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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각하는냥 Dec 02. 2022

눈 깜빡했더니

어이가 없네

아프다.


건조해진 날씨 덕분에 입술도 말라간다. 그런 와중에 입술은 언제 깨물었을까? 입술을 하도 자주 깨물다 보니 며칠 전의 일 같기도 하고 훨씬 전의 일 같기도 하고 헷갈린다. 어쨌든 아프다. 가만히 있을 땐 괜찮은데 이 닦다가 칫솔이나 치약이 닿으면 쓰려서 아파 죽겠다. 그나마 음식 먹을 땐 불편하지 않아서 다행이다.


나름 입술이 촉촉해지면 좀 더 빨리 나을까 싶어 물도 많이 마시고 사람들 몰래 틈틈이 혀도 날름거려 보지만 촉촉함 보다는 약간 물에 젖은 튀김 같은 느낌이다. 애정결핍인 건가? 금세 나을 줄 알았던 상처는 더 커져만 간다.


겨우 입술 하나 아픈 것뿐인데 출근길은 현관문을 나설 때부터 퇴근이 고파지게 한다. 사실 고백하자면 입술이 멀쩡했을 때도 고프긴 했다. '대표님, 저 입술이 너무 아파서 출근 못 하겠어요.'라고 한다면 책상 빼라고 하시겠지? 유명한 영화 대사를 날리시겠지? '어이가 없네.'


버스가 왔다. 카드를 찍자 삑 소리와 함께 퇴근에 대한 고픔은 싹 다 사라지고 회사로의 강제 이동을 당한다.

맨 뒷자리의 빈자리가 눈에 들어왔다. 움직이는 버스 안에서 넘어지지 않으려고 손잡이를 잡으며 늘보원숭이처럼 천천히 움직였다. 이동을 하다가 맨 뒤의 앞자리에 앉은 여자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그냥 어쩌다 잠깐 마주쳤을 뿐이었다.


여자 사람이 봉을 잡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리나 보다 싶어 맨 뒤로 가려다가 빈 2개의 자리를 혼자 앉는 게 나아서 그녀가 비운 자리에 앉았다. 그런데 내릴 줄 알았던 여자가 내 옆으로 다시 앉는 게 아닌가. 응? 내리는 거 아니었어?


맨 뒷자리에 앉아도 되는데 여자는 왜 자리를 비켜준 걸까? 아주 짧은 순간 잡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어쩌면 '저 여기서 내려요'라는 인사와 함께 번호라도 던져주려고 저러나? 그러나 중년 냄새가 풀풀 나는 중년 아저씨에게 그럴리는 없지 않은가. 그냥 이유 없이 아파 보였나? 하긴 그도 그럴 것이 입술은 말라 있지, 거기다 윗입술은 알게 모르게 부어 있어 보이지, 게다가 늘보원숭이처럼 느릿느릿 움직였으니 누가 봐도 아파 보였을 것이다. 얼마나 불쌍해 보였으면. 사실 그 정도까지는 아닌데 이제 와서 '나 하나도 안 아파요'라고 고해성사를 하기도 뭣하고.


이대로 회사까지 달리면 더없이 좋은데 버스는 지하철로 갈아 타라고 문을 열어젖힌다. 내리기 싫은데. 내리기 정말 싫은데.


그래도 말이다.

' i5 CPU 컴퓨터와 두 대의 LG LCD 모니터, 그리고 타건감 좋은 무소음 키보드가 회사에서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텐데 어찌 안 갈 수 있겠니.'라고 스스로 세뇌하며 그렇게 어렵사리 출근했는데 눈 깜빡했더니 어느덧 밖이 깜깜하다. 벌써 퇴근?


나 또 월급루팡 한 건가?

아, 어이가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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