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날개 May 04. 2024

2. 나를 나답게 해주는 여행, 그 시작.

Chile-Argentina 여행

  여행은 언제 시작된다고 볼 수 있을까?

나의 경우, 평상시 여행으로 인한 설렘이 시작되는 시기는, 근질거리는 엉덩이를 더 이상 붙이고 있을 수 없어 여행을 떠나기로 마음먹었을 때부터이고, 비행기 표를 끊고 중요 일정에 대한 예약을 해나가면서 그 설렘은 증폭되기 시작한다.


  이번 여행은 조금 달랐다. 이 여행의 시작은 내 인생의 밑바닥 경험에서 시작되었고 여행이 아니면 내가 망가질 수도 있겠다는 절박함에서 시작되었다.

비참함. 극도의 분노. 실망. 슬픔. 무력감. 부정적인 감정을 그러모아 안고 지냈던 지난 수개월을 털어낼 만한 일이 필요했다.


  실패한 결혼생활은 끔찍하게 유치하고 소름 끼치게 원초적인 분노를 자아내는 싸움과 냉랭한 일상의 반복이었고 완전히 마음이 돌아오기 전에 다시 싸움이 시작되는 상처 위에 상처를 덧입히는 일이었다.

  결국 그는 폭력적인 모습까지 드러내었고 나는 더 이상 일초도 이런 삶을 유지할 수 없다고 결단 내렸었다. 그리고 그 뒤로 내 마음은 단단히 얼어붙었고, 그 어떤 긍정적 감정도 모두 잊어버린 듯했다.


  아직 마음이 만신창이이던 때, 나는 남미를 떠올렸다.

수년 전부터 가고 싶다는 말을 입에 달고 다녔고, 항상 마음속에 품고 살았지만 그를 만나면서 멀어질 수밖에 없었던 나의 꿈.

  그는 내가 남미여행에 대한 부푼 꿈을 말할 때마다 남미를 가서는 안 되는 이유를 먼저 찾곤 했다.




  한때 남미 여행에 대한 부푼 마음을 안고 스페인어를 같이 공부하던 친구에게 운을 뗐다.

"그때 우리 가려고 했던 남미여행, 계획했던걸 다 하기엔 시간이 부족하니, 쪼개서 일부를 이번에 갔다 오는 건 어때?"

친구는 며칠 망설였지만 결국 여행에 동참하기로 했다.

  됐다! 우리는 남미로 드디어 가는 거야!!


  역시. 내가 용기를 내지 못해 하지 못했던 일들이 마음을 먹자마자 바로 현실이 되는 상황을 보라.

그동안  얼마나 나 자신을 돌아보지 못하고 살았던 걸까.

  난 왜 그랬을까. 뭘 위해 나를 나답게 만들어주는 일들을 포기하고 지냈던 걸까.


  그와 함께하는 삶이 나를 더 나답게 만들어주는 게 아니라, 나다운 일을 포기하여야 하는 삶이라면 더 이상 같은 방향을 바라볼 수 없었던 것은 자명하였다.

  나는 옳은 결정을 하지 못했다. 그는 그답게, 나는 나답게 살면서 함께 행복할 수 없었는데, 서로 "맞추어"가면 될 줄 알았다. 불가능을 가능케 하려 했던 나는 스스로 차곡차곡 쌓아 올린 지옥을 맛보며 결국 안된다는 것을 인정하고야 말았다.


  이번에 여행할 곳은 칠레의 토레스 델 파이네 W트레킹 코스 및 아르헨티나 전역이다.

무려 칠레와 아르헨티나라니. 마음이 들떠서 마구 부풀어 올랐다.  

쪼그라들 대로 쪼그라들어 더 이상 무언가를 느낄 감정조차 남지 않았을 듯했던 마음이 다시 산소라도 공급받은 듯 개운해진 느낌이 들었다.

  이거야! 나는 나를 나답게 해 줄 무언가가 오랜 시간 간절했었던 것 같다.




  그 당시 나는 그를 마음속에서 완전히 밀어냈고, 완벽히 떠나보냈다고 생각했지만, 아직 내 마음의 상처와 나 자신에 대한 분노는 사그라들지 않았다.

내가 한 선택이 이렇게 보잘것없고 허탈한 결과를 내었다는 것, 그뿐만 아니라 나와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큰 상처를 남겼다는 것에 대한 나 자신에 대한 실망과 분노가 계속 남아있다.

나는 이 정도밖에 안 되는 사람이었나. 내 자존감의 근간이 되어왔던 모든 것들이 흔들리는 느낌이었다.


  사람들은 나를 위로한다.

"어떻게 사람을 다 알겠어. 살아보기 전엔 모르는 거지. 지금에라도 알았으니까 된 거야."

아니, 난 알았어야 했다. 그리고 심지어 알았는데 무시했던 것 같기도 하다.

나는 평범해지고 싶었다.

그리고 그 평범함에 대한 열망이 나 자신을 무너뜨리게 될 줄은 바보 같게도 몰랐던 것 같다.


  누구나 하는 것을 하지 못하고 산다는 것이 두려웠다. 그리고 외로워질 것이 두려웠다.

내가 평범함을 원한다면, 평범해지기 위한 노력을 하면 될 것이라고 생각했고, 틀에 나를 가두었다.

그게 시작이었다.

  그는 나를 결코 알아봐 주지 못했고, 결국 나는 불행해졌다.

함께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이 절대 아니었는데 난 왜 내 행복을 그렇게 이기기 어려운 패에 걸었을까.




  난 떠날 수 있다. 난 자유롭다.

난 이제 이길 수밖에 없는 게임에 내 행복을 걸 것이다.

이전 01화 1. 나는, 떠나야만 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