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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개 Jun 08. 2024

12. 여기는 파타고니아, 바람아 불어라!

2024. 3. 11 Puerto Nateales->El calafate

  버스를 타고 아르헨티나로 국경을 넘어가는 날이다.

버스는 거의 냉장고였다. 너무 춥길래 에어컨을 틀어놓은 줄 알았고, 버스 운전기사 아저씨가 추위를 못느끼는 병에 걸린 줄 알았다. 알고보니, 방풍이 잘 안되었던지, 바깥의 차가운 바람이 버스 내로 그대로 들어와서 추운거였다. 덜덜떨며 동태가 되기 직전 아르헨티나 국경에 도착했다.

  입국절차는 아주 간단했다. 짐 검사도 없고, 여권만 보고 그냥 통과다.

  "Bienvenido!" (환영합니다!)




  엘칼라파테의 첫 인상은 황량함. 거친 자연 속에 자라난 시골마을의 느낌.

하얀 눈이 꼭대기를 덮고 있는 뾰족뾰족 멋진 산봉우리들이 둘러쳐진 이 시골 마을에는 높은 건물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바람이 주기적으로 세차게 불며 건조한 모래바람을 일으키는 매력(?)이 있는 마을.

  바람이 세게 불어서인지 유리창이 깨져있는 승용차들을 자주 볼 수 있었는데, 유리가 없이 그냥 다니는 차도 있고, 깨진 유리창을 청테이프로 칭칭 붙여서 다니는 차들도 여럿 보았다. 이런 원초적인 매력! ㅋㅋㅋㅋ


황량하고 척박한 느낌이 강하지만, 그것이 매력적인 이곳!


  이 곳에 있는 며칠간, 우리는 파타고니아의 명물이라는 바람을 제대로 느낄 수 있었다.

바람이 불어 머리채 잡힌 듯한 나무들의 모습도 불쌍하지만 재미있었고, 아르헨티노 호수 옆을 걸을 때는, 바람이 너무 불어서 무슨 싸이월드 비공개모드 (나이를 가늠할 수 있는 대목2) 처럼 모자에 썬글라스에 마스크까지 착용하지 않으면 모래 먼지를 뒤집어쓰기 십상이었다.

이 곳 여자들은 나풀거리는 치마는 평생 입지 못하겠구나... 패션 산업이 발달할 수는 없겠군! 하는 쓸데없는 걱정도 들었다. ㅋㅋㅋ


바람에 머리채 잡힌 나무들


  이런 강풍 때문에 이곳의 나무와 풀들은 뿌리가 아주 깊다고 한다. 파타고니아 지역에 가까워질수록 더 깊어진다는데, 척박한 자연에 적응하는 생물들의 이야기는 언제 들어도 경이롭다.

저렇게 머리채를 잡히면서도 뽑혀나가지 않으려고 뿌리를 내리는 나무들. 멋지다!!

  나도 왠만한 시련에 머리채를 잡혀도 꿈쩍 하지 않을 수 있는 심지가 깊고 단단한 사람이 되고싶다~!! (파타고니아 나무에 갑분 의미부여)




  오늘 우리가 할 일은, 빨래, 빨래, 그리고 빨래!!!

4일간 비맞고 땀에 젖은 옷을 안빨고 계속 입으면 옷에서 냄새가 날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처음 알았다. (그걸 해봐야 아니?) 정말 운이 좋은 우리는, 숙소에서 걸어서 5분거리에 세탁소가 있었고, 그곳에 당장 빨랫거리를 들고 갔다. 저녁에 찾으러 갔더니 웃으며 잘 빨아진 좋은 냄새 나는 옷을 돌려주신다. 숙소에 와서 확인해보니 남의 양말 3쪽 (모두 다르게 생긴 3쪽)이 들어있고, 내 양말 1쪽이 사라졌다. ㅋㅋㅋㅋ 이런 신박한 실수가 다 있나! 어떻게 이럴수가 있었을까? ㅎㅎㅎㅎ

  다시 돌아가 양말 4쪽을 보여주며 3쪽은 내것이 아니고 1쪽은 내껀데 나머지 한쪽을 돌려주세요 라고 손짓발짓을 했고, 할아버지는 "아아~~~" 하며 바로 내 양말을 찾아주신다. 아니 어떻게 저 많은 세탁물 중 내 양말이 어디있을지 아신거지? 신박한 실수와 신박한 해결을 보며 자꾸 웃음이 났다.


액자같이 예쁜 view를 선사하는 우리 숙소
숙소 앞 세탁소
빨래 맡기고 신난 자


  오늘 우리가 할 일 두번째, 환전!!

  아르헨티나의 경제상황이 좋지 않아, 최근 물가상승률이 높고, 화폐단위가 낮아 현금 사용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실제로 환전을 해보니, 진짜 심각하다.

지폐의 최고단위가, 우리나라로 치면 천원이다. 그래서 100장 한 묶음을 지불해도 10만원인 셈이다.

  예전에 경제 공황이 심한 베네수엘라 같은 나라에서는 돈으로 장판 깔고 벽지도 바른다는 우스갯소리를 들은 적이 있는데, 아르헨티나도 근접해가고 있는걸까? 안타까웠다.


밥먹고 돈 한뭉탱이 내고 나오는 경험 가능




  내일 있을 빙하투어를 위한 점심 간식을 사고, 점심겸 저녁을 먹고, 동네를 산책하며 여유로운 하루를 보내본다.

  이제 과거 슬픈 일상에서의 나는 많이 사라졌다. 다른 집중 할 일이 없으면 여지없이 떠오르던 난폭한 기억들이 나를 할퀴고, 그 기억에서 도망가고 싶어 매일을 견뎌내듯 살았던 지난 날이 아주 먼 옛날의 일처럼 느껴진다. 이젠 머리에 생각이 비어도 악몽이 계속 떠오르진 않는다. 일부러 생각해내지 않으면 생생하게 피부에 느껴지진 않는다. 애쓰지 않아도, 머릿속은 행복감이 더 크게 채워져있다.

  이곳, 남미에서의 나. 매일이 기대되고 신나는, 몸은 피곤할지언정 정신은 맑게 깨어있는 웃는 얼굴의 내가 멋지다고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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