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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나 Jun 10. 2019

미도리 사워를 마셨던 날.

우주최고 위로쟁이


"결혼하고, 자기가 돈을 버니까 내가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는 거 아니야?"


나는 우울하고, 지금 이렇게 우울해서 힘들고, 그래서 회사를 그만두고 쉬고 싶다는 생각을 몇 주 동안 혼자 끙끙 앓다가 결국 버티지 못하고 말해버렸던 날. 쉬고 싶다는 생각 뒤에 나를 따라오는, 나를 정말 고통스럽고 수치스럽게 만들었던 그 말을 결국 남편 앞에 뱉어냈다.

쉬고 싶다는 이 생각은 너와 결혼했기 때문에, 너의 경제력에 기댈 때만 할 수 있다는 생각. 지금의 남편에게 빚지지 않고서는 이 상황을 해결하기 위한 고민을 할 수 없는 나에 대한 수치심.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편에게 기대려고 하는 나의 염치없음과 무기력함에 대한 짜증과 자존심 상함이 전부 뒤죽박죽 얽힌 말을 남편에게 했다. 정말 저 말을 뱉을 때는 무언가를 쥐어짜듯 끙끙대며 애를 써서 겨우겨우 뱉어냈는데, 남편의 대답은 어이없을 정도로 간단했다.

"아니?"


 저 자신감은 어디서 나오는지 모르겠어서 약간 어이가 없었다.


"뭐가 아니야? 맞잖아. 지금 내가 회사를 그만두면 나는 경제력이 없어지는데 경제력이 없이 어떻게 내가 나 한 사람을 책임져?"


나는 좀 짜증이 나서 쏘아댔다.


"자기가 나랑 결혼을 안 했더라도 자기는 자기의 경제력을 만들기 위해서 회사를 다니는 게 아닌 어떤 일이든 했을 거야. 난 그렇게 생각해. "


그러니까 내 남편은, 나를 스스로가 가진 문제를 어떻게든 해결해 낼 수 있는 사람이라고 당연하고 확실하게 믿는거 였다.


너무 당연한 건데 왜 나는 저렇게 생각을 못했을까. 저렇게나 확실한 믿음이 저 사람에게는 있지만 나에게는 없는 이 상황이, 내 마음의 초라함이 그 때  보였다. 나를 전혀 긍정하지 못하는 내 모습이 적나라하게 보였고 그래서 슬펐다.


"나는 왜, 자기보다도 나를 못 믿어 주는 걸까? 나 왜 이렇게 됐을까? "


남편의 대답을 듣기전까지 이러쿵 저러쿵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나는 여러모로 고통스러워하긴 했지만 울지는 않았다. 그런데 저 간단하고 단단한 대답을 듣자마자 눈물이 났다. 남편에 대한 고마움도 있었지만 타인보다도 나를 못 믿어주는, 도저히 나를 아껴주지 못하는 나에 대한 절망에 눈물이 났다. 우는 나를 보면서 남편은 담담히 말했다.


"내가 자기를 믿잖아. 자기를 믿는 나를 믿어봐"


이거 어디서 들은 말인데. 말을 볼 수는 없지만 어쩐지 기시감 같은 게 들었다. 이 말은 우리가 연애를 시작하던 날에 구 남자 친구 현 남편이 내게 했던 말이다. 연애하자믄 고백을 듣고 나서 나는 내 감정에 확신이 없다고, 이 관계에 대해서 잘 모르겠다며 머뭇거렸다.


그때 남편이 저 말을 했었다. '당신을 좋아하는 나를 믿어봐요'라고. 저 말을 했던 남편의 태도가 정말 담백해서 믿음이 갔다. 맞다. 나는 이런 담백함이 전혀 부담스럽지 않았고, 그래서 우리 남편이 좋았다.


남편과 연애하던 시기는 내 인생에서 정말 힘든 시기를 지나오던 시간이었는데, 그 시간 동안 남편은 묵묵히 나를 일으켜 세워줬었다. 나는 살면서 이렇게 부담 없이 누군가에게 기대고 위로받은 적이 없었다. 이 부담 없지만 든든하고 따뜻한 다정함 덕분에 내가 다시 일어나고 힘을 냈었다.


꼭 3년 전으로 돌아간 것처럼  이 날도 나는 온갖 걱정과 우울과 힘듦과 억울함, 스스로에 대한 원망, 화 같은 온갖 감정이 섞여있는 뒤죽박죽의 이야기들을 쏟아냈다. 뭔지 모를 감정이랑 한참을 씨름하다가, 결국은 온통 부적적인 것들만 가득 섞인 채로 횡설수설하는 나를, 남편은 놀라거나 당황해하거나 힘들어하는 기색이 전혀 없이, 원래 항상 그랬듯 그냥 들어줬다. (지금 생각해 보면 거의 아무 반응이 없는 상태에 가까웠던 것 같다.)


거실 테이블과 소파 사이에 몸을 구기고 앉아있던 나를 위로하러 꿈지럭꿈지럭 옆으로 다가온 남편에게 안기듯 기대서 울었다. 남편은 나를 와락 안는 대신에, 내 머리를 쓰담 쓰담해줬다. 내가 스스로의 감정에 못 이기고 혼자 한참을 훌찌럭 거려도 남편은 아무 말 없이 그냥 가만히 내 머리를 쓰다듬기만 했다.


"이걸 마시면 기분이 좋아질 거야."


내가 좀 진정되는 듯 하자 남편은 뜬금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거실 선반에 있던 미니어처 술을 들고 부엌으로 갔다. 남편은 형광 녹색 술을 컵에 붓고 탄산수와 레몬즙을 섞어서 나에게 줬다.  찾아보니 이걸 미도리 사워라고 한단다. 뭔가 게임에서 나올 것 같은 음료수 같았다.  남편이 건네준 술은 달달하고 시원하고 탁 쏘는 맛이었다. 거짓말처럼 기분이 좋아졌다.


‘와, 진짜 기분 좋아졌어.’


미도리 사워를 마시면서 그날의 나는 아주 완벽하게 위로받았다. 내 마음에 어떤 부담도 주지 않지만 충분히 따뜻하고, 심지어 달달하고 상쾌하게.  


이 날 남편이 해준 미도리 사워 맛 위로는 며칠이 지나도 내 마음에 계속 남아서, 그 위로를 곱씹을 때마다 내가 나를 응원할 수 있는 용기를 줬다. 그래서 수시로 나에 대한 힘든 감정들이 올라올 때마다 미도리 사워 맛을 떠올리며 힘을 냈다. 그렇게 스스로를 조금씩 응원하면서 힘을 내다보니 내 삶의 다음 목표를 더 맑게 생각하고 고민할 수 있게 되더라.  


이쯤 되면, 우리 남편은 우주 최고 위로 쟁이다.


대단하고 휘황찬란한 무언가가 없어도 한 사람의 깊이 다친 마음을 이렇게나 충분히 위로하고 일으켜 세워주는 재능이 있는 사람을 남편으로 두어서 정말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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