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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지혜 Mar 15. 2019

괜찮았다

병원에서 암 진단을 받던 순간엔 혼자였다. 회사에 복귀해 일을 정리하고 퇴근 후에 남편을 만났다.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머릿속에서 말을 고르고 또 골랐다. 한참 입을 열지 못하는 나를 보던 남편의 눈빛에서 불안함을 읽었다. 나도 모르게 이를 악물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당연하리라 생각했던 모든 것들이 한꺼번에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처음엔 강제로 내 삶이 멈춰진 것 같았다. 내 암이 다른 데로 전이가 된 건지, 그래서 수술을 바로 할 수 있다는 건지 없다는 건지도 모른 채 마냥 알 수 없는 검사를 반복하고 결과를 기다리는 일이 가장 힘들었다. 그때 어른들에게 이런 말을 많이 들었다.     


괜찮아, 요즘 유방암은 약이 워낙 좋아져서 괜찮대.

나이도 어린데 초기겠지, 괜찮아 그럼.

이참에 푹 쉰다고 생각하면 좋잖아.

그냥 수술하면 된대, 별거 아니래.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     


신경 써주는 마음에 감사해 늘 웃는 얼굴로 답했지만, 마음 한구석의 못난 나는 마냥 괜찮다고 말하는 그들이 원망스럽기도 했다. 묻고 싶었다.     


암 걸려보셨어요?

제 기분 아세요?

쉬고 싶지 않았는데요?

그냥 수술이요?

별거 아니라뇨?

괜찮다고요??     


그때 난 솔직히 괜찮지 않았다. 암 환자 본인이 아닌 이상 당연히 내 기분을 충분히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었으면서도 씁쓸했다. 그 무게에 휩쓸려 행여 가까운 사람들에게 뾰족하게 굴까 상처를 줄까 두려웠다. 암은 내 몫이다. 암은 내 몫이다. 내가 져야 할 짐을 다른 이에게 지우려 하지 말자고 다짐하며 밤을 보냈다.     


진단을 받고 4개월의 시간이 지났다. 그때와는 정말 많은 것이 달라졌다. 물론 장검에 베인 무사처럼 긴 흉터를 갖게 된 몸도 몸이지만, 그보단 삶의 자세와 마음가짐이 정말 많이 달라진 것 같다.

암은 분명 죽음에 이를 수 있는 무서운 병이고, 난 평생 재발을 조심하며 살아야 한다. 하지만 삶은 감사하게도 더 이상 손쓸 수 없을 만큼 늦기 전에 나에게 암을 알려주었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할 수 있다는 걸 알았다.     


암 덕분에 스스로를 더 아끼고 돌보게 되었다. 매일 운동을 하고, 영양가 있는 밥을 먹고, 충분히 잘 자려고 노력한다. 앞으로도 건강하려면 그 습관을 꾸준히 유지하라 하는 이 병이 내게 정말 나쁜 경험인 걸까? 이 정도 사건이 아니었다면 내가 지금처럼 삶의 방식을 자발적으로 확실히 바꾸려고 했을까?     


삶의 우선순위도 알게 되었다. 예전엔 행복이 1순위였다. 자야 할 시간에도 내가 행복한 다른 일을 하는 게 더 좋았다. 몸이 지쳤어도 내가 좋아하는 일이라는 핑계로 무리를 자처하기도 했다. 지금은 건강이 1순위다. 아프고 행복하기도 힘들겠지만, 아프고 행복할 수 있다 해도 싫다. 내가 원하는 일일지언정 건강에 반하는 일이면 이제 하고 싶지 않다. 건강해야 행복할 수 있다는 그 당연한 진리를 암 덕분에 깨닫게 된 것이다.     


내가 바라는 삶에 대해 깊이 고민할 수 있었다. 사춘기처럼, 진로를 고민하던 20대처럼 마흔을 앞두고 인생을 이렇게 치열하게 고민하게 될 줄은 몰랐다. 인생 통틀어 나와 가장 가까운 시간을 보낸 것 같다. 이 시간이 아니었다면 나 스스로와 이렇게 친해지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마치 보너스처럼, 가족들과 함께할 긴 시간을 얻었다. 광고대행사를 다니며 대리 때 지태를 낳고, 차장 때 현태를 낳았다. 철부지 어린 나이에 두 아이를 키우는 일은 절대 쉽지 않았다. 회사에서도 많은 것을 증명해야 했던 때였다. 하루가 멀다고 밤늦게까지 야근을 했다. 그 힘들었던 시간에 보상이라도 하듯 암은 우리 가족에게 충분히 긴 시간의 휴가를 주었다. 아직은 엄마를 마냥 좋아하는, 안아달라 뽀뽀해달라 달려드는 아이들의 유년기에 암에 걸리게 된 일이 그래서 참 아이러니하게도 너무 감사하다.     


자문해보게 된다. 암은 정말 내 인생에서 나쁜 경험인 걸까?

난 분명히 답할 수 있다. 아니, 그렇지 않다.


괜찮다.

괜찮다.

괜찮다.


날 위로하는 진심이 담겼던 그 말들을 이제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일찍 발견한 덕분에 수술할 수 있었고, 좋은 약과 주사 덕분에 항암을 피했다. 그 어느 때보다 내 삶에서 의미 있는 변화를 얻었다.     


괜찮다.

정말 그랬다.     

내 삶은 여전히, 암이어도 괜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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