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타미 Dec 26. 2020

시작은 미약하고 끝도 미약할지라도

편집자의 기록 01

그것은 섬광이었다. 그것은 오래 지속되는 잔잔한 물결이었다.


친한 친구의 애인이자, 나의 친구이기도 한 Y 언니에게 연락을 했다. 무거울 것도 없었다. 간단하게 카카오톡으로 시작했다. 많은 고민을 거듭하진 않았다. '하고 싶다'는 강렬한 마음이 들었고, 또 그것이 예전부터 오래된 생각이란 것을 알아차린 순간 바로 실행에 옮겼다.


"언니, 나랑 같이 책 내봐요. 언니는 작가로 나는 편집자로."


반은 거절당할 거라 생각하고 제안했다. Y 언니의 글은 예전부터 인스타그램이나 블로그를 통해 종종 접할 수 있었는데, 그때마다 마음에 박히는 문장들을 몇 번이고 만난 기억이 있다. 특히나 애인에 관한 글은 그 감정이 아주 미세한 선처럼 그려지고 있었다. 언니는 그림도 잘 그린다. 그 글과 그림을 엮고 싶었다. 독립잡지에서 주관하는 독립출판 수업을 고작 6주 들은 것이 내가 아는 출판의 거의 모든 것이었지만 일단은 말부터 던졌다. Y 언니가 뭘 믿고 나와 같이 책을 낼까라는 걱정에 거절도 각오했다. 예상외로 언니는 기뻐하며 제안을 받아들였다.


카톡으로 파편적으로 던진 책 기획안을 한글 문서로 정리했다. 아는 건 없으나 현재 말과활아카데미에서 듣고 있는 편집 수업과 인터넷 검색의 도움을 받아 작성했다. 인터넷에 떠도는 출판 기획안 양식을 참고해 자유롭게 작성했다. 어차피 이게 책으로 나오는 것도 아니고 우리끼리 보는 거니 부담 없이 작성했다. 물론 고민은 필요했다. 하지만 그 고민은 꽤나 재밌어 나를 놀라게 했다.


재밌다는 감각은 낯선 감각이었다. 하고 싶어서 자발적으로 시작했지만 그곳에서 재미를 느낄 거라곤 기대하지 못했다. 이 재미는 억지로 찾은 재미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감각이었다. 그렇게 출판 기획서를 작성해 언니에게 보냈다. 며칠도 지나지 않아 또 다른 아이디어가 떠올라 바로 기획서를 작성했다. 학교에서 학점을 주고, 회사에서 돈을 줘도 안 굴러가던 머리가 굴러가고 몸이 움직였다. 물론 거기까지가 머릿속에 든 전부였지만, 무언가를 하고 싶어 움직이던 느낌과 재미를 느꼈던 기억은 오래오래 나를 이끌 원동력이 될 것 같았다.


Y 언니는 2월까지 원고와 그림을 완성하기로 했다. 우리 둘 다 완성된 하나의 책을 내보는 것은 처음이라 이 기간이 긴지도 짧은 지도 잘 모른다. 출판사의 이름을 정하고 출판사 신고를 했다. 출판사 이름은 '열대야'다. 의미는 없다. 열대야라는 노래를 좋아하고, 어감을 좋아하고, 느낌을 좋아한다. 그뿐이다. 무엇보다 아직까지 열대야라는 이름의 출판사는 없기도 하고. 또 인스타그램 계정을 만들었다. 열대야 출판사와 책이 나왔다는 사실을 알릴 창구가 필요했다. 로고를 디자이너에게 의뢰하고 구색을 맞춰가기 시작했다.


바로 날을 잡아 가까운 독립서점 투어를 시작했다. 내가 생각도 못할 것 같고 그리지도 못할 것 같은 내용과 디자인의 책들이 가득했다. 그중 대중적으로 크게 성공한 책들도 있었고, 책장 한편에 손이 닿지 않은 듯 보이는 책들도 있었다. 두 가지 모두를 상상해봤다. 어쩐지 전자보다는 후자에 가까워질 것 같은 불안감도 있었지만, 나만 잘한다면 그 중간은 가겠다는 긍정적인 확신도 들었다.


출판사 신고를 하고 단 한 권도 책을 내지 않은 출판사가 책을 낸 출판사보다 훨씬 많다. 열대야 출판사가 일회성 프로젝트로 끝나고 말지, 아니면 양질의 책을 꾸준히 출간하는 출판사가 될지 나도 모른다. 어떻게 되겠다는 원대한 포부는 없다. 책을 몇 권 이상 팔고, 매해 몇 권의 책을 내겠다는 목표는 아직 내게 과분하다.


시작은 미약하나 그 끝은 창대하리라는 성경 구절이 떠올랐다. 종종 식당 벽에서도 자주 보던 문구다. 그 말처럼 시작은 미약하나 끝은 창대하기를 조금은 바라지만 그렇게 되지 않더라도 지금의 재미와 고민을 잊어버리고 싶지 않다. 시작은 미약하고 끝도 미약하다 할지라도, 언제까지고 재미있기를 바란다. 언제까지고 지속되기를 바란다. 열대야 출판사의 많은 것을 그리기보다 눈 앞의 하루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싶을 뿐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