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승연 Mar 26. 2019

버려지는 것들에 대하여

1. 영수증

6개월간 타국에서 혼자 살아남기 위해, 나는 악착같이 돈을 모아야했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포기했던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외출이었다. 외출은 곧 돈이다. 집밖으로 나가는 순간, 포장마차에서 풍겨오는 맛있는 붕어빵 냄새를 맡게 되고, 딱 예상가능한 커피맛을 즐길 수 있는 스타벅스가 눈에 띄고, 올리브영에 들어가서 거의 다 써가는 스팟패치를 사고 싶어지기 때문이다. 종강한 뒤 출국까지 남은 약 두 달가량의 시간동안, 새로운 알바를 구하기도 애매해진 나는 지독한 칩거생활을 택할 수 밖에 없었다.


외출을 하지 않자, 내 삶은 급격히 건조해졌다. 이미 봤던 영화를 또 보는 것, 봄이를 데리고 산책하는 것, 책을 읽는 것처럼 집안에서 느낄 수 있는 자극들은 시간이 갈수록 그 강도가 무뎌졌다. 읽지 않은 책이 널렸는데도 전혀 읽고 싶은 욕구가 생기지 않았다. 나는 하루하루 시간을 죽이며 출국만을 기다렸다. 


독일에서 한달 째 살고 있는 지금, 돈 쓸 일이라는 것은 박테리아처럼 자가증식하며, 아이들의 상상력처럼 무궁무진함을 느낀다. 고작 반년 살거면서 책장 한 켠에 캡슐머신기를 장만한 것만 보더라도 알 수 있다. 간식을 눈앞에 둔 봄이가 '먹어'라는 말을 듣고 달려드는 것처럼 지금의 내 소비행위는 격정적이고 흥분에 차있다. 나는 혼자 살아가며 내 주변을 소비로 채워가는 일상에 행복을 느끼는 중이다. (소비행위라고 해서 꼭 사치를 일컫는 게 아님을 일러두고 싶다. 요즘 내 일상 최고의 행복은 '마트에서 시리얼 사기'이다. 지난 주에는 '마트에서 요거트 사기'였다.) 


소비가 나쁜 것은 아니니, 일상을 기억하기 위해 버려지는 영수증을 모으기 시작했다. 가계부를 쓰고 하나둘 수집하기 시작한 것이 지금은 벌써 전공책 한 권의 두께가 되어있다. 그날 하루동안 주머니에 꼬깃꼬깃 쑤셔넣은 영수증을 펼쳐보며 그날의 일을 되돌아볼 수 있으니, 나의 영수증들은 그 고유의 기능을 넘어섰다고 볼 수 있다. 

오늘의 버려질 뻔한 영수증

오늘의 영수증에는 토마토와 토르텔리니, 다먹은 뮤즐리 등이 기록되어 있다. 그동안 먹던 토마토 말고 다른 품종의 것을 샀는데 훨씬 알이 크고 맛있었다. 지금보니 가격도 더 싸다. 독일어로 토마토는 tomaten이구나. 그저께 산 토르텔리니가 맛있어서 볼로녜제 맛도 사봤다. rewe에서 파는 시금치&모짜렐라맛이 더 맛있다.

그저 버려졌을 영수증에게 '기록물'이라는 의무를 주고 '기념품'이라는 가치를 부여하니, 이토록 쓸모 있을 수 없다. 한달동안 모은 영수증이 전공책 한권만하니, 5개월 뒤에 나는 아마 전공책 6권만큼의 영수증을 들고 귀국하겠지. 영수증의 종이가 가벼운 재질이라서 다행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학센과 루드비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