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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각하는냥 Feb 22. 2023

퇴근에서 새벽까지

득템

1.

저녁 10시 퇴근길, 저녁 식사 전이라 배고파서 예민한데 지하철 승강장에서 여자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만약 꽤 늦은 시간에 둘 밖에 없었더라면 오싹할 법한 한 맺힌 울음소리였다. 누굴까 싶어 보니 검은 마스크에 웨이브 파마를 한 단발머리 처자가 고개 숙이고 서럽게 울고 있었다.


술 한잔하고 습관처럼 우는 것일 수도 있고, 과도한 업무로 인한 스트레스가 폭발한 것일 수도 있고, 남자친구에게 이별을 통보를 받아서 일수도 있겠지만 그녀에게 우는 이유는 뭔가 특별한 게 있을 것이다.


서럽게 우는 모습이 은근히 부러웠다. 긴 머리카락이 얼굴을 가려주니 남의 시선 신경 쓰이지도 않고 얼마나 좋아. 가끔은 다 큰 남자 어른인데도 울고 싶어질 때가 있다. 그때 저 아이템이라면 유용하게 쓸 수 있을 텐데 말이다. 1년 동안 머리를 길러 볼까?


전에 머리를 길러서 펌을 한 적이 있었다. 대부분은 멋지다 그랬는데 한 보수적 생각을 가진 이가 당황스러운 말을 하였다. 성 정체성에 문제가 있는 거 아니냐고.


이런 황당한 말을 들으면 맨 처음엔 잘못 들었나 싶어 그냥 웃고 만다. 그런 다음 방금 들었던 말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을 하며 사태 파악을 한 후 피해야 할 사람으로 분류하여 거리를 둔다. 나 좋다는 사람은 상관없지만 싫다거나 무관심이거나 위험해 보이는 부류까지 가까이할 여력이 없다.


생존본능 더듬이가 귀에 대고 속삭인다. 저 여인이 언제 폭주할지 모르니 일단 20m는 거리를 띄워야 하지 않을까? 나도 모르게 이미 다리는 20m 이상을 움직이고 있었다. 안전거리는 필수다.



2.

지하철에서 내리니 늘 지나가던 길의 안경점 하나가 사라져 있었다. 인테리어까지 모두 철거된 터라 어두운 밤인데도 불구하고 상점 안은 날 것 그대로의 시멘트가 그대로 보였다. 오랫동안 있던 안경점이었는데 먹고살기가 녹록지 않았나 보다. 가던 안경점은 아니었지만 한 시대를 같이 달리던 사람이 경로이탈을 한 것 같아 왠지 모르게 안쓰럽다. 경로이탈이 부디 잠시뿐이길 바랄 뿐이다.


그런데 말이다. 폐업할인을 했었을 텐데 아쉽게도 득템은 실패다.



3.

저녁을 먹지 않아 편의점 도시락을 하나 골랐다. 집에 가면 밥이 있지만 가끔 편의점 도시락이 생각날 때가 있다. 몸에 좋지 않으니 차라리 음식점에 가서 밥을 사 먹는 게 좋겠지만 저녁 10시가 넘은 거리는 술집 빼곤 거의 문을 닫았다.


도시락 하나를 골랐는데 직원이 이벤트 상품이라며 컵라면을 추가로 주었다. 


뿌듯한 마음으로 뜨거운 물을 바로 부었건만 예상치 못한 '맛없음'에 당황하였다. 이건 벌칙 아니냐고.



4.

소화가 되지 않아 남들 다 자는 시간에 새벽을 고스란히 보내야만 했다.

새벽시간은 각종 잡생각으로 채워진다. 그러다 생각지도 못한 것을 발견하게 되는 고마운 시간이기도 하다. 


문득 오래된 사진첩을 보다가 이미지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25년 전에 빠졌던 연필화 그림인데 구글링을 하다가 원본 사진도 찾았다. 습자지를 대고 윤곽을 따서 명암을 넣은 건데 전문 화가들은 이런 걸 그림으로 쳐주지는 않는다. 하지만 25살 청년에게는 그 당시 꽤 흥미 있는 취미 중의 하나였다.


하루 2시간씩 보름 가까이 투자해서 그린 '김원준', 그리고 하루 2시간씩 한 달 가까이 투자해서 그린 '차인표'. 김원준은 아직도 가지고 있지만 차인표는 한번 만나고 마음에 들었던 여자에게 액자까지 해서 선물로 주었다. 나쁜 x, 사귀지도 않을 거면 받지나 말지. 2시간 x 30일 = 60시간을 가져가 버렸다. 준 거니까 할 말은 없지만 인생에서 후회되는 몇 안 되는 순간 중의 하나다. 아마 그녀에게 있던 차인표는 어느 날 쓰레기통에 처박혔겠지. 그러고 보니 아끼던 모자까지 마음에 든다며 가져가놓고 연락을 안 줬다. 생각할수록 판타스틱하게 나쁘지 아니한가. 


연필화 취미는 딱 그때뿐이었다. 사진기로 찍고 뚝딱 거리면 뽀샵까지 되는 세상에서 연필화를 그린다는 건 도 닦는 것이다. 지금은 너무도 타락하여 도 닦는 건 둘째치고 이 닦는 게 최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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