 단지 시체놀이하듯 드러누워 있으면 된다. 다만 몸이 굳어버릴 수도 있으니 약간 뒹굴러 주기만 하면 된다. 배고픔에 꼬르륵 소리가 들릴 때면 어떤 희열이 느껴지기까지 한다. 장을 비우는 느낌도 좋고, 허리가 줄어드는 듯해서 배는 고파도 뭔가 즐거운 느낌도 든다. 허리가 줄어든 것 같아 허리띠를 채워보면 실상 크게 차이 날 정도로 허리가 줄어들거나 하지는 않는다.


편도가 부으면 보통 사람들은 아파서 음식을 못 먹는다. 그런데 난 아파도 삼킨다. 아픈데 어떻게 삼키냐고 물을 것이다. 편도가 부어 병원에 가면 의사 선생님들이 묻는다. "이렇게나 부었는데 안 아프냐?"라고. 그렇다. 어려서 자주 아팠던 탓인지 편도가 부어도 남보다 덜 아프다. 그래서 웬만해선 편도가 부어도 밥 먹는데 지장이 거의 없다. 아마도 내 편도는 다른 이들의 편도에 비해 좀 더 찰지게 살이 찐 건지도 모르겠다.


28 살 때였던가?

한 여름에 장염에 걸려 고열로 고생을 한 적이 있었는데 집에서 홀로 버티다가 안 되겠다 싶어 병원에 갔는데 체온이 무려 39도라 하는 것이다. 그때 옆 침대에 젊은 성인 남자가 그의 아내와 같이 있었는데 그는 거의 죽어가는 듯 신음 소리를 내고 있었다. 의사 왈 "저분은 38도인데 저러고 계신다"며, 그의 꾀병스러움에 비아냥거리는 눈빛을 보내셨다. 미안했다. 내가 좀 더 아픈 척을 해줄 걸 그랬나? 물론 한편으론 뿌듯했다. 도토리 키재기일 뿐인데 그런 걸로도 승리의 맛을 봤다고 해야 하나.


그런데 세상은 아픈 걸 티 내지 않으면 건강한 줄 알고 일을 시킨다. 회사에서도 가정에서도 그렇다. 아픈 데 일을 시키면 정말 짜증이 난다. 그래서 아픈 걸 표현하는 방법도 매우 중요하다. 일단 내 천자의 주름을 이마에 만들어줘야 한다. 그리고 호흡은 평소보다 조금 더 빠르게 씩씩 거려준다. 가끔은 배를 웅크려 쥐고 있는 것도 좋고 턱을 괴고 있는 방법도 좋다. 아예 책상에 엎드려 있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 이때 주의할 것은 자는 것으로 보여서는 안 된다.


이거 꾀병하고 뭐가 달라? 아냐 아냐. 아파서 아픈 것을 티 내는 건 꾀병이 아니다. 아픈 것은 정이라는 것처럼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게 아니다.


2016년 2월 15일, A형 독감에 걸려 헤롱헤롱 거리기를 4일 동안 하다가 출근을 했다. 이왕 쉬던 거 생일이고 하니 하루 더 연차를 내서 쉬었더라면 좋았겠지만 아프다 보니 생일인지도 몰랐다. 약봉투에는 타미플루 5일치분의 마지막 한알이 남아 있었다. 이 마지막 한 알은 마치 여럿의 적을 눈앞에 두고 탄창에 단 하나의 총알만을 남긴 누아르 영화와 같은 그런 한 알이다. 영화 속의 주인공은 남은 한 발로 적의 대장을 죽이며 해피엔딩으로 영화를 끝낸다. 나의 약 한 알은 그런 비장한 한 알이었다.


독감 약보다 더 무서운 놈이 있다. 바로 감기약이다. 이 감기약이란 놈은 4일 동안이나 사람을 헤롱 거리게 하더니 오늘도 헤롱 거린다. 질병에는 적응하겠는데 왜 약에는 적응이 안 되는 것일까. 질병은 면역력에 따라 달라지는데 이 감기약이란 녀석은 사람을 늘 술 취한 사람처럼 만들어 버리니 답이 없다.


키보드를 만지작 거리다가 취중인 것처럼 머리 따로 손가락 따로 논다. 손가락 끝에 닿은 건 키보드 자판인데 희한하게 팔에는 감각이 없다. 눈 앞에 키보드 자판을 눌러대고 있는 손이 마치 남의 손 같다. 기분이 거지 같은데 판타스틱하다. 질병을 잡으려다 또 다른 질병에 잡혀 먹힐 것만 같다.


자, 이제 카운트다.

퇴근까지 3시간.


오늘의 미션은 퇴근까지 버티기다.

그나저나 퇴근은 어떻게 하지? 눈 감고 나면 집이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keyword
작가의 이전글주저리주저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