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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개 Jun 05. 2024

11. TDP(4) : 약간의 여운을 남기고 떠나다

2024. 3. 10 Chileno-Puerto Natales


  토레스 델 파이네를 떠나는 날이다.

어제 예상대로 새벽엔 비가 억수 같이 내리고 바람이 불어서 결국 Las Torres를 보러 새벽 산행을 하는 것은 포기해야 했다. 많이 아쉬웠지만 이 정도의 아쉬움은 다음을 기약하기 위한 약간의 여운으로 남겨두려 한다.


안개 속으로 사라진 산봉우리... 아...아쉽다.... 꼭 다시 보러 올게!!


  3일간의 땀에 절은 옷과 무릎 보호대를 다시 입으려니 웃음이 났다. 이걸 또 입다니...ㅋㅋㅋ

우비까지 챙겨 입고 아쉬움을 뒤로한 채 이곳을 떠나는 발걸음이 쉽게 떨어지질 않는다. 자꾸만 뒤 돌아보고 늑장을 부리게 된다.


Adiós! Torres del paine~


  오늘은 어제 왔던 길을 되돌아 나가, welcome center까지 가서 셔틀을 타고 버스 정류장까지 간 다음, 버스를 타고 Puerto Natales의 숙소로 돌아가는 일정이다.


  조금 걷다 보니 날씨가 화창하게 개이며 바람도 멎는다. 하아... 어제 이런 날씨였어야지!!

날씨가 좋으니 시야도 훨씬 멀다. 깨끗한 수채화 같은 풍경을 보며 한참을 걸어내려 갔다. 어제는 죽어가며 올라왔던 길이다. 힘든 얼굴의 남자가 나에게 Chileno까지 얼마나 남았냐고 묻는다. 어제의 내 모습과 완전히 overlap 되어 보였다. 힘내, Amigo. 조금만 더 가면 돼. ㅋㅋㅋ




  땀에 푹 절은 옷을 껴입고, 비에 계속 노출되었던 모자와 겉옷을 입고, 이제는 울러메는게 상당히 자연스러워진 몬스터를 메고 걷는 내 모습이 참 마음에 든다.

  3박 4일간, 인터넷이 전혀 터지지 않는 산속에서, 길을 찾을 때도 휴대폰부터 드는 게 아니라 옆에 지나가는 트레커들에게 묻고 같이 궁리하며 찾아야 했고, 산장에서도 책이나 일기장을 들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불필요한 자극과 넘쳐나는 정보 따위에서 벗어나, 오롯이 내 앞에서 일어나는 일에만 집중하고 내면으로 침잠할 수 있는 경험.

  누군가에게는 이런 며칠이 끔찍이도 지루하고 힘들 수 있겠지만 나에게는 그 무엇보다 필요했던 힐링이 되었다. 휴대폰에 코를 박고 있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곳에서, 인위적인 소음이 전혀 없는 이곳에서, 계곡, 돌, 바람, 빙하, 호수만 느끼며 지낼 수 있었던 3박 4일. 이것이야 말로 완전한 힐링.





  해외 트레킹이 두 번째이다 보니, 예전에 뉴질랜드 루트번 트래킹을 갔던 때의 기억이 자꾸 난다. 루트번은 참 예쁘고 아기자기한 느낌이었다면 TDP는 웅장하고 좀 더 거칠었다. 체력적으로도 훨씬 힘들었고, 트레커들의 포스도 더 엄청났다.


  그러다 보니, 뉴질랜드 루트번을 같이 걸었던 엄마 생각이 자꾸 났다.

내가 이렇게 자연 속에서 사색하며 고요함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이 된 것은 다 엄마 덕분이다.

어릴 때에는 산이 그렇게 좋지 않았다. 너무 힘들고, 맨날 가족 여행을 산으로 잡는 엄마가 이상하기도 했다. 여유롭지 않은 빠듯한 삶 속에서 엄마는 기어코 우리에게 소소한 여행을 선물해 주었었고, 당시에 어린 나는 그게 얼마나 소중하고, 눈물 나게 고마운 경험이었는지 알지 못했다.


  엄마의 젊은 날에 대해서 깊게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생각해 보면, 엄마는 본인이 하고 싶은 대로 한 것이 별로 없을 정도로 가족에게 헌신적인 삶을 살았을 것이다. 엄마가 나와 같은 시대를 타고났다면, 좀 더 다른 삶을 살 수 있었을 텐데...

  이번에 딸의 이혼을 슬프게 바라보면서도 내가 아플까 봐 당신의 아픈 마음은 끝까지 내색하지 않고 조용히 내 곁을 지켜주었던 엄마. 엄마의 조용한 응원에 나는 더 빨리 나 자신으로 돌아올 수 있었는지 모른다. 나는 엄마에게 왜 단 한 번도 내 이혼을 말리지 않았느냐고 묻지 않았다. 엄마는 내가 자유롭길, 진짜 행복하길 바랐던 거다.  


"엄마가 지금 같은 시대에 살았으면, 아빠랑 살았을 거야?" 장난스럽게 물어보자 엄마가 단호히 "아닐걸."이라고 한다. ㅋㅋㅋㅋ (지금은 그 누구보다 금실 좋게 지내면서!)

엄마 시대에는 생각하기 어려웠던 것들. 자신의 행복과 자유를 위해 혼자가 될 용기를 내는 것. 엄마는 내가 엄마처럼 살지 않길 바랐을 것이다.


  어린 시절의 내가 묻는다.

"엄마는 다시 태어나면 뭘로 태어나고 싶어?"

"새"

  아주 어린 나의 질문이었고, 엄마는 지금 기억도 못할 대답일지 모르겠지만, 웬일인지 이 대답이 지금까지 내 머릿속에 남아있다.

그때의 엄마는 자유롭게 훨훨 날고 싶었는지 모른다.


  뉴질랜드 루트번에서 엄마는 행복해했던 것 같다. 산장에서 꿀꿀이 죽을 끓이며 웃고 있던 엄마의 조용한 옆모습. 믹스커피 한 잔을 들고 호수 옆에서 사색하던 엄마의 모습이 그립다.

  엄마가 좀 더 행복했으면 좋겠다. 좀 더 건강하고, 좀 더 자유로워지길 바란다. 한국에 돌아가면 엄마랑 어디 좋은 산책 길에라도 다녀와야겠다.


뉴질랜드 루트번에서... 엄마와의 추억이 담긴 곳




  Welcome center에 도착하여 트레킹을 끝낸 그지꼴의 다국적 외국인들과 함께 셔틀버스를 기다렸다.

셔틀버스는 영화 매드맥스 : 분노의 도로연상케 하는 모래바람을 일으키며 달려 우리를 터미널에 내려주었고, 그곳에서 우리는 다시 Puerto Natales로 돌아갈 수 있었다.


  다치지 않고, 건강하게 돌아올 수 있었던 우리의 3박 4일을 축하하며 조촐히 맥주 한잔을 마셨다.  

  온이는 너무 힘들어서 울고 불며 3박 4일을 보냈고, 이제 다시는 이런 트레킹은 가지 않겠다고 단언했지만 한국에 가면 등산은 그래도 쫌 다녀보고 싶단다. ㅎㅎㅎ 조금이라도 산을 좋아하게 되었다니... 영업 성공!

  

웰컴 에그를 굿바이 식사로 볶아먹음


  이제 내일은 아르헨티나로 넘어가는 날이다.

엘칼라파테로 넘어가 빙하투어도 하고, 엘찰튼 마을에도 가볼 것이다.


  하루하루가 기대되는 여행의 길에 서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꿈같은 나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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