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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지혜 Mar 01. 2019

바른생활 어른이


잘 먹고 잘 쉬고 잘 놀고 잘 잔다 


바른생활 어른이가 되어가고 있다. 오랜만에 만난 지인들은 얼굴이 좋아졌다고 말한다. (아이고 부처님~ 하더라.) 입원 전에 비해 몸무게도 많이 늘었다. 한때는 1kg만 늘어도 바로 다이어트 경고를 울렸었는데, 지금은 5kg 늘리는 게 목표가 되다 보니, 체중계 숫자 자체에는 좀 무덤덤해졌다. 다만 몸무게를 늘려야 한다고 해서 지방이 느는 건 위험하기 때문에 가정용 인바디로 근 골격량, 체지방, 내장지방, 수분 지수, 기초대사량을 매일 체크하고 있다. 유방암은 비만일수록 발병 확률이 기하급수적으로 높아진다고 한다. 병원 상담 때도 약을 먹으면 더 쉽게 살이 붙는 체질이 될 테니, 살이 찌지 않도록 특히 조심해야 한다는 경고를 몇 번이나 들었다. 즉 지방은 줄이면서도 근육은 크게 늘리는 것. 말하기는 쉬워도 막상 실천하기는 어려운 그것이 제일 큰 과제다.     


매일 아침 헬스장에 가서 스트레칭 근력운동 유산소 순으로 꾸준히 운동하고 있다. 근력운동은 특히 코치님 지도하에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 솔직히 체력은 여전히 예전만큼의 수준이 안 되는 것 같다. 심장이 조금 평소보다 열심히 뛸라치면 이명현상으로 물속에 빠진 것처럼 어지럽고 괴롭다. 전에는 하체 운동을 하다가 토할 것 같아 운동 중 처음으로 코치님에게 기브업을 외치기도 했다. 한동안 잠잠했던 두드러기마저 다시 올라와 날 뒤덮었다. 코치님은 자세가 바르고 정확하기 때문에 적게 해도 더 힘들 거라며 쉬는 나를 격려해주었다. 이 솔직한 기브업이 실망스러웠지만, 한편으로는 조금 뿌듯하기도 했다. 목표도 중요하지만 내 몸 상태에 내가 귀를 잘 기울이고 있다고, 내가 지켜보고 있으니 무리할까 봐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스스로를 안심시키는 기분이었다.     


하루 세끼는 대부분 집에서 만든 건강한 밥을 먹는다. 남편은 휴직 후 스타 셰프가 되었다. 장을 보는 눈빛도 주방을 대하는 자세도 남달라졌다. 매일 조금씩 홈 메이드 건강식의 지평을 넓혀가고 있다. 남편 안의 요리사 기질을 발견한 건지, 필요에 의해 그 능력을 선택 개발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나와 아이들을 돌보겠다는 일념 하나로 마흔 넘어 새로운 정체성을 만들어가는 그가 새삼 참 멋지다.


자유시간 대부분은 책을 읽는다. 내게 좋은 영향을 주었던 책들을 다시 읽기도 하고, 그저 마음 이끄는 대로 손이 가는 책들을 많이 사다 놓고 이 책 저 책 넘나들며 읽기도 한다. 넷플릭스도 자주 본다. 어마어마한 자본과 예술가의 자유로운 영혼이 만나 쏟아내는 수준 높은 콘텐츠들을 보다 보면 정신을 차리기가 힘들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빠져드는 내가 무서워 요즘은 하루에 에피소드 최대 두 편까지만 보는 거로 나름의 규칙을 세우기도 했다.


그 좋아하는 커피도 많이 줄였다. 카페인 때문이다. 그 어느 때보다 내겐 숙면이 중요하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악영향을 미치는 요소들은 과감하게 배제하기로 했다. 커피 대신 체온을 올려주고 마음을 진정시켜주는 다양한 잎 차에 관심을 가지고 레몬을 띄우거나 시나몬 스틱으로 저어보거나 꿀을 타는 등 내가 혹할 만한 취향을 발견하기 위해 많은 시도를 하고 있다. 그래도 여전히 커피가 그리워서 정 마시고 싶을 때는 가급적 디카페인을 마시려고 한다. 이탈리아의 커피 대체제로 유명한 디카페인 ‘오르조’도 사둔 지 오래다. 내가 습관적으로 그냥 쉽게 안 좋은 결정을 하지 않도록 최대한 많은 선택지를 갖추려 애쓰고 있다.     


타목시펜 약과 졸라덱스 주사의 대표적인 부작용이 불면증이라고 하던데, 한동안 정말 불면증으로 고생을 좀 했다. 밤새워 뒤척이다 결국 뜬눈으로 새벽을 맞이하면 지친 몸도 몸이지만 건강에 대한 자신감이 다시 한번 땅에 곤두박질치게 된다. ‘전쟁터에서도 잠든다는 특수부대 수면 방법’을 유튜브 동영상으로 공부하며 근육 이완과 호흡법을 익혔다. 상추와 체리를 먹고, 카밀러 차를 마시고, 라벤더 오일을 베갯잇에 적시고, 꿀잠 마약 베개를 베고, 수면양말을 신고 잠을 유도하는 경혈 지압을 하며 일찍 잠자리에 들고, 핸드폰을 침실에서 치우는 등 온갖 노력을 동원해보았지만, 한동안은 허사였다.


충분한 휴식과 수면은 건강한 삶의 기본이다. 수술 후 체력을 회복하고 있는 이 중요한 시점에서 컨디션이 또 무너지면 안 되겠다 싶어 결국 병원에 가서 상담을 받았다. 졸피뎀이라는 수면제를 2주 치 처방받았다. 그래도 잠을 못 자면 다시 찾아오라고 한다. 지금까지 두 번 정도 약의 도움을 받았다. 큰 노력과 시도 덕분에 나름의 요령이 생긴 건지, 수면제라는 확실한 지원군이 내 손에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편해진 덕분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약 없이도 어느 정도는 수월하게 잠이 드는 것 같다.     


2018년 11월, 새로운 광고대행사로의 이직을 앞두고 암 진단을 받았다. 내가 가고자 했던 회사는 치열한 고민, 날 선 기획과 남다른 크리에이티브로 업계의 많은 주목을 받는 곳이었다. 기존 회사도 친정처럼 사랑했기 때문에 이직까지 정말 힘든 고민을 했고 어렵게 결정한 이상 후회 없도록 가서 더 열심히 해보자고 각오를 다졌다. 아마도 그 때문에 병으로 인한 휴직의 상실감이 더 컸던 것 같다. 감사하게도 그곳 대표님께서는 갑자기 펑크를 낸 나를 오히려 배려해주며 건강을 충분히 회복하고 오라고, 기다려주겠다 말해주었다. 진심으로 위로가 되었다. 암으로 인한 커리어 강제 종료가 아니었다면, 난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직진했을 것이다.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라는 책이 있다. 혜민 스님의 담백한 인생 조언이 담긴 에세이다. 나도 암이라는 인생의 간이역에서 여유를 가지고 내 삶을 둘러보니 기존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차츰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멈추지 않았다면 어쩌면 하지 않았을, 조금은 낯설지만 그래도 내게 꼭 필요한 질문들을 스스로에게 던져보게 된다.     


암이라는 병이 내 삶에 주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내가 원하는 것이 진짜 나를 위한 일인가.

진짜로 원하는 것인가, 그저 원한다고 믿는 것인가.

내가 진심으로 가치 있다고 여기는 건 무엇일까.

내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흔들리지 않는 내 삶의 신념은 무엇인가.

아이처럼 순수하게 재미를 느끼는 건 무엇일까.

과거도 미래도 없다면, 지금 어떤 삶을 살고 싶은가.

책임감 때문이 아닌 순도 100% 나를 위한 길은 무엇인가.     


매일 마주하는 내 얼굴처럼 익숙하게 써 내려간 답도, 불편하지만 더 깊은 곳에서 억지로 끄집어낸 답도 있었다. 나답지 않아 보이는, 의외의 답에 새삼 놀랍기도 했다. 나도 의식하지 못했던 프레임 안에 갇혀 전에는 보지 못했던, 당연하게 생각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던 면들도 있었다. 그런 시간을 보내다 보니 내가 가려 했던, 내가 원했던 그 길도 정말 내 길이 맞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멈춰서지 않았다면 결코 몰랐을 내 안의 다른 생각들과 더 많은 가능성이 있었다. 긴 고민 끝에 앞으로는 조금은 다른 길을 선택하는 것이 좋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꾸준히 응원을 보내며 기다려주는 그곳에도 전하는 것이 좋겠다 생각했다. 용기를 냈다. 당장은 아니겠지만 복귀 시점에서는 다른 선택을 하려 한다고 솔직하게 의사를 전했다. 기분이 묘했다. 이루지 못한 사랑처럼 마음 한편이 허하기도, 뭔가 의미 있는 첫걸음을 내디딘 것처럼 뿌듯하기도 했다.  

   

나는 오늘도 삶이 던지는 수많은 질문에 나만의 답을 써 내려가고 있다. 거창한 철학도 울림 있는 메시지도 아닌, 그저 내 노트와 일기장의 빼곡한 끄적거림일 뿐이다. 하지만 그 고민들은 최소한 앞으로 걸어갈 내 삶의 갈림길과 굴곡에서 의지할 그 어떤 기준이 되어 줄 거라 믿는다. 그런 나만의 인생 매뉴얼을 만들어가는 일이, 간이역에 잠시 머물고 있는 바른생활 어른이인 나에게는 가장 중요하고 또 의미 있는 일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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