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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타미 Dec 14. 2020

오늘은 다행히 죽고 싶지 않은 날


아무튼 죽고 싶지 않은 날이었다. 오늘은 죽고 싶은가 생각해보니 그렇지 않은 날 중 하나였다. 드문드문 그런 날이 있다. 드문드문 아닌 날들도 있었다. 어느 날도 그저 익숙했다.


같이 사는 친동생과 나는 비슷한 노선을 걸었다. 나는 국가 공공기관 근로 계약 기간이 만료됐고, 동생은 전염병 때문에 근무 일수가 단축됐다. 집 안에 둘이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건 긍정적이기도 하고, 부정적이기도 했다. 나보다 훨씬 덜 예민한 동생은 나의 존재를 크게 신경 쓰지 않았고, 영향을 받지도 않았다. 반대로 나는 동생이 집에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나와 같이 비루한 운명의 배를 탄 것 같아 짜증이 났다. 한 사람이라도 잘 나가길 바랐다. 내가 비교되고 초라해져도 괜찮으니 한 명쯤은 잘 나가고 돈도 잘 벌었으면 더 나았겠다 싶었다. 동생의 모습에 괜히 내 모습이 투영됐다.


지난 1년 간 한 여행 신문사에서 기자로 일했었다. 몇 개월이나 됐을까. 아직 사회 초년생일 무렵 옆자리 부장이 당일 권고사직 통보를 받고 짐을 싸서 나가는 장면을 목도했다. 그리고 채 몇 개월이 지나지 않아 월급이 일주일 정도 밀렸다. 회사 측에서는 미안하다는 표시도 없었다. 대학생 때 그렇게 알바를 많이 했었지만 단 한 번도 월급이 밀린 적은 없었다. 회사에서 주는 월급이 밀릴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이었다. 내가 다니는 회사가 이 정도고, 내 수준이 그 정도라는 게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월급은 깎여갔다. 처음에 조금 깎이던 월급이 점점 더 많이 깎여갔다.


"너희 돈 많이 쓸 데도 없잖아?"


월급을 깎는 사장에게 들었던 말이다. 그때 태어나서 처음으로 모멸감이라는 감정을 느꼈다. 미안하다고 싹싹 빌었으면, 죽는 상으로 회사 사정을 구구절절 설명했으면 마음이 약해져 조금이나마 견딜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니었다. 회사를 다니는 12개 월 동안 모아둔 돈은 없었고, 오히려 마이너스가 나기 시작했다. 쥐꼬리만 한 월급에 다시 또 월급이 깎이자 서울살이가 버티기 힘들었다. 딱 1년만 채우자고 다짐했고 그 다짐을 지켰다. 


그리고 한 달 후 국가에서 운영하는 공공근로 사업에 지원했다. 당장 일단 돈이 필요해서였다. 뭐라도 해야 했다. 운 좋게 서울도서관에서 일할 수 있게 됐다. 문제는, 할 일이 없었다는 것이다. 일은 간헐적으로 주어졌다. 하루 종일 아무것도 안 하는 시간도 많았다. 처음에는 그게 어색해서 힘들었지만 금세 적응돼서 잠을 자거나, 책을 보거나, 공부를 하거나, 사람들이랑 떠들고 놀았다. 일하는 4개월 동안은 정말 '잉여' 인간이 된 듯한 기분이었다. 일이 어떻냐고 묻는 주변 사람들에게 일이 없어서 놀고 있다는 말은 차마 하지 못하고, 그냥 할 만하다고만 말했다.


공공근로조차 끝난 지 이주 정도 되었다. 나는 이제 많은 젊은이들이 그렇듯 '취준생' 백수가 됐다. 머릿속에는 계획이 있었다. 3월에 제주도 한 달 살기를 하고 난 후, 5월부터 출판 학교를 다녀 출판사에 취업하겠다는 그럴듯한 계획. 하지만 정해진 건 하나도 없었다. 출판 학교에 입사를 한다는 것도 불확실했고, 출판사에 취업을 한다는 것도 불확실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카드가 너무 적었다.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았다. 아니, 없었다. 일을 하고 싶었지만 제대로 된 곳에서 제대로 된 일을 할 수 없을 것만 같은 불안감에 휩싸였다. 나는 도대체 어떻게 산 걸까. 친구들은 모두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벌써 연차가 꽤 쌓인 친구부터 꿈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친구까지 모두가 나만 빼고 앞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나는 제자리걸음이었다. 계속해서 같은 자리를 맴돌고 있었다.


어떤 경쟁이든 이길 자신이 없었다. 앞으로 내가 해치워야 하는 것은 모두 경쟁이었다. 취업은 그중에 최고의 경쟁이었다. 나는 누굴 이길 자신이 없었다. 이기려고 노력도 못할 것 같았다. 나에게 부족한 건 노력이었고, 또 의지였다. 나는 애초에 그런 것들을 가지고 태어나지 못했다. 경쟁에 참전해 누구를 떨어트리기도, 내가 떨어지기도 싫었다. 글러먹었다. 이 사회에서 글러먹은 것이다.


취업에 대한 불안감은 창업을 해볼까 하는 생각까지 이어졌다. 세상 물정을 아무리 몰라도 취업보다 창업이 쉽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내가 원하는 공간을 차리고자 하는 욕구는 있었기에 창업을 하면 어떨까 하는 막연한 상상이 펼쳐졌다. 일기를 보관하는 금고가 있는 공간, 무기명으로 이웃들과 편지를 주고받는 공간, 낭만 있고 특색 있는 공간을 마구잡이로 그려보았다. 청년 창업 지원금까지 잠시 알아봤다.


그러다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나는 사업할 깜냥도 없고, 무엇보다 집에 돈도 없다. 한 번 망하면 끝인 거다. 두 번 일어날 수는 없었다. 소득 없는 고민의 연속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하나의 꿈은 계속해서 글을 쓰는 것이었다. 작가가 되고 싶었다. 그 꿈조차 지금은 취업이라는 난제와 함께 흔들리고 있다. 글을 더럽게 못쓴다는 자괴감, 잘 나가는 젊은 작가들을 보면 느끼는 질투심에 마음은 평정심을 잃기 일쑤였다.


나는 아직 무엇도 아니고, 무엇이 되기도 힘들고, 무엇이 돼야 할지도 모른다. 이불속에 가만히 누워 생각해본다. 아마 이런 날들이 느슨하게 유지될 것이다. 추락하는 날도 있겠지만 이제는 아닌 날들이 더 많을 것이다. 오늘은 다행히 죽고 싶지 않은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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