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랑찰랑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고 누가 그랬던가.

by 생각하는냥


얼굴이 촉촉하다 못해 윤기가 절절 흘러내릴 것만 같고 잔털은 찰랑찰랑 거릴 것만 같다.


며칠 전이었다. 회사일이었나? 개인적인 일이었나. 뭔지는 모르겠지만 깊은 생각에 빠진 일이 있었다.


가만, 깊은 생각까지 했으면서 왜 그 깊은 생각이 무엇이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

잡념이 많아서 그런 것 같다. 이렇게 쓰지 않으면 누군가 나이 탓이라고 할 것 같아 사전 차단 방어용 핑계다.


어쨌든.

깊은 생각을 하다 샤워를 하러 욕실로 향하였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머리부터 적시고 샴푸를 손에 덜고 충분한 거품을 내었다.


그러다 다시 깊은 생각에 빠졌다. 그 기억도 나지 않을 깊은 생각을 하고 있다가 보니 어느덧 얼굴을 마사지하고 있었다. 거품이 난 채로 일상의 패턴대로 당연히 클렌징 폼의 거품이겠지.


어?

가만 생각해 보니 샴푸를 짠 기억은 있는데 클렌징 폼을 짠 기억이 없었다. 그렇다면 얼굴을 이 거품의 정체는 뭐란 말인가?


아뿔싸.

샴푸인가?


당황하여 얼른 거품을 씻어내었다. 확실한 것은 클렌징폼의 씻김은 아니었다.


'샴푸구나.'


아무리 딴생각을 하고 있었다지만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떻게 샴푸를 헷갈릴 수가 있단 말인가.

눈감고도 할 수 있는 삶의 패턴이 이렇게 쉽게 무너지다니.


초등학교 1학년 때였나? 어머니가 사다 주신 로션으로 인해 피부가 뽀송해지는 경험에 잔뜩 흥미에 빠져 있던 때였다. 처음 접했던 로션의 촉감과 향기가 정말 좋았다.

어느 날 어머니가 뭔가를 사 오셨다. 당시 어린아이의 눈에는 로션 케이스와 디자인이 비슷하여 당연히 로션이라고 생각하였다.

신나서 손바닥에 덜었을 때 뭔가 기존의 로션과는 달랐다. 신제품인 줄 알고 손바닥에 잔뜩 덜어내어 얼굴에 이중삼중으로 잔뜩 바른 다음 케이스에 쓰인 글씨를 하나둘 살펴보았다. 어라? 피부 얘기는 없고 머릿결에 대한 얘기만 잔뜩이었다. 처음 접한 샴푸라 머리에 어떻게 쓰는 건지는 잘 몰랐지만 로션이 아닌 것은 분명하였다.

어찌나 박박 씻어댔던지 얼굴이 다 빨개졌었다.


그때 이후로 2번째다.

이미 벌어진 일이다.


그래도 탈모 완화 천연계면활성제 제품이라 얼굴에 난 잔털들은 뽀송뽀송해지겠지.

피부도 두피처럼 촉촉하다 못해 윤기가 자르르 흘러내리겠지.

그리고 눈물도 줄줄 흘러내리겠지.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고 누가 그랬던가.

잠깐만 슬퍼할게.

꺼이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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