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 있니, 내 반숙

인연은 타이밍이다. 방치하면 어딘가로 떠난다.

by 생각하는냥

앗, 반숙 계란이다.


직장동료가 2개를 사 와서는 하나를 주었다. 당장 먹어도 됐는데 이미 뭔가를 주섬주섬 먹었던 터라 일단 종이컵에 담아 두었다. 오후 4~5시 사이에 꼬르륵거릴 무렵 먹기에 적당한 간식이 생기니 아니 좋아할 수가 없다.


그러나 어쩌다 보니 반숙이는 종이컵에 담아둔 탓에 눈에 잘 띄지 않았다. 퇴근 시간이 되어 책상을 정리하던 중에야 반숙이는 발견되었다. 아뿔싸. 얘를 어째. 일단 냉장고에 넣어두기로 하였다.


다음날 출근길, 평소의 출근길과 다르지 않게 다들 분주한 걸음을 옮겼다. 빌딩 1층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사람들이 몰렸다. 버튼 앞에 선 사람이 닫힘 버튼을 누르는데 옆에 서 있던 사람이 열림 버튼을 눌렀다. 뛰어오는 사람을 보고서 문을 열어준 것인데 9시가 간당간당하던 터라 진심 얄미웠다. 내가 버튼 앞에 서 있었더라면 닫힘 버튼을 1초에 백만번은 눌러댔을 터인데.


엘리베이터는 위로 올라가던 중 불이 켜지지 않은 층인 14층에서도 멈췄다. 설마, 혹시 또 그녀인가? 문이 열렸다. 역시나 그녀였다. 며칠 전부터 8시 50분과 09시 사이에 옥상으로 담배를 피우러 가는 아가씨가 14층에서 엘리베이터를 탄다. 그녀는 남자들의 로망 중의 하나인 긴 생머리를 하고 있다. 그리고 잘 어울리지 않는 안경을 끼긴 했지만 긴 생머리 아이템 덕분인지 괜찮았다. 그녀에게 수줍게 말 한마디 걸어보고 싶다. '담배 끊어줄래? 출근 그만 방해하고.'


투덜이는 오늘도 얄미운 그녀들의 뒤통수에 펑크가 날 것만 같은 강렬한 시선을 날린다.


사무실에 겨우겨우 도착해 숨을 고르며 의자에 드러눕다시피 앉았다. 등을 의자에 바짝 대고 누우니 의자는 뒤로 기울어졌다. 아이고 편해. 이렇게 오래도록 앉아 있으면 편하기는 한데 허리도 나가고 어깨도 나가겠지?


편한 자세들은 왜 몸에 해로운 것일까? 밥 먹고 바로 누워도 이보다 편할 순 없는데 식도염에 걸릴 수 있으니 밥 먹고 바로 드러눕는 것도 해롭다.


편한 것은 해를 몰고 다닌다.

밥 먹고 나서 그릇을 바로 씻지 않으면 편하기는 한데 설거지가 쌓인다.

물건을 제자리에 두지 않으면 편한데 주변은 금세 난장판이 된다.

편한 것들은 게으른 것들이고 마치 그림자처럼 해가 따라다닌다.


인간관계도 그렇지 않을까 싶다. 너무 편하다 보면 너무 편해서 실수를 하게 되고 너무 편해서 둘러보지 않게 되고 너무 편해서 알아서 하겠지 하다가 많은 순간들을 놓치고 그냥 보내지 않았던가. 너무 편해서 놔뒀더니 '사랑해요' 말 한마디 던지기가 어려워진 관계가 부모 자식 간의 관계가 아닐까 싶다.


시간은 흘러 변함없는 꼬르륵 거리는 시간 오후 4~5시가 되니 어제 냉장고에 두었던 반숙이를 찾으러 냉장고로 향하려는데 갑자기 여직원들이 들어오더니 사다리를 타자 하는 것이다. 그래서 물었다.


"최고액이 얼마예요?"


8천 원이라길래 지갑을 열어 만원을 주었다. 사다리의 운빨이 따르지 않는 경우 최고액에 당첨되어 불운 어쩌고 저쩌면서 투덜거리기보다는 아예 처음부터 최고액을 내면 최소한 엄지 척을 받으니 이게 내게는 최선이었다.


이어진 옆자리 동료의 사다리는 최고의 득템 '꽝'을 뽑았다. 그러나 그의 직급상 '꽝'은 이내 거절되었고 다시 뽑기로 강제 소환되었다. 다시 선택한 건 그다음 득템인 '1,000원'. 아무리 발버둥을 친다 해도 가능하지 않을 것 같은 일이 그에게는 일어난 것이다. 그러나 그는 내가 만원을 낸 탓에 체면을 구길 수 없어 그의 주머니에서도 만원이 나왔다. 제 아무리 좋은 운빨이라 할지라도 대한민국에서는 체면을 이기지 못한다.


어쩌다 보니 야근으로 이어져 문득 냉장고 안의 반숙이가 떠올랐다. 그제야 그 녀석의 간식거리로서의 의무를 다하게 하려고 냉장고를 열었는데, 어라, 어라, 어라, 어라. 내 반숙이. 우우우우우우우. 냉장고 구석구석을 다 뒤져보았지만 반숙이의 모습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누군가가 데려간 것이다. 반숙이와의 인연은 거기까지였다.


인연이란 타이밍이다. 방치하면 바람처럼 어딘가로 떠난다. 한번 가버린 인연은 다시 회수하기 쉽지 않더라. 그래서 느낌이 들었을 때 잊지 않고 손을 내밀어야 연이 된다. 잃어버린 인연은 반숙을 찾으려고 냉장고 문을 여러 번 열었다 닫았다 하듯 떠나버린 자리만 되돌아보게 할 뿐이다.


아, 눈물 난다.

'어디 있니, 내 반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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