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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경호 Feb 06. 2024

몸으로 하는 포장

[마흔네살 일기장] 말과 글이 아닌 몸을 쓰는 포장


한창 회사를 다닐 때 마케팅, 홍보 파트에서 일하다 보니, 말과 글로 제품과 서비스, 사람을 포장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그래도 실체를 넘기지 않는 과하지 않은 포장, 가려진 매력을 드러내는 정도의 포장을 기준으로 업무를 보았는데 어느 순간 그 기준선이 사라지고 마치 내가 사기꾼이 된 것 같은 느낌에 매번 괴로웠던 기억이 납니다.


그 이후로 마케팅이니, 홍보니, 기획이니 이런 말은 쓰지 않고 살아가기로 마음먹고 더 이상 다른 사람을 현혹하는 글도 쓰지 말아야겠다 다짐했습니다. 비슷한 나이대에서 온갖 멋진 크리에이티브와 기획이 나오는 걸 쓰라린 마음으로 바라보면서 서본 적도 없는 무대에서 아무도 몰래 내려와야 했습니다. 


그래. 나는 생각보다 대단한 사람이 아니구나. 기획으로 세상을, 그리고 무언가를 바꿔보겠다는 생각은 나에게 가당치 않구나 라며 도망치듯 마을로 돌아왔고 그때부터 동네친구들과 처음부터 많은 것을 새로 배워야 했습니다.


운이 좋았습니다. 책에서, 회사에서는 배울 수 없는 온갖 가치와 의미, 지식을 동네의 선생님들과 이웃들을 통해 새롭게 배웠습니다. 매번 바보가 된 것 같고 머리에 불이 난 것 같은 느낌에 당혹스러웠지만 그렇게 불편하고 때로는 불쾌한 느낌 마저 주는 공부와 배움이 10년째 이어오니 어느덧 이 모든 것들이 하나로 연결되며 나의 정체성과 자존감을 새롭게 형성하기 시작했습니다.




얼마 전 생계를 위해 1년간 가파도로 내려가버린 제 글선생님이 본인 서재에 있는 컴퓨터를 소포로 보내달라 부탁하는데, 별 것 아닌 이 간단한 부탁 때문에 나름 머리를 쓰고 있었습니다. (요즘 제가 할 일이 없다 보니 이상한 데서 과부하가 종종 걸립니다.)


우체국에 방문하여 맞춤포장을 해줄 수 있는지, 가격은 얼만지 여쭤보고, 날씨가 풀리고 나서 서재 인근에 사는 친구한테 부탁해 차로 날라 줄 수 있는지 등을 물어보고 차근차근 준비를 하였습니다.


컴퓨터를 들고 우체국에 도착한 당일, 별생각 없이 20년 넘게 소포를 전문적으로 포장하는 분의 작업을 무심하게 바라보았는데 이게 참 신기한 경험이었습니다. 불멍 물멍은 익히 알고 있었는데 포장멍이 있는 건 처음 알았습니다.


커다란 박스종이와 스티로폼을 거침없이 재단하고 잘라서, 전에 없던 박스를 새로 만들고, 소포재로 감싸고 그 안에 새로운 박스를 안전하게 덧대는 등등 포장하는 작업 하나하나가 마치 하나의 예술 공연처럼 느껴졌습니다.



참 나. 이게 이렇게나 멋진 일인가? 포장값이 4만 원이라 다소 비싸다고 생각하던 처음 마음과는 달리, 포장이 끝날 때 즈음에는 마치 4만 원짜리 입석 공연을 보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오랜 시간 말과 글로 무언가를 포장하는 일을 해오다 그 '습'을 몽땅 버리고(실은 다 버리지 못했습니다. 저는 그렇게 여전히 못났습니다.) 살아왔는데, 오랜만에 몸으로 하는 포장, 실체가 있는 포장을 보니 무척이나 고무되었습니다. 평소 멋진 책과 아름다운 그림을 눈에 많이 담고 다녔는데 이처럼 내 눈을 완전히 빼앗긴 경험은 오랜만이었습니다.


화려하고 멋진 포장은 아니었지만, 단단하고 흔들리지 않는, 안전하고 마음이 놓이는 포장이라니. 바다를 두 번 거너야 하는 소포가 마치 세계일주를 해도 괜찮을 것처럼 보였습니다.


가벼운 마음으로 우체국을 나옵니다. 하지만 문을 열고 나오면서도 한쪽에 쌓인 완벽하게 포장된 박스에 눈을 떼지 못합니다. 안전하고 완전합니다. 칙칙한 포장박스 색깔과 칭칭 동여맨 테이프가 아름답게까지 느껴집니다.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이런 생각이 듭니다.


참나. 내가 무얼 본거지? 이게 이렇게나 대단할 일인가? 나도 나를 잘 모르겠네.




'며칠 후 글선생님께서 소포를 잘 받았다는 톡이 왔습니다. 다행입니다. 마음이 푸근해집니다. 이제 가파도 매표소에서도 시간이 남을 때마다 아름다운 문장들을 많이 지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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