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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경호 Feb 26. 2024

예술이 삶과도 밀착될 수 있을까요?

사람도서관 (12) 넝마철학조각가 리혁종 작가

날씨가 일찍부터 따뜻해졌습니다. 봄이 빨리 오는 일은 반갑지만 자연스레 기후위기와 생태환경에 대한 걱정 역시 바짝 다가옵니다. 덕분일까요? 해가 거듭될수록 버려진 것이나 방치된 것을 쓸모 있거나 의미 있게 만드는 작업, 돈이 덜 들고 낭비와 오염이 적은 삶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최근 고양시 예술창작공간 해움(일산호수공원  안)에 입주한 자칭 넝마철학조각가 리씨이자 『다른 생활』(2022, 출판사 응접실)의 저자, 리혁종 작가 역시 이 중 한 명입니다. 이번 사람책은 도심 안에서도 생태주의적 삶을 모색하고 ‘살림과 되살림’을 주제로 생활과 예술의 접점을 탐색하는 리혁종 작가의 이야기를 가져왔습니다.


자칭 넝마철학조각가 리씨인 리혁종 작가. 도심에서도 생태주의적 삶을 모색하고 '살림과 되살림'을 주제로 생활과 예술의 접점을 탐색한다.




“미술작품의 가치를 보존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새로 산 재료에 대한 거부감과 환경에 대한 문제점이 늘 발생하다 보니
제가 사용하고 있는 미술 재료의 순환에 대해 늘 고민하게 됩니다.
그렇다고 새로 산 소재가 꼭 악하다 치부하지는 않습니다.

무언가를 재해석하고 대안을 만들어 내야 하는 입장에서,
모든 것을 보존하고 새로운 걸 거부하는 자연주의적 고민조차
예술가로서 과연 괜찮은 질문인가를 되뇌며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 인생 최초의 기억에 대해 말씀해 주세요.


아마 4살 즈음이었을 겁니다. 이사 가는 장면이 떠오릅니다. 트럭에 짐을 쌓아 시골로 이사 가는 장면입니다. 서울에 있다가 충남 보령, 아버지의 고향으로 내려와 유년을 보냈습니다. 보령 쪽 이름 없는 바닷가마을이었는데 농촌과 어촌을 겸한 아주 아름다운, 그러나 경제적으로 보거나 어른의 시각으로 보면 그냥 깡촌이었습니다. 지금은 간척사업으로 인해 그 아름다움이 사라진 마을입니다. 당시 내 주변을 둘러싼 그 천혜의 환경이 4살부터 7년 동안 제 안에서 많은 것을 형성했습니다. 


그 동네에는 돈을 주고 물건을 살 수 있는 구멍가게가 없었습니다. 학교도 1시간 정도 걸어가야 하고 저뿐만 아니라 마을의 많은 사람들이 고무신을 신고 다녔습니다. 개량이 안 된 초가집들도 남아 있을 정도로 개발이 안 된 곳이었습니다. 산사태가 난 벼랑에서 빨갛고 쫄깃쫄깃한 흙을 파내서 찰흙 놀이를 하기도 하고 아이들과 산에서 나무를 깎아 칼을 만들어 놀기도 했습니다. 형들이 올무로 토끼를 사냥해서 같이 나눠 먹고 할머니 따라서 산에 땔감으로 솔가지를 모으러 갔던 기억도 납니다. 학교 수업시간에 산에 올라가서 솔방울과 송진이 있는 떨어진 나뭇가지를 주워와서 겨울에 교실 난로에 태우는 것이 자연 시간의 학습(노동?)이기도 했습니다. 열매를 따고 무언가를 캐고 지금으로 치면 고가의 숲유치원처럼 아이들에게 좋은 환경과 천연 재료를 가지고 논 셈이었습니다.


시골학교니까 부모님의 형제들, 고모까지 졸업한 그런 친숙한 학교를 다녔습니다. 가을 즈음 살구가 익을 무렵이면 초등학교 고학년들이 한 시간 일찍 등교해 학교 울타리의 살구나무에 올라가 살구를 따 저학년 동생들 몫까지 포함해서 전 학년 책상 서랍에 골고루 5~6알씩 넣어 놓았습니다. 동생들은 등교하자마자 보이지 않는 서랍 속에 손을 뻗어 향긋한 열매들을 더듬어 만지던 것이 아직도 기억에 뚜렷합니다. 이처럼 그 시절에는 선물 같은 경험과 장면이 많았습니다.


그때 바닷가에는 질척질척한 점토질 형태의 갯벌이 펼쳐져 있고 한쪽에는 간척사업을 일부 진행했으나 담수화가 안 되어 해초들이 군데군데 남아있는, 단단하고 판판한 회색 땅이 있었는데 거기서 아이들은 야구도 하고 소리를 지르며 뛰어놀았습니다. 저는 동네에 또래 애들이 없다 보니 자주 혼자였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부터 혼자 많이 놀았던 것 같습니다. 갯벌 벌판에 공룡 그림 등을 그리며 놀았는데 돌아보니 이런 장면들이 제 미술의 원초적인 시작이었던 것 같습니다. 제 몸보다 큰 땅바닥에, 내 그림을 받아주는 지면(회화용어로는 서포트)에 어린 나이 때부터 온몸을 써가며 그림을 그리는 경험이 중요한데, 저는 누가 나에게 가르치거나 유도한 건 아니었지만, 환경 덕분에 이른 나이 때부터 누구의 지도도 없이 그런 이름도 없는 미술적 활동을 좋아했습니다. 


지금이야 예술이 생활예술 등으로 완화되고, 대중화-민주화-평준화되어, 이전보다 일상화되었지만, 여전히 예술이 주된 수입원이 되지 못하는 상태에서 미술을 전업으로 한다는 게 쉽지 않습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럼에도 제가 지금까지 미술을 계속할 수 있었던 건 나에게 있는 이 원초적인 기억과 경험, 자원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어렸을 적에는 화방에서 팔 법한 상품재료가 없고 무엇이든 주워서 쓰고 만들어서 써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다 보니, 그 시절의 원초적인 경험들이 오늘날 예술가로 새로운 대안을 탐색할 때마다 재생되고 강화되었습니다.


복기해 보면 방학 때가 되어야 부모님을 볼 수 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당시 부모님은 공장 노동자였고, 알고 보니 저를 돌볼 형편이 안 되었던 부모님이 저를 할머니에게 맡겼던 것입니다. 방학 때면 부모님이 저를 잠시 보고 서울로 다시 올라갈 때, 저를 놓고 멀어지는 부모님의 뒷모습을 보며 북받쳐서 울던 기억이 납니다. 



작업 중인 넝마철학 조각가 리혁종씨



■ 학창 시절 때 겪은 인상적인 기억을 말씀해 주세요.


83년 초등학교 3학년 때, 어떠한 예고도 없이 학기 중에 엄마 손에 이끌려 서울시 도봉구의 방학동으로 전학을 했습니다. 화장실이 건물 안에 있고 3층짜리 커다란 학교 건물에는 한 학년에 10반이나 넘어가고, 시골 학교와 극명히 달랐던 이 모든 정경이 저에게는 엄청나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시골에서는 어른들이 일하거나 어디 나가고 하다 보면 아이들은 마치 방치된 것처럼 보이거나 외롭게 보이지만, 동시에 놀이와 탐험, 자유로운 세상이 무한히 제공됐습니다. 반면, 서울에서는 엄마가 공장에서 일하느라 늦게 들어오니 당시 빈 지하방의 집은 나에게 일찍 들어가기에는 너무나 불안하고 외로운 공간이었습니다. 밖에서 친구들과 최대한 늦게까지 꾸역꾸역 놀고 저녁 늦게서야 집으로 돌아가기도 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저는 지금 나이가 돼서도 혼자 집에 잘 있지 못합니다. 프리랜서임에도 집에만 있으면서 하루를 보내는 경우는 극히 드뭅니다.


제 어린 시절은 개구지고 천진난만했던 시골에서 길러진 나와 대도시에서의 사춘기를 보낸 위축되고 불안해하는 내가 함께 있습니다. 그 당시에는 사실 미술이니 뭐니 특별히 관심이 없었습니다. 어렸을 때 집에 여유가 없다 보니 따로 사교육을 받을 수도 없었고, 시골에서 서울로 이주한 후에도 집 주변을 배회하며 주변 환경에 있는 버려지거나 방치된 넝마 같은 재료를 가지고 놀았습니다. 그랬던 행위가 오늘날 저의 미술로 이어진 것 같습니다. 미술을 시작하고 나서 저의 위축되고 어지러웠던 심리적인 어려움이 많이 해소되었습니다. 미술을 통해 저는 일찍부터 저한테 좋았던 것, 싫었던 것 등을 들춰내고 여기에 의미를 부여하면서 스스로 위로하고 조금씩 회복했던 것 같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내 친구가 미술 학원을 다닌다는 말에, 당시 미술과 대학이라는 이름이 합성된 미술대학의 존재를 처음 알았습니다. 어른 세계로 넘어가려면 대학에 가기 위해 힘들게 공부를 하거나 취업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는데, 친구 녀석은 제가 좋아하는 그림을 그리러 이 중요한 시기에 미술 학원을 다닌다니 의아했습니다. 알고 보니 미술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입시를 준비하는 학원이라는 말을 듣고 새로운 해방구를 알게된 기분이었습니다. 그때부터 저도 모르게 바람이 들어서 미대라는 환상이 저에게 탈출구처럼 생겨났습니다. 고3 때 미대를 가고 싶다는 이야기를 부모님에게 꺼냈는데 거센 반대가 아니라 부모님의 미안해하는 모습을 보고는 저는 마음을 접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92년도 그때 당시 교회를 다니고 있었는데, 제가 현실의 벽 앞에서 끙끙 앓던 모습을 본 친구가 미대 출신의 교회 누나에게 안타까운 사연을 전했고, 그 누나가 미술을 가르치는 자신의 친구를 소개해주었습니다. 당시 억눌렸던 실낱같은 희망이 봇물 터지듯 튀어나왔습니다. 자기 친구가 있는 쌍문동의 미술학원 약도를 누나가 쪽지로 그려줘서 찾아갔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찾아간 곳은 입시 전문이 아니라 유치원부터 중학생들을 대상으로 미술을 가르치는 학원이었습니다. 유치원생들이 앉을 만한 자그마한 의자에 앉아 미대 입시 준비를 하였고 아그리파 석고상을 남대문에서 사서 봉지에 담아왔던 게 기억납니다. 그때가 고3 여름이었습니다. 준비시간은 짧지, 학원에 갈 형편은 안 되지, 전전긍긍할 당시 군입대를 기다리며 휴학 중에 아르바이트를 하는 친형이 수입을 지원해준 덕에 입시학원을 뒤늦게 다니게 되었습니다. 제수 때는 아침에 신문을 돌리면서 공부하였고, 결국 3수에 걸친 각고 끝에 미대에 진학하게 됩니다.


돌아보니 서울로 와 초3 때부터 대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 음울했던 시기였습니다. 또래 친구들이 있긴 했지만 아무 이유 없이 괴롭히거나 심부름을 시키거나 놀잇감처럼 때리는 아이들도 종종 있었습니다. 소외감이 컸던 시절에 권태와 고독감, 우울이 느껴지기도 했던 시절이었습니다. 이런 어려움을 누구에게 의논하거나 이야기 나누질 못했습니다. 중2 때 교회를 접하면서 적지 않은 시간을 교회 속 또래 집단과 신앙공동체 속에서 보냈는데, 이후 미대에 와서도 신학이나 교리, 기독교 미술까지 관심을 가지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예술이 신을 대체했습니다. 하얀 캔버스에 나의 생각과 감각을 표현하는 기쁨을 알게 되고 세상에서 나를 위한 자리가 있구나라는 희열을 느끼면서 자연스레 저의 종교 생활이 예술로 갈무리되었습니다. 



[Art Bible]은 리혁종 작가의 최근 저작으로 자신의 예술적 일대기를 성서의 구조를 패러디하여 기록한 아트북이다. (미출간, 작가 스튜디오 소장)




■ 간단한 개인소개를 부탁드립니다. 


현재 저는 고양시 일산호수공원 안에 새로 생긴 창작 공간인 ‘고양창작공간 해움’에 작가로 입주한, 미술 작가 리혁종입니다. 넝마철학조각가 리씨라는 제 별칭은 개인창작과 사회문화적인 활동가, 예술과 기획 사이를 아우르는 고민이 들어가 있습니다. 이 다양한 관심 영역의 가교 역할을 하고 싶기도 하고 제가 하고 있는 일을 위트 있게 표현하고 싶어 2011년부터 이렇게 스스로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서류를 작성할 일이 있으면 시각예술 장르 중에서도 설치미술 칸에 V자 표시를 하지만 실제로는 뭐로 불려야 할지 고민을 많이 합니다. 넝마철학조각가는 대학교 때부터 1차적으로 재료를 사서 쓸 수 없는 부실했던 경제적 이유와 2차적으로 생태주의라는 훌륭하고 타당한 명분 때문에 차용했습니다. 지금 굳이 따지자면 생태경제적 예술가랄까요?


미술을 하다 보니 내가 만드는 작품과 작업들 또한 쓰레기를 발생시키는 것 아닌가라는 고민을 하게 됩니다. 미술작품의 가치를 보존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새로 산 재료에 대한 거부감과 환경에 대한 문제점이 늘 발생하다 보니 제가 사용하고 있는 미술 재료의 순환에 대해 늘 고민하게 됩니다. 그렇다고 새로 산 소재가 꼭 악하다 치부하지는 않습니다. 무언가를 재해석하고 대안을 만들어 내야 하는 입장에서, 모든 것을 보존하고 새로운 걸 거부하는 자연주의적 고민조차 예술가로서 과연 괜찮은 질문인가를 되뇌며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 가장 인상적이었던 작업에 대해 소개해주세요.


2007년도 ‘날개 달린 사람’이라는 이름으로 유리창에 밥풀로 붙여서 만든 설치작업이 떠오릅니다. 부평구청에서 진행된 설치미술전에 청사 3층 대형회의실 앞 통유리에 제작한 2미터 크기의 큰 창에 제 신체 사이즈 보다 더 큰 작품입니다. 
 

'날개달린 사람' 도판 이미지.



대학 때 생태주의 사상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고 미술 작품 제작에 회의를 느끼던 저는 졸업 후 이렇다 할 미술 이력이 없이 방랑을 했습니다. 건축 일용직에서부터 여러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배 타는 선원활동까지 하며 3년 정도를 지내고 나니, 어차피 고생할 거면 다시 예술활동을 하며 구르는 게 낫겠다 싶었습니다. 작가에 대한 경력과 경험이 일천한 바탕에서, 친구 소개를 통해 전시 관련 담당자에게 예술에 대한 고민과 욕망을 담아 

진지하게 편지를 써서 이를 흥미롭게 여긴 기획자의 수락으로 전시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생태주의를 실천하면서 반드시 따라올 수밖에 없는 미술 재료와 작업방식에 대한 금기들, 먹고사는 일과 예술을 꿈꾸는 일들이 제 안에서 끝없이 밀고 당기기를 하였습니다. 먹고사는 일의 상징인 밥알의 잉여분을 얻어서 꿈꾸는 모습의 상징으로 날개 달린 사람이 탄생 되었습니다. 밥알에 끈기가 있으니 일시적으로 작품으로 존재할 수 있고 동시에 제거도 용이하며 그렇게 버려지는 폐기물들은 모두 잔반이니 음식물쓰레기로 잘 돌아갈 수 있는 작업 과정이었습니다. 제가 스스로 낸 과제에 스스로 대답하였으니 그 첫 전시가 저에게는 많은 성취와 영감을 주었습니다. 


생태주의, 환경에 대한 관심, 예술창작의 지속성에 대한 고민과 질문은 이후로도 계속 이어졌습니다. 서양화과 출신인 제가 재료에 대한 고민과 생태윤리에 대한 고민 때문에 더 이상 진행할 수 없었던 작업들이, 유년시절 가지고 놀았던 생태재료, 생태주의적 메시지 등이 접목되며, 새로운 대안과 실마리를 마련하였고 이는 곧 새로운 형태의 미술 작업으로 이어졌습니다. 생태주의 적인 주제와 소재로 작업을 이어갔습니다. 


이후 날개 달린 사람은 지금 저의 주요 테마 중 하나인 이카로스 프로젝트의 이카로스 아이콘으로 확장되었습니다. 그리스의 이카로스 신화를 현대적 의미로 각색한 것으로, 자본주의의 태양과 생태주의라는 바다 사이를 이카로스가 지혜롭게 날 수 있을까라는 주제를 담고 있습니다. 자본주의와 생태주의의 충돌 속에 위기를 맞고 있는 지금 나와 현대인의 문명적 위기를 미술이라는 도구로 해쳐나가는 프로젝트입니다.


 

■ 고양시민들에게 저서 『다른 생활』에 소개해주십시오.


『다른 생활』은 2011~2017년 7년간 서울시 도봉구의 방학동에서 예술기관이 아닌 방아골종합사회복지관과 협업하여 진행한 지역 활동을 정리하여 2022년에 낸 책입니다. 이전에는 복지라는 게 가난한 자에게 빵을 주는 일방적인 것이었으나 이후 더 근본적인 사회구조의 변화를 위해 역동적 복지, 문화복지 등의 새로운 담론이 등장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저의 지인인 예술가들이 복지관과 공공미술을 주제로 협업한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그것도 마침 제가 어린 시절에 살던 방학동에서 프로그램이 진행된다 하니 무척이나 반가웠습니다. 2010년에 당시 현장에 간 계기로 자연스레 합류하게 되었습니다. 


리혁종 작가의 저서 다른생활 표지



당시 공공예술가인 지인 동료들은 주민들의 삶과 예술 주제를 접합시키고, 사람과의 관계와 감성에 대해 고민하는 수업을 통해 지역 주민들과 기관복지사들에게 각광을 받았습니다. 지역 내 사람들의 살아가는 이야기를 토대로 ‘이야기가 있는 동네 벤치 만들기’ 프로그램을 통해서 시민들과 같이 작품을 만들고 전시하였습니다.

복지관예산이 많았던 게 아니라 당시 함께 의기투합했던 복지사가 각종 공모와 지원을 가지고 오고, 동시에 예술가와 함께 공동기획을 하고 멤버로 활동하면서 2011~2013년까지 ‘도깨비연방’이라는 주민자치 동아리 조직과 거점을 구축하는 활동을 했습니다. 이후 지역에서 정착하며 예술활동을 이어가는 레지던시형 커뮤니티 작업장인 ‘황새둥지’라는 프로젝트를 진행하였습니다. 동료들과 함께 예술(활동)가가 상주하면서 운영하는 커뮤니티 공간을 기획, 세팅, 운영하였습니다. 


이 책에는 이전부터 진행되었던 개인창작과 사회적인 작업과 고민이 담겨있습니다. 당시 혼자 힘으로는, 독학만으로는 접할 수 없었던 내용들이 주변 동료들에 의해 확장되고 제 작업들이 공공미술, 커뮤니티 아트(공동체 예술, 지역 기반 예술, 사회참여 예술 등으로 불리는) 의 접점이 커진 계기였습니다. 생태주의적 생활문화에 대한 실험과 일상생활과 밀착된 예술의 탐구의 내용들이 저서 안에 담겨있습니다.


당시에는 예술가보다는 활동가처럼 서로 닉네임을 부르고, 예술을 표방하지 않았기 때문에 공동체 문화 활동에 가까운 형태였습니다. 도시에서 이런 게 가능한가 싶을 정도 생태적인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오줌으로 비료를 만들고 약수로 식수를 감당하고 햇빛 전지를 설치하고 로켓 스토브를 만들어서 뒷산 폐참나무 방재목으을 태워서 난방을 할 수 있는 구들방을 만드는 등 우리가 하고 싶었던 여러 프로그램과 실험들을 많이 진행했습니다.


시비도 많이 걸렸습니다. 예술을 특별한 것이라 부르지 않고 대중과 함께 하려다 보니 덕분에 대중들이 선호하는 좋은 경험도 많았지만, 예술 관련 예산인데 예술이라는 이름을 쓰지 않고 텃밭을 다듬거나 마을 활동 등으로 사용되니 오해도 종종 있었습니다. 


훗날 방학동 생활을 끝내고 나오면서 저에게는 예술과 사회라는 단어가 서로 합성되었고 이에 대한 고민으로 탈고했던 책이 바로 『다른 생활』입니다. 과거에는 캔버스 안에서 예술을 고민했다면 마을 활동을 통해 캔버스 밖을 고민하는 예술을 탐색하게 되었습니다. 캔버스에서 자유를 느끼고 나를 알게 되었다면, 마을 활동을 통해 기획자라는 정체성을 얻고, 사회 변화와 연동되는 예술의 형태에 대해서 더욱 욕망하게 되었습니다.




■ 최근 근황을 소개해주세요.


방학동 활동을 나오고 나서부터 현재까지는 ‘레지던시 표류기’를 거치고 있습니다. 당시 공동체 활동을 통해 많은 영감을 받았지만 도달하지 못했거나 달성하지 못한 것들이 많았습니다. 당시 억눌렸던 개인적인 예술창작에 대해 고민이 다시 새어 나왔습니다. 열정은 많았지만 지역 활동조차도 예술가로서의 영향력이 있어야 하고, 이를 통해 만들어지는 교섭력이 저에게 부족하지 않았나 라는 생각에 이르렀습니다. 


한국이라는 풍토에서 예술을 오래 하고 영향력을 가지려면 예술가로서의 브랜드를 조금 더 진지하게 고민할 수밖에 없었고, 이제는 이름을 감추지 않고 작가성을 강조하며 다양한 레지던시를 거쳐 활동하게 된 것 같습니다. 과거에는 예술을 감추고 작업을 해도 예술이 가능하다는 급진적인 생각을 했지만 현실에 맞추어 최근에는 예술가로서의 개인성도 함께 고민하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지금 다 밝힐 수 없지만 인간의 흔적으로 만들어진 쓰레기들, 공원관리를 통해 나온 떨어진 낙엽이나 가지 등 생태부산물을 이용해, 호수공원을 오가는 시민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창작활동을 기획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완성하지 못했던 계획과 미처 생각해보지 못한 예술을, 계획되지 않았던 의외의 사람들과 함께 완성하거나, 새로운 대안이나 더 나은 작업물을 만들어보고 싶은 목표를 가지고 있습니다.

 

■ 내가 생각하는 예술이란?


예술은 내가 이 세상을 바라보는 의미와 가치를 만들기 위한 구실이 아닐까 싶습니다. 어린 시절에 느낀 불안감과 결핍, 이를 해소하여 자유를 느끼고 싶어 하는 나를 발견합니다. 돌아보니 어쩌면 제 예술은 어린 시절의 외로움과 권태, 수중에 돈 백원도 없는 우울한 청년시절의 소외감과 박탈감에 대한 변명일지도 모릅니다.


어릴 때부터 최근 여러 사회문제와 곤혹스러운 사건들을 볼 적마다, 예술은 내가 왜 살아야 하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을 해소하는 도구와 수단이 되었습니다. 저는 예술가 치고는 경제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는 편입니다. 자발적 가난을 선택한 예술가와 달리 구조적으로 가난할 수 밖에 없는 신빈곤의 상황에서 예술을 한다는 게 어떤 의미와 효과일까란 생각을 오래 했습니다. 경제적 보편성의 예술에 대한 물음을 계속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술에 경제적 이익관심이 포함되면 예술이 아니거나, 낮잡아 보는 시선 속에서도 심지어 여기에 생태주의적, 정치경제학적인 요소까지 제 예술론에 포함시키는 게 저의 목표입니다. 과정 속에서 제 예술이 커먼즈(공유자산화)화 되길 바랍니다. 그렇게 삶으로 제 예술을 입증하고 새로운 대안들을 창출해 내고 싶습니다.

길가의 쓰레기와 불필요한 자원을 다루는 일뿐만 아니라, 다양한 사상과 철학들을 넝마처럼 기워서 새로운 걸 만들고 싶습니다. 또한 예술로 사람들이 다양하게 살아갈 수 있고 그 안에서 존중받도록 하고 싶습니다. 예술이 삶의 기술이자 삶의 도구로 쓰이게 만들고 싶습니다. 


저의 프로젝트는 자본과 경제를 거부하고 부정하는 방식이 아닌 자본을 유혹하는 방식입니다. 자본사회에서 정신적으로 일탈하는 것이 아닌, 경제적 행위자로서 삶과 일상의 소재에서 영감을 얻고, 생태주의와 공동체주의, 공공의 영역을 포함시킨, 동시에 매력적인 상품으로써의 예술 역시 저는 포괄해서 대안을 찾아가고자 노력합니다. 
 

작업실 내부 전경



■ 예술 때문에 나는 무엇을 얻었나요?


‘우리가 얻을 건 자유요. 잃은 건 쇠사슬뿐’이라는 문구가 생각납니다. 예술 때문에 나라는 자아정체성, 주체에 대한 효능감 등을 얻었던 것 같습니다. 영어로 치면 ‘셀프’, 즉 자기라는 것을 얻었습니다. 과거 종교 색채가 강한 삶에서 신을 내리고 그 안에 예술을 통해 저로 가득 채웠습니다. 예술로 인해 나라는 주체를 얻었지만 동시에 끊임없이 스스로를 의심하고 경계하는 마음과, 사회의 관습과 형식에서 발을 빼지 못하는 현실에서 오는 번뇌 또한 얻었습니다. 그럼에도 이때 나오는 불안감과 떨림 역시 지금 하고 있는 예술의 중요한 동력과 자원이 됩니다.


 

■ 인간의 삶은 그 자체로 예술이 될 수 있을까요?


이 질문은 여전히 폐기되지 못한 제 예술의 전제인데, 지금도 계속 이 질문을 하며 작업하고 있습니다. 과연 ‘인간의 삶이 예술이 되는 것이 가능한가‘와 그렇게 되는 것이 좋은 것인가, 그리고 그런 세상이 과연 괜찮은 세상인가라는 의심을 또한 가지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삶에 예술성이 있으면 좋겠다는 것이 현재까지의 절충적인 생각입니다.


 

■ 내가 만일 독재자라면 가장 먼저 무엇을 하고 싶습니까?


특이한 질문이지만 마음에 듭니다. 예술감옥과 예술군대를 만들고 싶습니다. 예술이 강제되지 않고는 예술이 사회에 일반화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1차적으로 예술 관련 행정가와 입법자들을 수감할 겁니다. 감옥은 물리적인 폭력이 만연한 곳이 아니라 정치사범처럼 독방을 유지하는 구조로 되어 있고, 폭력과 악이 악순환되는 구조가 아니라 사람 하나하나를 예술가로서 소양을 쌓게 하고 싶습니다.


군대는 국가가 독점한 거대한 폭력입니다. 평화학의 관점에서의 통계를 보면 군대가 가장 많이 해친 건 자국민이라 합니다. 자국민의 소요를 진압하기 위해 군대와 경찰이 많이 소용된 역사들이 많습니다. 이런 군대가 갖는 전체주의적 규율과 열정, 희생과 희열 등을 활용하여 사람들 속에서 예술성을 강제적으로 축출하고 개화시키는 데에 전환시키고 싶습니다. 그래서 백범 김구가 주장했던 (방법과 방식은 전혀 다르겠지만) 문화적인 강국(국가보다 사회)을 만드는 데에 효과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술체험을 통해 얻을 수 있는 효능감을 국가의 힘을 이용해 시민들에게 강제하고 싶습니다. 쓰지 못한 자원을 다 끌어 써야 비로소 마음이 놓이는, 넝마주이가 여전히 저한테 남아서 일까요? 지금 사회에 만연한 혐오와 차별, 적대감 등의 에너지까지 예술로 소용되도록 만들고 싶습니다. 한반도의 지정학적인 이념 대립과 적대, 혐오의 문화 저변의 기류를 주목하여 문화 안으로 끌어 올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고 보니 독재자가 된다면 저는 사람들이 정말로 ‘조심해야 할 사람’이 될 것 같습니다. 제 저서에는 126살까지 살겠다는 장수계획이 포함되어 있는데 아! 이러고 보니 너무 사이비교주 같나요? 그 긴 시간을 통해 사람들에게 예술의 효능과 기쁨을 전해보고 싶습니다. 


 

■ 예술가들이 지역에 정착하여 살아가기 위해서는 무엇이 혹은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요? 


직접 지역에 살면서 예술과 지역에 대해 오래 고민했던 사람으로, ‘예술가로서 지역정착’이라는 목표에서 탈출하고 보니 저에게는 몇몇 질문들이 생겼습니다. 예술가로 지역에 정착하는 게 과연 괜찮은 삶인가, 그게 좋은 예술인가라는 질문이 생겨났습니다. 공동체활동을 해본 주민들은 아시다시피 저에게는 과거 커뮤니티를 통해 얻었던 좋은 경험뿐만 아니라 곤란하고 힘들었던 경험도 있습니다. 만약 당시 어려웠고 괴로웠던 기억을 지울 수만 있다면 최근 고양시에서 알게 된 사회활동가들, 새로운 시민들과 함께 여러 실험을 해보고 싶습니다.
 

고양창작공간 해움 전경


예술가들이 지역에 정착하기 위해서는 그 안에 살고 있는 시민들과 창발적인 브랜드와 대안, 결과물들을 만들어 내야 하고, 그 너머에 대한 고민을 서로 훼손하지 않고 상처 입지 않은 채 지속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지역에 정착하는 개인으로서 또 공동체로서 다양한 모델들이 있겠지만 예술가들은 개인과 공동체 이 둘을 동시에 고민하고 양립하며 살아갈 수 있는 물리적, 관계적 모델을 연구하고 싶습니다. 과거 유휴공간들을 공동 공간을 활성화한 커뮤니티 아트의 경험을 개선된 버전으로 실험해보고 싶습니다. 이렇게 말을 했지만 방금 질문은 저에게 여전히 어렵고 스스로에게 자신 없는, 부채의식이 가득한 질문입니다.


 

■ 예술가가 되고 싶은 청소년이나 시민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정보를 입수하고 도움을 줄 수 있는 멘토를 찾으십시오. 정규적인 교육을 받는 것도 좋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정규적인 틀이든 아니든 간에 예술에 대한 전반적인 정보와 그것을 체화한 지식과 기술, 경험을 가진 멘토를 잘 만나고, 진입하면서부터 좋은 동료 관계를 만들어 가는 길이 일반적인 답변 같지만, 제가 해줄 수 있는 조언입니다. 그런데 저처럼 사회 예술에 관심을 가진다면 지역이나 온라인의 커뮤니티를 찾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고양시도 꽤 큰 규모의 도시이므로 예술 관련 커뮤니티나 기관들, 멘토들이 있을 것입니다.
 



■ 사람들에게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나요?


‘그래 126세까지 살겠다더니 기어코 그렇게 오랜 산 사람, 자신의 예술을 기어코 사회화에 성공한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저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평소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그게 상대에게 수긍되거나 수용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으니깐 농담을 더 많이 섞어서 이야기를 하는 습이 몸에 배어있습니다. 나의 진담과 고민을 사람들에게 곱씹게 했던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습니다. 그게 쉽지 않을 것 같아 최대한 많은 삶을 살고 싶습니다. 넉넉잡아 126세까지 오래 살고 싶고, 예술의 사회화에 부단하게 노력하면서 그렇게 오래 산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습니다.




자료출처 : “예술이 삶과도 밀착될 수 있을지 실험하고 있어요” < 인터뷰 < 지역 < 뉴스 < 기사본문 - 고양신문 (mygo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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