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모시겠습니다 vip님
매일의 비행에는 각자의 ‘듀티’가 주어진다.
비행 전 날 저녁 7시에 그날의 팀장이 부여한 ‘듀티’를 확인하고 그에 맞게 준비해서 비행에 임하게 된다.
클래스(이코노미, 비즈니스, 퍼스트), 담당 구역, 그리고 특수 임무까지 전 날에 결정되기 때문에 모든 듀티에 숙련되지 않은 시절에는 성적표를 기다리는 것 같은 두근거리는 맘으로 7시에 내 듀티를 확인하고 그에 맞게 공부해야 했다.
그중 모두가 부담스러워하는 듀티는 아무래도 ‘밀 체크’이다.
비행기에 실린 식사를 책임지고 확인하고 ’ 스페셜 밀(종교식, 어린이 식, 채식 혹은 제한식 등등)을 체크해야 한다. 장거리일 경우 식사가 두 번에 스낵까지 실리고 서비스 용품까지 모두 체크해야 하는 것이 ’ 밀 체크 담당 승무원‘의 할 일이기 때문에 부담감이 상당하다.
내가 비즈니스 근무를 하던 때에 지상에서 손님들 탑승을 돕고 이륙 준비를 한 뒤 내 담당 점프싯(이착륙 시 승무원이 앉는 좌석)에 앉았다. 그날의 점프싯은 이코노미 석에 있어서 나는 이륙할 때에 이코노미 석으로 갔는데 옆 자리에 앉은 후배 승무원이 그날 밀체크 담당이었다.
땀이 송골송골 맺혀서 상기된 그녀는 ”선배님. 연차가 쌓이면, 밀체크 잘할 수 있겠죠? 저 잘 체크한 거 맞겠죠? 진짜 너무 떨려요. “ 라며 처음 본 나에게 긴장을 쏟아냈다.
그날의 식사를 책임진다는 일은 생각보다 많이 부담스럽다. 비행기가 이륙을 하고 나면 ’ 잘못 체크했어요, 더 주세요 ‘가 안 되는 수습 불가의 공간이기 때문에 실수 없이 잘해야 한다는 압박이 너무 크다. 또 일반식이 아닌 대체될 수 없는 ’ 스페셜 밀‘일 경우는 길게는 열 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손님을 굶길 수도 있는 일이기에 특히나 더 부담된다.
그 긴장감을 너무나도 공감하고 여전히 나에게도 어려운 것이어서 나는 웃으면서 그렇게 말했다.
“밀 체크는…. 저한테도 어렵고 긴장돼요. 다만, 안 긴장한 척할 수 있는 스킬이 생길 뿐이에요.”
다른 이는 어떨지 몰라도 나도 불안도가 높고 긴장을 잘하는 편이라 그렇게 말해주었다.
나도 여전히 떨면서 일을 하지만 안 떨고 있는 척할 수 있는 ’ 능력‘이 생겼으니까.
그리고 내가 안 떠는 척을 해야 다른 이들이 안심하고 본인의 일에 집중할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됐다.
사실 그 ’척‘이 어찌 보면 경험을 통해 나올 수 있는 게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본다.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너무 경험이 없을 때엔 내 긴장감과 불안이 오롯이 드러나기 마련이니까.
문득 이 날의 대화가 자주 떠오르는 요즘이다.
아이와 둘 만 있다가 아이를 울리는 때가 종종 생긴다.
며칠 전엔 혼자서 아이를 씻겨야 하는데 목욕 시간에 가까워서 아이가 똥을 쌌다. 똥을 치우고 또 새 기저귀를 입혔다가 얼마 안 있어 목욕을 시키자니 귀찮아서 아예 이 참에 목욕까지 시켜야지 하는 생각으로 급히 목욕 준비를 했다. 목욕통에 물을 담아야 하지만, 혼자이고 애가 용변도 봤으니 아이를 세워서 씻길 수 있는 샤워 핸들(아이 팔을 끼워 아이를 고정시켜 세운 뒤 샤워기로 샤워를 시키게 하는 편리한 도구이다)에서 씻기기로 맘먹었다.
사두고 별로 사용해 본 적이 없지만 저녁이 되니 그냥 모든 걸 빨리빨리 해치우고 얼른 아이를 재우고 싶던 맘이 컸다.
‘하면 되겠지, 뭐. 저번에 남편이랑 써봤으니까’
옷과 기저귀를 벗기고 아이를 샤워 핸들에 세우고 나니 추운 날씨가 걱정되었다. 아이를 세워두고 뒤에서 샤워기를 뿌리다가 평소와는 다르게 화장실 문을 닫았다.
순전히 ‘추울 테니까..’라는 생각에.
아이는 나도 보이지 않는 데다 평소와는 다른 환경에 화장실 문까지 잠기자 공포에 질려 온몸이 빨개져서는 울기 시작했다.
그제야 아차 싶었다. 그때서야 아이의 공포가 이해가 됐다.
조금 익숙해졌다고 까불다가 나까지 허둥지둥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되어버린 것이다.
물에 젖은 아이를 안아 달래고 머리는 감기지도 못한 채 우는 아기를 다시 둘러업고 나와 급히 물기를 닦았다.
누가 봐도 ’ 저는 매우 당황했습니다. 멘붕입니다.’ 상태로 아이를 달래려니 아기도 좀처럼 진정이 되지 않았다.
요새 조금 익숙해졌다고 정석대로 안 하고 꼼수를 쓰다가 된통 당한 거다.
일을 할 때엔 식사 하나에도 큰 책임과 부담을 느꼈다면 지금은 아이의 하루, 매일을 책임지는 듀티를 부여받았다는 걸 다시 한번 떠올린다. 그리고 어찌할 바를 몰라 허둥대며 하루씩 소진되어 가던 신생아 때를 떠올린다.
그래, 요새는 좀 익숙한 척을 할 수 있게 됐다고 자만했나 보다. 생각해 보면 그래봤자 겨우 9개월 차, 경력 1년도 안된 신입 주제에 말이다.
원래 일을 좀 알 것 같을 때, 긴장이 좀 풀릴 이 맘 때가 가장 조심해야 할 때란 걸 나를 통해서도 후배들을 보면서도 익히 알고 있었는데.
다시 신입의 맘으로 돌아가서 긴장을 늦추지는 말되 선배처럼 아이 앞에선 긴장한 척하지 않는 노련한 육아를 해야겠다.
아이는 이렇게 오늘도 나에게 겸손을 가르친다.
허세 부리지 않고 잘 모시겠습니다.
나의 vip 손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