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서에 배속받고 3일째 되던 날, 퇴근시간 10분 전에 나의 사수는 내게 그렇게 말했다.
"정시에 퇴근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 게 좋아."
나의 사수는 내가 쓴 회의 의사록을 빨간 펜으로 막 수정해준 참이었고, 시곗바늘은 5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내일 아침 수정해서 메일로 보내드리겠습니다."
나는 뭣도 모르는 신입사원이었고, 저 말은 배짱이 아니라 정말 아무것도 몰랐기 때문에 내뱉고만 천진무구함과 무식함의 표현이었다. 사수는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나는 이 부서에, 아니 이 사업부에 처음 온 외국인이었다. 내가 입사한 회사는 글로벌하게 다양한 사업을 하고 있는 일본의 대기업인데, 내가 배속받은 곳은 글로벌과는 거리가 먼 곳이었다. 한국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일본에 온 지 몇 달 안 된 나를 회사 사람들은 반쯤은 신기하게, 반쯤은 난감하게(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서) 보았던 것 같다. 일본어는 얼마나 할 줄 아는지, 다른 신입사원들과 똑같이 대해도 되는지, 문화 차이는 없는지 꽤나 궁금했으리라.
하지만 모두들 나를 열린 마음으로 대해주었다. 내가 무슨 언어로 메모를 하는지 지나가면서 호기심 어린 눈으로 보기도 했고, 내가 일본의 비즈니스 매너에 대해 물으면 그런 질문은 처음 받아봤지만 흥미롭다는 듯 성심성의껏 답해주었다. 나는 다른 신입사원들과 별다를 바 없는 대우를 받았고, 나도 내가 외국인 사원이라는 걸 종종 잊곤 했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우리 사수는 내가 자기 밑으로 들어온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꽤나 긴장했다고 한다. 한국에서 일을 하러 여기까지 온 아이이니, 내가 더 열심히 제대로 가르쳐줘야지 하고 비장하게 생각했단다. 실제로도 그랬다. 우리 사수는 우리 부서에서 일 잘하기로 소문난 직원이었고, 잘하는 만큼 열심히 일하기도 했다. 당시 만 2살쯤 된 딸이 있었는데, 평일에는 얼굴 보는 날이 없었다고 했다. '우리 딸이 다행히 아직 내 얼굴 안 잊어버렸지 뭐야, 하하하.' 하고 농담을 던질 정도였다.
게다가 내가 좀 더 일찍 눈치챘어야 했는데, 일본은, 아니 적어도 우리 회사는, "야근=일에 대한 의욕, 성실함"인 회사였다.
그런 분에게 '이제 정시니 가도 되죠?'하고 말한 꼴이니, 사수는 순간 귀를 의심했으리라. '얘가 진짜 몰라서 그러나? 이게 바로 컬처 쇼크인가?' 순간 고민했던 것 같다. 그리고 아마 나에게 일본은(적어도 우리 회사는) 이렇다고 이른 시기에 알려 주는 게 좋으리라는 판단하에 저렇게 말했을 것이다.
고마웠다. 아무 말도 안 하는 것보다는 백배 낫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건 나중에야 든 생각이고, 저 말을 얼굴 맞대고 처음 들었을 때는 나도 순간 당황해서 사수를 그저 빤히 바라보았다. 머릿속에서 적합한 일본어를 찾아내느라 바빴다. 결국 그냥 '아, 네...'하고 말았던 것 같다.
일본에서는 많은 회사들이 신입사원을 뽑을 때 가능성과 인성을 본다. 우리나라처럼 화려한 스펙이 필수가 아니다. 대신 회사에 들어오면 잘 교육시키고, 성실히 배울 것을 바란다. 그렇기 때문일까, 신입사원에게 바라는 건 특출 난 성적이 아니다. 성심성의껏 배우려는 자세, 사람들과 잘 어울리려는 노력을 보이는 사원에게 그들은 미소를 짓는다.
선배들이 매일같이 야근을 밥먹듯이 하는데, 아직 일도 제대로 못하면서 시간 되었다고 간다는 내가 괘씸했을지도 모르겠다. 배우려는 의지가 조금도 없어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당시 내가 했던 생각은 "내가 만약 미국인이었다면, 유럽인이었다면, '아 저 아이는 원래 정시에 퇴근하는 아이구나'하고 사람들이 그냥 받아들이지 않았을까?"였다.
그런데 지나고 나서 생각해보니, 일이 혼자 하는 게 아니라는 걸 잘 알게 되고 나니,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이는 게 같이 일하는 사람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야근에 대해서는 여전히 동의하지 않지만(모두들 다 같이 얼른얼른 집에 갔으면 좋겠지만), 적어도 진지하게 임하는 모습, 최선을 다해서 배우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그것을 표현하는 방식이 야근이라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들이 가족과의 시간을 포기하고 열과 성을 다하고 있는 일에 대한 최소한의 경의가 아니었나 하고 말이다. 그리고 그렇게 신뢰를 쌓아가는 것이 모든 일의 시작이 아닌가 하고 말이다.
※이 일은 근 10년 전의 일이다. 현재는 일본에서도 '働き方改革(일하는 방식 개혁)'이라 해서, 워크 라이프 밸런스를 실현 가능하도록 하는 다양한 제도적 환경이 정비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