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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각하는냥 Feb 15. 2023

한 줄 두 줄

빌런의 실체

한 줄인가 두 줄인가? 김밥 이야기가 아니다. 지하철 에스컬레이터 이야기다.


대림역은 7호선에서 2호선으로 환승하는 역이다. 특징으로는 지하 2층에서 지상 3층으로의 약 5층 높이의 긴 에스컬레이터가 있다. 이 긴 구간은 한 줄 서기와 두 줄 서기의 충돌이 잦은 곳이다.


구간이 워낙 길다 보니 두 줄 서기로 갈 경우에는 약 3분의 시간이 소비되기 때문에 대부분의 이용자는 한 줄 서기를 선호한다. 


이곳을 이용할 때는 팁이 있다. 여유가 있을 땐 그냥 오른쪽에서 서서 올라가고 여유가 없을 땐 왼쪽에서 걸어 올라간다. 대체로 한 줄 서기를 하는 이 구간에서 여유가 없을 때 길막 빌런이 등장할 때가 종종 있다. 그래서 멀리서부터 길막 빌런이 있는지 없는지 체크를 해야 한다. 길막 빌런은 멀리서도 기운이 느껴진다.


오늘은 여유가 있어 오른쪽에 서 있었다. 그런데 바로 왼쪽 앞쪽에 60대 후반으로 보이는 할머니가 길막을 시전하고 있는 게 아닌가. 내 앞 공간에 계단 2칸의 여유가 있어서 할머니에게 오른쪽으로의 자리 이동을 권유하였다. 그러나 할머니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다시 한번 '할머니 뒤에 사람들 있으니 자리 좀 비켜주실래요?'라고 하니 그제야 고개를 돌려 보았다. 그러더니 두 줄로 서서 올라가야 안전하다고 하다며 너무도 당당하게 서 있는 게 아닌가. 앗 빌런이다.


다시 한번 '뒤에 많은 사람들이 서 있으니 잠깐 비켜주세요'라고 하니 '젊은이, 저기 팻말에도 두 줄로 서서 가라고 되어 있잖아' 공사 측에서 그런 팻말을 붙여둔 터라 강제적으로 비켜달라고 할 순 없었다. '그건 알겠는데 뒤에 많은 사람들이 못 가고 있잖아요.' 뒤에 서 있던 몇몇 사람들도 공손하게 비켜줄 것을 부탁하였지만 소용없었다. 할머니의 두꺼운 뿔테와 뽀얀 화장, 빨간 립스틱이 '똥고집'을 강조하고 있었다. 꿈쩍도 하지 않는 벽 앞에 사람들은 그만 설득을 포기하고 말았다.


한 줄 서기와 두 줄 서기 중 대체 뭐가 맞는 건지 궁금하여 서울지하철 고객센터 1577-1234로 전화를 걸어 보았다. 어렵게 상담원과 전화연결이 되었다. 둘 중 뭐가 맞냐 물으니 상담원의 답변이 예술적이었다.


"안전하게 서기가 맞습니다."


안전하게 서기라는 이 난해한 표현은 또 뭘까. 지나가던 유치원생이 듣더라도 탁상행정의 냄새가 코를 후려 파고 들어왔다.


"그럼 둘 중 뭐가 맞나요?"

"한 줄 서기도 맞고 두 줄 서기도 맞습니다."

"그럼 왜 두 줄로 서서 가라는 안내 팻말은 달려 있는 건가요?"

"......"

"공사가 정확한 가이드를 해야 하는데 왜 공사가 앞장서서 이용자를 헷갈리게 만드는 거죠?"

"....."


답변을 못하는 상담원을 들들 볶아봐야 해결이 될 문제는 아니었기에 담당부서로 내용을 전달해 달라 하고 전화를 끊었다.


사실 바로 전화를 끊은 것은 아니었다. 자신들도 그때그때 정책이 달라져서 어쩔 수 없다는 비 주체적인 변명을 들어야만 했다. 정부가 이 문제에 대해 그때그때 정책을 달리 하더라도 공사가 입장을 확고히 하면 벌어지지 않을 문제다. 솔직히 이 문제로 정부에서 나서서 이래라저래라 할 문제도 아니지 않나. 공사가 입장이 없으니 정부가 이래라저래라 하는 것에 휘둘리는 것 아닌가. 그러니 이용자들끼리 싸우든 말든 관심조차 가지지 않는 게 팩트지.


관련 기사를 조회해 보니 2002년에 한 줄 서기를 시행했다가 2007년 두 줄 서기로 잠깐 전환이 되고 그 이후로는 그때그때 말 바꾸기 잔치판이었던 듯싶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현재 2023년까지도 입장을 명확하게 취하고 있지 않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다.


어딜 가나 빌런은 있기 마련이다. 다만 빌런의 주장을 공사가 제공하고 있다는 게 문제인 것이다. 또한 그런 상황이 16년 넘게 발생하고 있는데 여전히 방치하고 있다는 게 최악인 것이다.


뭐 그러든지 말든지.

할머니가 분명히 나한테 그랬다. "젊은이"라고. 오늘의 킬링 포인트다.

그래, 빌런은 '지하철공사'지 할머니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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