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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각하는냥 Mar 22. 2023

어쩌다 봄

해, 산, 물, 돌, 구름, 소나무, 불로초, 거북, 학, 사슴을 품고

버스를 타니 빈자리 몇 개가 눈에 띄었다. 앞에 타던 사람들이 빈자리를 채우고 내게 떨어진 건 어떤 이름 모를 아저씨의 옆자리. 몇 정거장 가지 않기 때문에 백팩을 멘 채 비스듬히 앉았다.


몇 정거장 지나다 보니 뭔가 스멀스멀 올라오는 기운에 옆을 슬쩍 보니 옆 자리 아저씨의 쩍벌이 눈에 들어왔다. 쫙 벌어진 다리와 어깨가 너무도 위풍당당해 보였다. 다리 벌려봤자 보여줄 것도 없어 보이는데 저렇게 벌리는 이유는 아마도 허벅지가 너무 부실해서겠지.


다음 정거장에서 내려야 해서 일어나 뒷문 근처 가니 앞에서 유난히 부딪히는 아주머니 때문에 살짝 뒤로 물러나야만 했다. 내리려고 그러나 보다 싶었다. 그런데 문이 열리니 너무 당당하게 서 있는 게 아닌가. 날렵하게 몸을 틀어 사뿐히 내리기는 하였으나 저절로 입에서는 십장생이 소환되었다.


해, 산, 물, 돌, 구름, 소나무, 불로초, 거북, 학, 사슴을 품고 지하철 플랫폼에 들어가니 여자들의 화사한 옷차림이 봄소식을 알린다. 아직도 춥다고 경량패딩 꽁꽁 챙겨 다니고 있었는데 말이다. 봄소식은 아름다운 것들만 알려준다. 꽃도 그렇고 여자들도 그렇고. 남자들의 옷은 그저 얇아지기만 했을 뿐 대체로 칙칙하다. 간간이 몇몇을 빼면 남자들은 왜 다 칙칙한 것인지 알다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지하철역 스크린에 반사된 익숙한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런, 남 얘기할 때가 아니구나.'


툴툴 거리며 지하철을 타니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은 사람들이 눈에 띈다. 지난 20일부터 대중교통에서도 마스크 해제가 되며 이제 '마스크 빌런'을 볼 일은 사라져 버렸다. 제대로 착용하라고 그렇게 말을 해도 듣지 않던 그 빌런들은 이제 빌런으로서의 자격이 박탈되었으니 일반인으로서 편히 살게 될 것이다.


문득, 사람들에게 난 어떤 빌런일까라는 궁금증이 생겼다. 누군가에게는 나도 빌런일 텐데 말이다. 이건 그냥 내가 나에게 보내는 궁금증일 뿐이다. 그러니 혹시라도 댓글을 남긴다면 혼내줄 테야. 그냥 꾹꾹 담아두고 혼자만 생각하기.


대림역에서 7호선에서 2호선으로 갈아타는 구간은 6층 높이의 에스컬레이터를 올라가야 한다. 가끔 옆 계단을 걸어서 올라가는 사람들이 더러 있지만 황급하게 뛰어 올라가는 이가 보였다. 그를 응원한다. 끝까지 뛰어서 올라갈 수 있을 거야. 파이팅! 난간에 가려 보이지 않게 되니 끝까지 뛰었는지 아닌지는 모르겠다. 


환승한 승강장에 들어서니  바로 코 앞에서 지하철을 놓치고 말았다. 아, 아까 그 사람은 탔겠지?  지하철 딸랑 하나 놓쳤을 뿐인데 다음 지하철을 30분이나 기다려야 하는 '지옥타이밍'에 딱 걸려들고 말았다. 이 시간을 그렇게 피하려고 했는데 이 늪을 벗어나지 못하는 건 습관 때문이기도 하고 남은 열심히 뛸 동안 멍하니 바라만 본 익숙함 탓이기도 하다. 절실하지 않으니까 기다림의 지옥인 줄 알면서도 대면하게 되는 것이다. 그 30분이라는 시간을 버리는 시간이 아닌 여유의 시간으로 맞이하기 때문에.


좋은 것일까? 나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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