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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각하는냥 Jul 02. 2024

한 여름밤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

늦은 저녁, 길을 잘 모르는 누나를 위해 버스정류장까지 배웅하는 길이었다. 캄캄한 저녁이었지만 동네 놀이터는 가로등 때문에 그다지 어둡지만은 않았다. 멀리 벤치에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젊은 남녀 한 쌍이 더위에도 불구하고 달라붙어 앉아 있었다. 둘의 연애가 부러웠던 모양인지 나도 모르게 말이 튀어나와 버렸다.


"아, 저것들 보소. 연애하는갑네."


굳이 나쁜 의도를 가지고 한 말은 아니었다. 오히려 부러워서 던진 말이었는데 생각과는 다르게 불쑥 튀어나온 말이 요따위였다. 스스로도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이미 뱉어 버린 뒤였다. 어쨌거나 그들과 먼 거리였던 터라 그들에게 들릴 일은 1도 없었다. 


그때 바로 눈앞에 있던 정자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정자 앞에 붙여져 있던 현수막 때문에 정자에 사람이 있으리라곤 생각도 못한 것이다. 게다가 하필이면 연애를 하고 있던 또 다른 커플이었다. 누워 있던 남자가 상체를 일으키더니 내쪽을 바라보았다. 


누나를 배웅하러 가는 길이 자칫 누나에 의해 배웅당하는 길이 될지도 모를 일촉즉발의 순간이었다. 하필이면 현수막, 하필이면 캄캄한 저녁, 그리고 하필이면 생각과 다르게 튀어나온 말, 그야말로 완벽한 3박자였다. 대여섯 걸음을 내딛는 동안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다행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는 않았다. 불룩 튀어나온 똥배의 위엄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옆에 있던 누나를 와이프로 착각하여 중년 부부라 생각하고 너그러이 봐준 것인지도 모른다.


몇 걸음 벗어나고 나서야 전혀 눈치채지 못했던 누나에게 바로 옆의 긴박했던 짧은 순간을 얘기해 주니 빵 터져 버렸다. 


버스정류장에 도착하니 혼자서 갈 수 있다며 그만 가보라는 누나, 하지만 차마 혼자 갈 수 없었다. 좀만 더 있다 갈게. 버스 타는 것까지만 보고 간다고. 놀이터 정자에 그 남자가 아직도 있을 거 같아서 안 간 것은 결코 아니었다. 믿거나 말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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