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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개 Jun 01. 2024

10. TDP(3) : 낭떠러지에서 떨어질 뻔

2024. 3. 9 Cuernos - Chileno

  어젯밤 우리의 텐트는 세차게 부는 바람을 용케도 막아주었다. 이곳의 바람은 어찌나 세차게 부는지, 바람소리에 깬 나는 한참 동안 텐트가 무너질까 봐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우리는 약과였다. 나중에 산장에서 만나 잠시 수다를 떤 미국인 친구는 텐트 치는 자리만 대여를 하고, 본인이 직접 경량텐트를 짊어지고 올라와서 치고 잠을 잤는데, 어젯밤, 거센 바람에 경량텐트가 초승달모양으로 휘는 바람에 지지대가 부러질까 봐 밤새도록 붙잡고 있느라 잠을 한숨도 못 잤다고 한다. ㅡㅡ;;;; 텐트가 미리 쳐져있는 자리를 예약하길 잘했다... 과거의 나 칭찬해...




  Cuernos에서 Chileno까지. 11Km를 걷는 일정이었다. 3박 4일 중 가장 쉬운 날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ㅋㅋㅋㅋㅋㅋㅋ 거의 죽다 살아났다.   

  처음에는 룰루랄라 신이 났다. 간밤에 비가 내리는 바람에 호수에 떠오른 무지개까지 보며 트레킹을 시작할 수 있었다. ("There's rainbow!!"라고 호들갑 떨던 한 트레커 덕분에 볼 수 있었음 ㅋㅋ)


무지개가 피어오른 호수


  조용한 길을 신나게 걷고 걸어 '이 정도면 오늘 진짜 산장에 너무 일찍 도착하는 거 아냐?'라는 방정맞은 생각을 하기 시작할 때 즈음. 오르막 지옥이 시작되었다.


방정맞은 생각을 하는 한치앞을 모르던 나


  그렇게 가파르지 않고 잔잔하게 죽고 싶게 만드는 길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길이 왜 그렇게 힘들었을까 싶은데, 그땐 3일째 걷는 중이었던 데다가, 내리막이 전혀 없이 끊임없이 오르막길이고 바람이 다시 심하게 불어 저항을 많이 받는데 몬스터까지 함께여서 힘들었던 듯하다.


  마지막 지옥의 돌길은 심지어 가파르기까지 한 데다 바로 옆이 낭떠러지인 위험하고 힘든 길이었다. 바람이 어찌나 세차게 부는지, '이놈의 바람이 날 낭떠러지로 밀어버리려고 작정했구나.' 진짜 정신 잠깐 놓으면 굴러 떨어질 지경이어서 몸을 낮추고 최대한 안쪽으로 붙어서 엉금엉금 기다시피 걸었다. 오금이 저린 상태로 바람과 싸우며 2시간 가까이 걸었는데,  거의 생존을 위한 투쟁 같은 트레킹이었다.

  그렇게 긴장감을 느끼며 등산을 하는 와중에도, 경관은 얼마나 예쁜지... 아니, 예쁘다는 표현은 적절치 않다! 장엄하다! 웅장하다?! 정말 절경이었다.


아예 바람이 부는 길이라고 팻말이 붙어있음
떨어지면 죽음 뿐...




  바람에 모자가 날아갈까 봐 손으로 누르며 (벗으면 머리카락이 미친 X처럼 날리기 때문에 벗을 수도 없음) 내적 비명을 지르며 극적인 타이밍에 chileno 산장에 도착했다.

  내가 평소 웬만하면 등산하다가 얼마나 더 가야 해요?라고 묻지 않는데... 오늘은 막판에 결국 반대쪽에서 오는 사람에게 "How far does it take from here?" 묻자, 등산쟁이들의 한결같은 거짓말! "Almost there!!"

  훗... 나는 믿지 않는다... (그럴 거면 왜 물어보니)

예상대로 그가 말해준 시간의 2배 정도 걸려서 도착했다. ㅡㅡ;;

(다음날 이 길을 내가 반대로 내려갔는데, 어제의 나랑 똑같은 표정의 한 트레커가 얼마나 남았냐 묻길래 나도 친절한 표정으로 거의 다 왔다고 해줌 ㅋㅋ)

  

오른쪽 위에 개미만한 사람을 보면 낭떠러지의 무시무시함을 약간 느낄 수 있음


  이곳에서 원래의 계획은 내일 Las Torres 봉우리의 멋진 일출을 보기 위해 새벽 산행을 하는 것이었는데... 날씨가 너무나 심상치 않다. 이렇게 흐리고 바람이 불어서야... 어둠 속에서 비바람과 싸우며 올라가 봤자 봉우리가 안개에 가려져 보이지 않을 것이다. 산장 뒤쪽으로 삼봉으로 의심되는 산봉우리가 있었는데, 오늘 이미 안개 때문에 거의 보이지 않는다.

  자연은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쉽게 보고 접근할 수 없다.

  자연이 허락해주지 않으면, 나는 접근할 수 없다.

  엄홍길 대장님이 '산은 정복하는 게 아니다. 산이 우리를 잠시 머무를 수 있도록 허락해 주는 것뿐이다.'라고 하셨던 말이 정확하다.

내가 비행기를 타고 30, 40시간을 왔던 말건, 바람, 비 등의 문제가 발생하면 더는 접근할 수 없는 것이다.


안개 속으로 점점 더 사라져가는 산봉우리...


  너무나도 아쉽겠지만, 만약 내일 비바람 이슈 때문에 Las torres를 다녀오지 못한다 하더라도, 나는 3일간의 여정만으로도 충분했다고 생각한다. 천혜의 비경을 보며 걷던 시간들. 전 세계에서 모여든 트레커들. 그중에 내가 있었고 모든 순간 행복했다. 힘들어 죽을 것 같던 순간에도, 허벅지 근육이 분화해 사라질 것 같이 아프던 순간에도, 나는 살아 있음을 느꼈다.


  나의 취향과, 꿈과 결단이 나를 이곳으로 이끌었고,

  내 손으로 일군, 내가 처절히도 원해왔던 행복을 지금 느끼고 있다.

  나를 찾기 위해 계획한 이 여행의 시작점에 있는 Torres Del Paine.

  충분한 시작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지금, 나는 오롯이 나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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