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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각하는냥 Apr 19. 2023

뭐든 씹으면 맛있다.

평범한 일상의 흐름에서 비켜 나온 문득 한잔

퇴근을 목전에 둔 시점에 전화가 왔다. 하필이면 업체 담당자였다. 이 분의 특징 중 하나는 했던 말 또 하고 또 하는 분이었다. 이야기를 시작하면 5분이면 끝날 얘기를 20~30분 끌어가는 시간 능력자였다. 그러면서 '언제 퇴근해요?'라고 묻는데 차마 '전화를 끊어야 집에 가죠'라는 말은 하지 못하는 나는 쫄보다.


결국 끝까지 다 들어주고 나서야 겨우 전화를 끊었는데 또 전화가 울렸다. 지인의 전화였다. 전 직장에 1년 간 같이 있었던 팀원인데 1년 전부터 퇴근길에 술 먹자고 하던 친구였다.


자주 연락이 오는 건 아니었지만 그때마다 일이 있어 만나지 못했다. 한 번은 눈병이 나서, 한 번은 1년에 대여섯 번 밖에 하지 않는 회식이 하필 그날이어서, 한 번은 이미 퇴근을 하고 있어서. 그렇게 네다섯 번을 연기했는데 이번은 저녁 8시라는 늦은 시간 빼고는 딱히 걸리는 게 없었다.


사전 약속 없이 술 마시는 걸 즐기지는 않지만 이 친구는 예외였다. 그래도 같이 있던 팀원이 저녁 8시가 다 되어 술 먹자 하자는 건 뭔가 할 말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무슨 말을 하지 않더라도 같이 있어줘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약속을 하고 나서 생각해 보니 아차 싶었다. 며칠 전 머리 커트를 했는데 머리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커트 한지 두 달이 넘었으니 잘 깎아 달라고 했건만 너무 짧게 깎아놔서 머리가 폭탄이 되었다. 이미 약속은 했고 온갖 야한 상상을 한다 해도 30분 내로 모발이 3cm 이상 자라줄 리 없었다.


폭탄 맞은 머리로 나가서 몰라보면 어쩌나 싶었는데 다행히도 그는 단번에 알아보았다. 퇴사 후 약 4~5년 만이었는데도 그는 달라진 게 전혀 없었다. 그래서 그런지 함께였던 그 시절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걱정했던 것과는 다르게 딱히 직장 생활에서의 어려움도 사는 고민도 없었다. 그냥 단지 나와 한잔 술이 하고 싶었다 한다.


그러던 중 5년 전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하다 소환된 SS에 대한 추측이 사실로 알게 된 것은 그다지 놀랍지 않았다. SS의 실체를 짐작하여 연락을 끊었던 일은 꽤 잘한 일이었다. 그런 그가 지난번에 노여워할 일이 있었던 걸 상기하며 같이 고소해하였다. 술이 어쩌면 이리도 달디 달 수 있을까.


사람은 끊임없는 희로애락의 반복 속에 살아간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누구든 기쁨과 노여움과 슬픔과 즐거움의 순환 고리를 피해 갈 순 없다. 고로 나에게 쓰레기였던 누군가도 내가 알지 못하는 시점에 노여울 일이 생기는 법이다. 그걸 천벌이라고 생각하면 고소해지는 거 아닐까. 다만 그의 슬픔까지 고소해하고 싶지는 않다. 같은 인간으로서 슬픔은 건드리지 말자.


'육회와 연어'에 사케 750 한 병을 시켜 둘이 먹다가 안주가 바닥나자 지인이 안주에 대해 살짝 아쉬워하는 듯 보였다. 뭐 먹을까 메뉴판을 보고 있는데 벽에 붙어 있는 어느 유명인의 사인에 라멘이 맛있다 쓰여 있는 걸 발견하고는 라멘 2개를 시키게 되었다. 시키기 전에는 '다 먹을 수 있을까?'라며 서로의 얼굴을 보며 웃었다.


막상 라멘이 나오자 다 먹을 수 있다던 지인은 얼큰한 라멘을 남겼고, 다 먹을 수 없다던 나는 고소한 라멘을 다 먹어 치웠다. 그걸 어떻게 다 먹을 수 있냐며 웃으며 물었다. 다 먹고 나서 국물만 남은 그릇 안을 젓가락으로 휘저으며 분명 먹기 전엔 배불렀는데 다 먹고 난 다음 허전한 것에 대해 물음표를 던졌다. 역시 뭐든 씹으면 맛있다는 진리는 변하지 않는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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