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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각하는냥 Apr 12. 2023

망상

야근이 정신 건강에 해롭다는 건 분명하다.

여기는 늦은 퇴근길의 지하철 안이다.


커플은 서로 마주 보며 꽤 밀접하게 서 있었다. 커플의 키 차이가 거의 나지 않는 데다가 남자의 등 뒤에 서 있다 보니 간간이 여자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런 와중에 그녀의 눈동자가 보일 때면 부끄러운 듯 애정이 가득 담긴 눈빛으로 남자를 바라보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남자는 주위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여자의 볼과 입술, 그리고 귀 근처를 입술이 닿을 듯 말 듯 지하철 흔들림에 맞춰 춤을 추었다. 분명히 스킨십은 아니었지만 여자가 부끄러운 듯 홍조 띤 얼굴로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홍조의 원인이 은밀한 사랑의 언어를 속삭인 탓인지 아니면 가까이 다가오는 남자의 입술 때문인 것인지 아니면 술을 살짝 들이켜서 인지 알 길은 없었다. 어쩌면 셋 모두 다 해당되는 사항일지도 모른다.


여자가 남자의 귀에 속삭이자 남자도 여자의 귀에 속삭였다. 몇 번을 그러더니 여자의 볼이 아까보다 더 붉어졌다. 대체 뭐라고 한 걸까? 궁금하게. 눈앞에서 보고 있자니 제발 둘이 키스라도 해주기를 바라게 되었다.


'키스해, 키스해, 키스해'


등 뒤에 서 있어서 보이지 않는 남자의 눈빛이 궁금해졌다. 어쩌면 금방이라도 여자를 삼켜 버릴 것 같은 욕망으로 가득 차있는 그런 눈빛일 것이 분명하다. 그러지 않고서는 여자의 얼굴이 저렇게 홍조를 띨 수도 눈빛이 저리 사랑스러울 수도 입술이 바짝 타들어가 있을 수도 없을 것이다.


둘의 눈빛 교환을 더 바라보고 싶었지만 다음 역에서 문이 열리자 불행하게도 둘은 바로 내려 버렸다. 둘이 꼭 손 붙잡고 내리는 거 보소. 모텔각이다. 어? 그런데 이 역에는 둘이 갈만한 모텔이 없지 않나? 아니다. 그녀의 집 혹은 그의 집이 근처일 수도 있지 않은가.


저녁을 먹지 않은 늦은 퇴근길의 망상은 그렇게 끝이 났다. 망상이 깊어지는 이유는 애정이 고픈 것일까, 아니면 밥이 고픈 것일까, 아니면 아직도 철이 없어서일까. 아니다. 이따위 망상에 퇴근길이 즐거운 이유는 아마도 셋 모두 다 해당되기 때문일 것 같다.


이쯤 되면 결론은 하나다. 야근이 정신 건강에 해롭다는 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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