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년생 아이를 낳은 덕에 3년 회사를 쉬었다.
예상보다 길어진 육아 휴직 기간, 뭐라도 해야 하는데라는 생각에 불안했다.
다들 앞으로 나아가는 데 나만 가만히 있는 것 같았다. 동기들의 승진 소식이나 친구들의 이직 소식이 들려오면 더욱더 그랬다.
물론 그동안 나에겐 가족이 두 명이나 늘었고, '아바바바'밖에 할 줄 못하던 아이가 내게 "엄마 방귀 냄새 너무 심해"하면, 아, 내가 그래도 인간 하나 키워냈구나 하는 맘에 기쁘기도 하다. 그런데 아이가 성장을 거듭할수록, 아이가 혼자서도 할 줄 아는 게 많아질수록, '나는 그대로인데...'라는 생각이 또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게다가 30대는 뭐 그리 할 게 많은지, 새롭게 시작된 육아도 공부, 아이도 생겼으니 자산 관리도 공부, 집 사는 것도 공부(이런 건 왜 학창 시절에 안 가르쳐주나 모르겠다), 커리어 유지를 위한 공부, 셀 수도 없다. 몸은 또 어떤지, 이제껏 운동을 안 한 대가를 톡톡히 보고 있자니 운동도 하고 싶어 진다. 또 30대가 넘어가니 하고 싶은 말도 많아진다(이거 혹시 꼰대인가?). 누가 읽어주지 않더라도 뭐라도 쓰고 싶다.
해야 할 것도, 하고 싶은 것도 너무 많았다.
그런데 뒤돌아 보니 해낸 게 무엇 하나 없었다.
육아는 체력 승부다. 게다가 정신력까지 시험당한다.
여러 가지 일을 동시에 해야 되는 데다 예상 밖의 일 투성이다. 냄비가 끓어 넘치려 하는데, 첫째 아이는 우유를 마시는 데 반은 티셔츠가 마시고 있고, 둘째 아이는 드러머라도 된 듯 갑 티슈를 한 장 한 장 리드미컬하게 뽑고 있다. 뇌는 워킹 메모리가 부족해지면 아드레날린이나 스트레스 호르몬을 분비해서 몸을 전투태세로 바꾼다. 짜증이 잘 나는 것도 민감해지는 것도 당연하다. 의지력이라는 게 남아있을 여력이 없다.
어찌 되었든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 나를 탓했다. 내 의지력을 탓했다.
그도 그럴 것이, 육아 휴직을 끝마치고 돌아온 직장 선배한테 육아 휴직 기간 동안 자격증을 땄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나, 즐겨보는 웹툰 '나는 엄마다'의 작가 순두부 님이 나처럼 연년생의 아이를 키우면서 맛깔난 웹툰을 그렸다는 이야기를 읽고 있자니, '아, 내가 못난 놈이구나.'하고 인정할 수밖에 없지 않나.
그런데 말이다. 회사에 복직하기 한 달가량 전부터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기 시작하면서, 내게 한 달의 자유시간이 주어졌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생겼다. 운동과 글쓰기, 갖가지 공부 등등 그동안 미뤄왔던 것들을 내가 하고 있는 게 아닌가. 딱히 나 자신과 싸우지 않고도 말이다. 내 몸이 자동적으로 움직이기라도 하듯이 말이다. 아이가 어린이집에서 보내고 오는 그 7,8시간이 아주 꽉꽉 채워졌다.
아, 혹시 내게 필요했던 건 의지가 아니라 시간 아니었을까.
제임스 클리어의 "아주 작은 습관의 힘"에서도, 사사키 후미오의 "나는 습관을 조금 바꾸기로 했다"에서도 말한다. 무언가를 습관으로 만들고 싶다면, 무언가를 하기 쉬운 환경을 만드는 게 중요하다고 말이다. 의지력에만 의존해서 자기 자신과 싸워 이겨내는 게 아니라, 저항 자체가 필요하지 않은 환경을 만들어서 매일같이 계속해내는 게 중요하다고 말이다.
만약 글을 쓰고 싶다면 막연하게 '글을 써야지' 생각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글을 쓰기 쉬운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글을 쓰기까지의 프로세스를 잘게 쪼개서 그 모든 과정을 쉽게 만들어야 한다. 책상에 앉기. 노트북을 열기. 워드 프로세서를 열고 첫 줄을 쓰기.
육아로 바쁘던 내게 제일 첫 단계는 그게 시간 내기였던 것이다. 하루에 10분이라도 아이나 가사에 쫓기지 않는 시간.
게다가 스트레스와 불안은 의지력의 적이다. 나는 왜 이런 것도 못할까 하고 자신을 자책해봤자 자기부정감만 커질 뿐이다. 그럴 때는 목표를 아주 작게 만들고 그 목표를 달성하는 데에 주목하라고 사사키 후미오는 말한다. 가령 운동하고 싶지 않을 때는 '오늘은 체육관에 가기만 하자. 운동화를 신었는데도 할 마음이 안 들면 돌아와도 괜찮다.'라고 생각하는 거다. 막상 체육관에 가면 운동할 마음이 생기기도 하고, 그렇지 않더라도 일단 체육관에 갔다 왔다는 목표 달성감을 얻을 수 있다.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거다.
육아에 쫓겨서 마음먹은 일을 못 해내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의지력 문제가 아니라 시간문제일 가능성도 있다고. 그러니 행여 자신을 탓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럴 필요가 없다고 말이다. 간혹 그런 걸 뛰어넘는 사람도 있지만, 그냥 아 저 사람은 대단하구나 하고 넘기자고.
하루에 10분이라도 자신만의 시간이 생기면, 하고 싶었던 것들을 해낼 수 있을 거다. 아이를 키우다 보면 늘 시간이 부족하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자신만을 위해서 쓸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가치 있는지, 얼마나 소중한지 뼈저리게 안다. 시간이 생기면 그게 운동이든, 공부든, 마음껏 놀기든, 빈둥거리기든 1분도 허투루 쓰지 않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