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원경제지의 본리지에 따르면 경칩에는 논을 갈고 춘분에는 밭을 갈아야 한다. 경칩과 춘분 사이의 지금은 본격적인 파종을 하기 전 준비 작업을 하는 시기다. 이제 슬슬 봄이 오려나 하며 생각하지만, 아직 봄이라기엔 춥고 씨를 뿌릴 시기는 아니다. 지금은 밭을 갈면서 파종을 기다리는 때.
인생에도 그런 시기가 있다. 씨를 뿌려놔야 나중에 수확이라도 할 텐데, 밭두렁에 앉아 텅 빈 들판을 그저 바라보는 시기.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면서도 때가 되면 배가 고프다는 사실에 괴로운 시기. 이상의 <권태>라는 수필이 마치 나의 이야기인 것 같은 실로 권태로운 시기. 미래를 잠깐 외면하며 그냥 굴러가고 있지만 마음 한편에 죄책감을 치워버릴 수는 없어서, 하나둘 잠 못 드는 밤을 보내며 스스로를 갉아 먹는 그런 시기.
하지만 헤르만 헤세가 밤의 사색에서 읊조리듯, 나는 '잠 못 이루는 밤을 평생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은 절대 사랑할 수 없을 것 같다.' 불면의 밤은 우리를 생각하게 만들고, 그런 생각들이 모여 우리는 어른이 되어간다. 잡초 위에 작물의 씨를 뿌릴 수 없고, 씨를 뿌리지 않고 수확을 기대할 수 없듯이, 상념을 걷어내고 의지를 가다듬는 시간을 가질 필요가 있다.
그러니 땅을 놀린다고 안타까워하지 말고, 젊음을 낭비한다고 괴로워할 필요도 없다. 농사에도 다 때가 있고 순서가 있듯이 인생에도 그런 시기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