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근 후 퇴근길의 중독 리스트

야근 후의 퇴근길은 은근히 중독이다.

by 생각하는냥

야근 후의 퇴근길은 은근히 중독이다.


건물을 빠져나가면 늘 마주치는 거센 빌딩풍, 한때는 얼어 죽을 것 같이 떨게 하더니 여름이라 시원해진 이 녀석은 이제 은근히 중독이다. 여름 내내 있으면 더울 일이 없겠다.


모퉁이를 꺾으면 만석으로 길가에까지 확장한 치맥 집의 테이블에 앉아 한 손에는 시원한 맥주 한 잔을 방패막이 삼고 시끌벅적한 수다와 벌게진 미소로 전투 중인 직장인들을 마주한다. 그들은 내게 은근히 중독이다. 나도 술 한잔 당기니까.


술자리를 빠져나와 길 모서리에 기대어 담배연기를 뿜어대는 시뻘건 얼굴을 한 그들의 심각한 표정도 은근히 중독이다. 나 대신 걱정해주는 것 같으니까.


귀신보다 더 무서운 게 사람이라고 하여 가끔은 깜짝깜짝 놀라기도 하지만 어딘가로 향하는 드문 드문 마주치는 늦은 시간의 검은 그림자들도 은근히 중독이다. 가끔은 그들이 있어 퇴근길이 외롭지 않다.


어두운 가운데 길가를 밝히는 가로등에 반짝반짝 빛나는 거리의 가로수들도 이제는 은근히 중독이다. 낮에 보는 가로수보다 훨씬 몽환적이다.


밤길을 가다 문득 벤치에 앉아 멍 때리며 먼 불빛을 바라본다거나 혹은 깊은 생각에 빠지는 것도 은근히 중독이다. 그 누구의 방해도 없다.


어두워진 아파트 경비실 앞에 나란히 줄 서 있는 아직 수거되지 않은 택배들을 바라보며 주문하지도 않았으면서 혹시 나를 애타게 기다리는 것은 없는지 둘러보는 재미도 은근히 중독이다. 더러 아내가 주문한 걸 찾아내기도 한다.


늦은 귀가로 캄캄해진 현관문의 비밀번호를 삑삑 눌러 집안에 들어설 때의 향도 은근히 중독이고 제일 먼저 튀어나와 반겨주는 강아지의 촐랑거림도 은근히 중독이다. 종착지에 도달하니 마음이 놓여서다.


이런 중독에도 말이다,

야근은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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