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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각하는냥 Apr 21. 2023

친절을 넣었는데 불친절이 나와 버렸다.

주문을 외워보자 '참아야 하느니라.'

킨텍스 전시회를 돌아다니다 어느덧 체력이 바닥나 버렸다. 주는 대로 받은 팸플릿으로 가득 들고 전시회를 나서는데 봄비 덕에 우산까지 들으니 양손이 바쁘기 그지없다. 하필이면 가랑비라 은근히 빗발에 젖어가는 옷이 피곤을 절로 불러왔다. 보지도 않을 팸플릿을 왜 이리 많이 가져왔을까. 순간 입지도 않는 옷장 안에 걸린 옷이 연상되는 건 무엇?


지하철에 탑승하여 겨우 자리에 앉았는데 백발의 할머니가 구석의 경로석을 무시하고 가운데 자리에서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평소 같으면 양보할 터인데 피곤에 절어 내 코가 석자인지라 망설이던 찰나 어느 마음 좋은 아저씨가 자리를 양보하였다.


전시회에 같이 갔던 직장 상사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금세 목적지에 도착하여 내리려고 자리에서 일어날 즈음 어디선가 나이 많은 여자의 큰 목소리가 들려왔다.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못 알아 들었다. 또다시 들려와 귀를 기울이니 어떤 할머니의 화난 목소리였다.


"똑바로 좀 앉아."


소리의 진원지가 궁금하여 두리번거리니 아까 자리를 양보받은 할머니였다. 옆 자리에 앉아 있던 처자가 난처한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가 다른 자리로 옮길게요."


다소 당황한 듯 창피한 듯 수줍은 듯 언짢지만 정색하지 않는 목소리였다. 황급히 다른 차량으로 이동을 하는데 당황했던지 문을 열다 그만 문에 부딪히고 말았다. 상황을 보니 따뜻해진 봄날씨 덕에 졸다가 할머니 쪽으로 고개를 몇 번 떨궜던 모양이다. 지하철에서 누구나 한 번쯤은 해봤을 그것 말이다.


대개 이런 경우 할머니가 어깨를 빌려주며 처자가 일어날 때까지 기다려 주는 따뜻한 그림을 상상하게 되는데 할머니의 심보는 따뜻함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자리양보의 친절은 당연한 거라고만 생각했을까? 자신이 받았던 친절을 타인에게 불친절로 되갚은 양심이라니. 꾸벅거리는 게 싫었으면 그냥 툭툭 건드려서 잠을 깨게 하든가 아니면 어깨를 잠깐 빌려줄 법도 했을 텐데. 지하철을 나오면서 어이가 없어 구시렁거림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친절을 받은 분이 왜 저러나 싶네요."

"그러니까. 지하철도 무료로 이용하는데 말이지."

"그렇긴 해요. 근데 지하철 무료는 젊었을 때 세금을 잘 낸 것에 대한 혜택이잖아요."

"근데 저 할머니가 젊었을 때 세금을 잘 냈을까?"

"....."

"세금 잘 낸 사람들은 안 저럴걸?"


나이 들어 심보가 못난 사람들이 젊었을 때 착실하게 살았을 리 없다는 말이 억측일 뿐이긴 한데 일반적으로 그럴 가능성은 다분해 보였다. 일반화의 오류일 수도 있지만 웬만해서는 사람의 시선은 크게 다르지 않다. 세금을 착실하게 잘 낸 사람으로 보이기 위해서 이제부터라도 인격 수양을 해야 하나? 주문을 외워보자. '참아야 하느니라, 참아야 하느니라, 참아야 하느니라.'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세상에 뒤로 걷는 건 아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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