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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각하는냥 Mar 02. 2023

애매한 하루

세상은 넓고 X도 참 많다.

무당이 특정 글자나 쌀을 던져 점을 치는 것처럼 언젠가부터 하루의 운을 예측해 보곤 한다. 특별한 행동을 하는 건 아니고 출근길 동안 별일의 유무로 하루의 운세를 예측하는 일이다. 빌런을 만난다거나 뭔가 특별한 일이 있으면 대체로 하루가 꼬였고, 별일 없이 무난하면 하루동안 아무 일도 없었다.


눈치 빠른 사람은 알아챘을 것 같다. '아, 이 사람 또 오늘 빌런 만났구나?'


지하철 창밖이 어두워지면 거울처럼 되어 유리창에 등뒤의 세계가 그대로 비친다. 그것을 가리키는 특정 단어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개인적으로는 그것을 '검은 스크린'이라고 부른다.


출구 쪽에 서 있었다. 그때 출구 문 유리창의 검은 스크린에 얼굴 하나가 빼꼼히 들이밀었다 숨었다를 반복하는 게 아닌가. 바로 등 뒤였다. 몇 번을 반복해서 그러길래 등 뒤에 미친 사람이 붙었나 싶어 진돗개를 발령하였다. 일단 눈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 무신경한 척 이어폰을 끼고 음악을 들었다.


언뜻 보기에 마스크를 썼지만 키가 약 178쯤으로 보이는 말끔한 20대 초반의 청년이었다. 검은 스크린에 빼꼼히 얼굴을 들이미는 모습이 시선에 따라서는 귀여워 보이기도 하였다. 그 나이대가 그런 광기를 가질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이상 행동을 보이는 사람을 경계하지 않을 순 없었다.


그래도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는데 이번에는 이어폰 너머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구호도 들리고 뭔가 끄응하는 소리도 함께 들렸다. 고개를 들어 검은 스크린을 보고 나서야 그 소리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붐비는 지하철이 아니라서 공간이 있기는 하였지만 검은 스크린을 보면서 춤을 추고 있는 게 아닌가. 많이 잘 추는 것도 아닌데 못 추는 것도 아닌 그런 춤을 추고 있었다. 그러더니 다리를 벌려 스트레칭도 곁들이는 건 뭐라고 해야 할지.


'아, 이 미친 X은 대체 뭘까.'


관종끼가 다분한 유튜버가 영상촬영 중이거나 아니면 정말 미친 부류 거나 둘 중 하나가 아닐까. 마음 같아서는 사람들도 많으니 매너를 지켜달라고 하고 싶었지만 일단 그가 내 말을 들을 리 없었고, 만약 유튜버라서 영상촬영 중이라면 괜히 그의 낚이는 물고기가 되고 싶지도 않았다. 어차피 등 뒤에서 폭주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언제 어떤 짓을 할지 모르니 일단은 주먹을 쥐었다 폈다 뒤꿈치를 들었다 내렸다 하며 아주 소심하게 상대가 눈치 못 채게 준비운동을 하였다. 그래도 세상 일이라는 게 혹시 모르니까 말이다. 


그렇게 걱정하고 있을 무렵 그가 다행히 다음 정거장에서 내렸다. 그것도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것처럼 매우 뻔뻔하게 정상인 코스프레를 하면서 말이다. 대체 어떤 깡이어야 저런 행동을 할 수 있을까? 한 편으론 철없단 생각도 들고, 다른 한 편으로 그런 객기를 부릴 수 있는 광기가 부럽기도 하다. 한 번도 그래 본 적이 없으니까.


그런데 말이다. 이건 대체 좋은 거야 아닌 거야. 하루의 운을 점치기에 정말 애매하지 않은가? 빌런이라고 하기에는 딱히 나쁜 일을 한 것도 아니고, 불안한 요소는 분명 있었지만 오히려 즐거움을 준 친구라서 평점을 주기가 정말 애매하다. 어쩔 수 없이 오늘 하루의 운은 그냥 '애매한 하루'로 예측을 해 본다.


세상은 넓고 X도 참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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