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가 2

뭐 이런 쓸데없는 운까지

by 생각하는냥

휴가 내내 집에 있자니 어디라도 다녀와야겠다 싶어 졌다. 휴가 내내 장마였다가 소강상태에 접어든 지난 8월 7일 금요일, 문득 전주로 향했다. 날씨고 뭐고 잴 거 없이 떠난 길이었다.


그런데 번개처럼 나간 남쪽나라행에서 나를 맞이한 건 어이없게도 비님 되시겠다. 여름휴가를 어떻게든 해보자고 내려간 것인데 비라니, 또 비라니. 2020년의 여름 장마는 너무도 지독했다.


비 속에 어디 나가지도 못하고 방 안에 틀어박혀 있는데 재난문자 알림이 수시로 들어왔다. 전라북도 지역 호우주의보 문자가 뜨더니 이내 경보 문자로 전환되었다. 심지어는 다음날 기차 운행이 멈췄다는 최악의 상황으로까지 전개되었다.


그런데 왜 마음은 천하태평인 것일까.

서울 못 올라가면 말지 뭐, 그까짓 거 복귀 못하면 휴가 연장하면 되지 뭐. 그렇게 자연재해를 핑계 삼아 하루라도 더 휴가를 연장하고 싶은 생각이 앞선 것이다.


그러나 손가락은 마치 술에 취해도 집에는 어떻게든 간다는 전설의 회귀본능이 몸에 밴 탓일까? 본능적으로 폰을 만지작거리더니 전주 옆 도시인 익산에서는 서울까지 가는 기차가 운행을 하고 있는 것을 찾아낸 것이다. 익산-전주 간의 기찻길은 운행 정지가 되기는 했으나 버스길은 여전히 열려 있다는 것 또한 알아내고 말았다.


굳이 왜 이 모든 걸 알려주는 것이냐? 모르는 게 약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자연재해를 핑계로 하루 더 쉬어도 비난할 이는 아무도 없는데 말이다. 차라리 울릉도를 갔더라면 1주일간은 나오지를 못했을 것인데. 하긴 이 와중에 울릉도 들어가는 길조차 막혀 있을지도 모르겠다.


평소 게으르던 몸뚱이는 평소와 다르게 매우 기민한 모습을 보였다. 2분 안에 택시를 불렀고 익산 전주 간의 만경강이 언제 범람할지도 모르는 가운데 익산으로 가는 시외버스는 무사히 익산에 도착하였고 서울행이 매진된 기차표 상황에서도 겨우 나온 한 장의 표를 예매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 모든 일이 일사불란하게 단 한 번에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인가? 그나마 운까지 따라서는 서울행 열차 여러 대가 운행이 취소됐다는 방송이 나오고 있는 가운데 예매한 기차는 운행을 한다는 방송이 나오고 있는 것이다. 뭐 이런 쓸데없는 운까지 따르는 건데?


평소의 조급하고 조바심 많은 내 성격으로는 도저히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 연거푸 이루어진 것이다. 아니, 조물주야, 이런 소소한 행운 말고 로또 1등 행운 이런 건 안 준다냐? 역시나 조물주는 내 편이 아님을 다시 한번 증명한 셈이다. 내 뜻과는 정말 따로 놀아주시는 조물주님 되시겠다. 아이고 얄미워라.


2020년의 여름 장마는 휴가를 꿀꺽 삼켜버렸다. 맛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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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람 직전의 전주~익산 간의 만경강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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