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레비전 좀 그만 보여주라고!!!"
막 20개월이 된 첫째 아이와 함께 소파에 앉아 뽀로로를 보고 있는 아빠에게 난 결국 소리 지르고 말았다.
애기랑 잠깐만 놀아달라고 부탁하고 자리를 비운 지 10분도 채 지나지 않았다. 텔레비전이 아이에게 얼마나 안 좋은지 WHO의 연구결과를 예로 들어가며 설명을 해도, 이제 아이랑 못 놀게 한다고 협박을 해도 소용이 없다. 이게 도대체 몇 번째인지. 난 그날 아빠에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그동안 쌓인 화를 죄다 풀었다. 아이 앞에서 말이다.
텔레비전은 아이에게 안 좋다. 육아서적이며 육아 전문가, 무슨 대학의 연구결과 따질 것 없이 하나같이 그렇다고 말한다. 난 아이에게 하루 30분 이상은 텔레비전을 보여주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던 참이었다. 그런데 도통 아빠랑만 있으면 하루 30분의 룰이 지켜지지가 않는다. 아빠가 아이에게 나쁜 영향을 끼치는 것만 같아서 자꾸만 화가 치밀어 올랐다. 나의 노력이 물거품이 되는 것 같아서 분했다.
그렇게 아이 앞에서 아빠와 대판 싸운 후 몇 시간 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이에게 텔레비전을 보여주는 게 더 나쁠까, 아이 앞에서 소리 지르며 싸우는 게 더 나쁠까?"
영유아기의 경험, 환경이 중요하다는 건 누구나 다 안다. 이 이야기는 책에서, 전문가의 입에서, 육아를 하는 주변 엄마들의 입에서 끊임없이 반복된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나는 어깨가 무겁다.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이 아이의 미래가 바뀐다고 생각하면,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힘을 다해서 아이에게 좋은 환경을 만들어줘야지 하는 의지와 의욕이 한층 더 커진다.
그런데 말이다. 아이가 조금씩 커가면서 깨달은 게 있다면, 내가 이 아이의 성장 환경 그 모든 걸 통제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누구를 만나고, 무엇을 보고, 어떤 경험을 하고, 이 아이가 커가면서 겪게 될 그 모든 걸 내가 정할 수도 없고, 그리해서 좋을 것도 없다는 것이다. 이 아이는 나의 좁은 경험과 한정된 시야로 만든 세상에서 살아가는 게 아니라, 자신이 만든 세상에서 살아갈 것이다. 나와는 다른 시대적, 공간적 배경에서, 나와는 다른 경험을 하고, 다른 인간관계를 맺고, 다른 가치관들과 마주치면서 그렇게 자신만의 세상을 만들어 갈 것이다.
게다가, 내가 설사 모든 걸 통제할 수 있다고 해도, 아이가 나의 희망대로 크리라는 보장도 없다.
나에게는 텔레비전 보는 걸 좋아하는 친구 2명이 있다. 이 친구 두 명의 텔레비전에 얽힌 스토리가 꽤나 재밌는데, 텔레비전을 좋아하게 된 이유는 둘 다 동일하다. 어렸을 때부터 엄마가 텔레비전을 못 보게 했다는 거다. 못 보게 하면 더 보고 싶은 게 인지상정. 한 명은 학창 시절, 엄마가 집을 비울 때면, '지금밖에 없다!'라는 심정으로 졸음을 참으면서 보고 싶지도 않은 방송을 보았고, 한 명은 대학만 들어가면 내가 진짜 텔레비전이랑 살리라 다짐하며 고등학교 시절을 보내다가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방송 삼사의 모든 드라마를 꿰기 시작했다.
오해하지 말라. 그렇다고 어렸을 때부터 텔레비전 보여주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영유아기 때는 어떠한 환경에 놓일 것인지 아이가 선택할 수 있는 부분보다 부모가 결정할 수 있는 부분이 크다. 텔레비전이 아이에게 좋지 않다는 의견에도 동의한다.
내가 통제할 수 있는 부분에 대해서는 일관성을 가지고 행동하되, 내가 통제할 수 없는 부분에 대해서는 너무 집착하지 않는 게 어떨까 하는 거다.
텔레비전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아빠가 이미 아이에게 텔레비전을 보여줬다면, 앞으로도 보여줄 것 같다면, 아이 앞에서 또 싸우는 것보다는, 아이와 같이 텔레비전을 보는 건 어떨까. 텔레비전에서 본 내용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그 이야기로 나중에 그림도 같이 그려보고, 그다음 이야기를 상상도 해보면서 말이다.
실제로 요새 아이와 그렇게 놀고 있는데, 놀이의 레퍼토리도 넓어지고 꽤나 좋다.
함께 뽀로로를 보면, 아이는 지금 어떤 상황인지 나에게 끊임없이 설명을 해준다. 나는 어떻게 된 일인지, 왜 그런지 아이에게 질문을 한다. 다 보고 나면, 그 이야기를 인형으로 재현하며 논다. 이야기가 산으로 갈 때도 있지만 그건 그거대로 재밌다. 자기 전에 아이는 텔레비전에서 본 이야기를 해달라고 조른다. 나는 아이를 주인공으로 하거나, 조연의 시각에서 이야기를 재구성하여 아이에게 들려준다.
텔레비전 자체를 안 보는 게 낫지 않나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물론 그렇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 같다. 아니면 아이가 딱 30분만 보고 이제 그만 볼래 하고 일어나게끔 습관을 들인다든지. (이렇게 할 수 있는 육아 고수님이 계시다면 정말 진지하게 도움을 청하고 싶다...)
내가 하는 방법이 아이에게 좋은지,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런데 이건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텔레비전을 왜 보여줬냐고 아이 앞에서 싸우는 것보다, 화목하다. 무엇보다, 아이도 나도 즐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