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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지혜 Feb 19. 2019

PT의 신세계

광고인에게 PT란 숙명과도 같다. PT하는 모습에 끌려 광고를 시작하게 된 이들도, PT가 좋아 이 일에 목숨을 거는 이들도, PT에 질려 업을 아예 떠나는 이들도 많다. 보통 광고계에서 쓰는 PT라는 단어는 ‘프레젠테이션’을 뜻하는데, 그것은 고심하여 준비한 캠페인 전략과 크리에이티브 등을 광고주 앞에서 발표하는 자리의 성격을 가지기 때문이다. PT 준비는 짧게는 2주, 길게는 한 달 넘게 밀도 있게 진행된다.


캠페인 예산 규모가 큰 사이즈의 PT들은 대부분 광고대행사 간 입찰 비딩, 즉 경쟁 형태로 진행된다. 15년 차 광고대행사 AE로서 지금까지 수많은 경쟁 PT에 참여했다. 경쟁 PT는 때론 업체 간 지나친 유혈 소모전을 유발함에도 불구하고 광고주 대부분은 제안을 위한 모든 수고와 비용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고질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경쟁 PT의 본질 하나만 놓고 보자면 꽤나 매력적인, 마치 어떤 흥미진진한 ‘어른용 빅 게임’ 같은 면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열정 많고 똑똑한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여 광고주의 미션을 받는다. 똑같이 주어진 기간 동안 그 미션을 해결하기 위한 답을 찾아내야 한다. 드림팀이 구성된다. 광고대행사의 AP(Account planner), AE(Account executive) , CD(Creative director), 카피, 아트, 미디어플래너뿐만 아니라 외주 프로덕션, 후반 포스트(편집실, 녹음실 등) 감독, PD, 비주얼 아티스트, 음악감독, 엔지니어, 모델 에이전시까지… 수많은 사람이 각자의 전문성을 발휘하며 유기적으로 한 몸처럼 움직인다. 새로운 연인을 만나 사랑에 빠진 것처럼 온 세상이 그를 중심으로 움직인다. 그렇게 사랑하는 마음으로 고민하고 싸우고 환호하고 좌절하고 다시 손뼉 치면서 치열하게 질주해 최종 제안서라는 하나의 작품을 탄생시킨다. 그 모든 과정과 아웃풋을 보면 진심으로 이건 하나의 ‘종합예술’에 가깝다는 경외감마저 든다.     


PT 당일은 흡사 007 작전이라도 펼치는 듯하다. 멤버 모두가 겉보기엔(?) 멀쩡하게 잘 차려입고 그날을 맞이한다. 발표자(프레젠터)는 정신의 날을 벼르고 끝까지 제안서를 집어삼킬 듯이 훑어본다. 팀원들은 비밀유지 각서와 노트북, 포인터, HDMI, RGB 어댑터, 스피커, 제출용 USB, 제본을 꼼꼼히 챙기며 끝까지 예상 Q&A 리스트를 만든다. 최종 리허설에서 현장 사운드 테스트까지… 단 하나의 실수도 용납할 수 없다는 마음으로 일사불란하게 모든 준비를 마친다.

PT 자리에 서기 직전까지는 최선을 다하지만, 광고주 앞에 선 직후부터는 최대한 힘을 빼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프레젠터의 솟구치는 아드레날린이 자칫 모든 것을 불태워버릴 수도 있다. 짧고 깊은 호흡과 함께 한마음으로 고생한 멤버들의 눈을 하나하나 바라본다. 모든 것을 담되 욕심은 버리자는 마음으로 열정의 화력에 초연함을 블렌딩해가며 준비한 내용을 진심을 담아 전한다.


모든 광고대행사가 그렇게 노력하겠지만 승자는 오직 한 곳뿐이다. 2등은 정말 아/무/의/미/가/없/다. 그래서 이 경쟁 PT라는 게 아~주 죽을 맛, 혹은 살맛 나는 일이다. 치열하게 고민하고 미친 듯이 사랑했던 브랜드일수록 수주에 실패했을 땐 상처가 크다. 반나절 정도는 진짜로 세상이 무너진다. 한때 너무도 사랑했던 연인에게 하루아침에 배신이라도 당한 것처럼 그렇게 마음이 아프다. 한참 잊고 지내다가도 수주한 경쟁사가 송출(온에어)한 TVC를 어쩌다 마주치기라도 할 때면 ‘겨우 저거 하려고, 내 제안을 깐 거니…’라고 찾아가 질척거리고 싶어진다. (광고쟁이들은 찌질한 면이 있다.) 반대로 PT를 수주했을 땐 그 희열이 정말 엄청나다. 온갖 축하와 성취감, 급등하는 예상 매출 달성률을 보며 펑펑 쏟아지는 도파민에 중독되는 기분이 든다. 그래서 “이 맛에 광고한다.” 혹은 “뽕 맞았다.”라는 표현이 업계에 통용되는구나 싶다.     




요즘 나는 새로운 PT와 사랑에 빠졌다. 광고대행사의 PT가 아닌 헬스장 PT, 퍼스널 트레이닝 말이다. 암 수술 후 체력을 어느 정도 회복하고 나서는 매일 아침 헬스장에서 운동하고 있다. 광고대행사의 PT 못지않게 이 헬스장 PT 또한 아~주 죽을 맛, 아니 살맛이다. 시작할 땐 의욕적으로 덤비지만 이내 땀이 나고 몸이 후들거리기 시작한다. 힘들어야 근육이 생긴다는 채찍질에 이를 악물고 한 개만, 딱 한 개만 더… 힘을 내본다.


나는 늘 내가 체력이 좋다고 생각했다. 몇 날 며칠 야근을 해도, 아이들을 돌보느라 잠을 설쳐도, 밤샘 촬영을 하고 다음 날 PT를 해도 크게 지치거나 무너지지 않았다. 다들 내가 대단하다 하니까 나도 그냥 그런가보다 싶었다. 하지만 내 완전한 착각이었다. 그건 내 체력이 아니라 오기였던 것 같다. 그 오기가 힘들어하는 내 몸을 억지로 끌고 다녔나 보다.     


헬스장에서 처음 코치님을 만난 날, 인바디 측정과 체력테스트를 받았다. 사실 체력이라 말하기에 초라한 수준의 결과였다. 물론 수술 후라서 더 그런 거겠지만 기본적으로 몸에 근육이 너무 없었다. 몸에 근육이 있어야 신진대사가 활발해지고 기초대사량이 늘고 체력이 좋아지는 건데 나는 평균값에서도 한참이 부족했다. 코치님은 직장인 대부분이 그렇다며 현실적으로 우선 근육을 5kg 늘리는 것을 목표로 잡자고 했다. 오, 새로운 목표다! 배고픈 짐승이 먹이를 덥석 물듯 그 새 목표를 내 뇌리에 반짝 새겼다.


상담을 받으며 얼마 전에 유방암 수술을 받았다고 말했다. 당황할 줄 알았는데 이게 웬걸, 코치님은 그럼 이제 관리 단계냐면서 복용 중인 타목시펜의 이름과 기능까지도(앤젤리나 졸리도!) 이미 알고 있었다. 사실 호르몬 치료 때문에 가끔은 우울한 기분이 들기도 했는데, 코치님은 오히려 여성호르몬이 줄면 근육을 늘리는 데는 더 도움이 될 거라며 좋은 거라고 힘 내보자고 했다. 오호! 새로운 긍정적인 관점이다. 이분이라면 내 컨디션을 충분히 고려해서 무리하지 않으면서도 체력을 기를 수 있도록 날 잘 이끌어줄 것 같다는 믿음이 생겼다.     

한근태 교수의 《몸이 먼저다》라는 책을 요즘 바이블처럼 읽고 또 읽고 있다. 책에서는 지식 노동자일수록, 바쁠수록 운동에 목숨을 걸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야 버틸 수 있다고, 운동은 구원이고 최고의 보약이자 힘든 영혼을 위한 비타민이라고.


바빠서 운동할 시간이 없다는 사람은 나중에 병원에 입원할 시간은 있다는 걸 알게 된다.


그동안 운동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안 했던 건 아니다. 하지만 정말 진지하게 내 삶에 받아들여 본 적은 없는 것 같다. 항상 의무감으로 마지못해 하거나 가볍게 요가하고 깨작깨작 자전거만 탔다. 확실히 내 건강과 체력을 향상하기에는 부족한 수준이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난 ‘나는 꾸준히 운동하는 사람’이라며 자기만족을 했다.     


평소에 많이 움직이면 굳이 따로 운동 안 해도 괜찮아.

잘 시간도 없는데 운동은 언제 해. 휴식이 먼저지.

난 무릎이 안 좋으니까 힘든 운동 하면 큰일 나.


딱히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내게 도움이 되지도 않는 온갖 창의적인 자기 합리화로 운동 안 할 구실을 만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예전엔 헬스장도 싫었다. 두드러기 때문이기도 했고, 우선 내 돈 내고 노동하는 기분이 들어 내키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암 치료와 건강 관련한 많은 책을 읽으며 공부했다. 크게 몰랐던 내용은 아니지만 한번 건강을 잃어보고 나니 운동의 중요성이 정말 한 줄 한 줄 뼛속까지 와 닿는다. 진짜 나다운 삶을 위해 제일 먼저 시간을 내야 하는 게 운동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머리로 이해하고 마음으로 받아들인 후에 시작한 운동은 벌써 내 인생의 든든한 기반이 되었다는 기분이 든다. 악을 쓰고 땀 흘리는 그 순간은 힘들지만, 내 자발적인 의지와 선택에 의한 노력이기에 즐겁다. 온 세상이 나에게 운동하는 습관 만들어주려고 암이라는 이벤트를 벌인 건가 싶은 생각마저 든다. 물론 아직은 수술 전 체력에 비할 바 못 되지만 그래도 아침 일찍 운동을 마치고 나면 성취감이 느껴지고 하루 종일 활력도 자신감도 배가된다. 환자라서 기운 없고 아픈 내가 아닌, 운동하며 땀 흘리는 내가 좋다. 운동복을 입은 내가 좋고, 근육통으로 끙끙대는 내가 좋다. 온전하게 건강한 내가 될 때까지, 그리고 그 이후로도 평생 꾸준히 운동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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