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인어사냥

나의 범위는 어디까지여서 어디서부터 잔인해질 수 있을까.

by 날나


도서명 : 인어사냥

글 : 차인표

출판사 : 해결책

출판 연도 : 2022.10.14

별점 : ★★★

난이도 : 보통

내 맘대로 한 줄 발제 : 나의 범위는 어디까지여서 어디서부터 잔인해질 수 있을까.


처음은 그저 우연이었다. 차인표님이 책을 쓴다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그다지 관심도 없었다. 이미 작가에 대해 선입견, 이미지가 있던 상태에서 그 사람이 쓴 책은 결국 그의 연장선이 아닐까 싶었다. 물론 실제 이미지일지, 그저 카메라 앞에 꾸며진 이미지 일지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그 사람이 쌓아온 이미지가 있고 거기서 벗어난 책을 쓰기는 어렵지 않겠나 싶었다. 그리고 크게 끌리는 이미지가 아니어서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있었는데.


일을 그만두고 나서 서점에서 책 구경한 게 너무나 오랜만이었는데. 정말 우연히 매대에서 이 책을 만났다. 자극적인 제목. 그렇지 않은 작가. 이런 제목으로 무슨 이야기를 썼을까. 그냥 가볍게 들고 몇 장 훑어봤는데, 잠깐 본 그 부분은, 약으로 먹기 위해 잡은 인어들에게 아이들이 이름을 붙여주고 정을 주는 이야기. 맙소사. 벌써부터 심란하다. 이 아이들을 어찌하고 이 인어들은 어쩌지.


내 머릿속 인어의 이미지는 이와이 슌지가 그려냈던 '월리스의 인어'. 이제 오래된 책이 되어버리고 전체적인 이야기도 잊어버렸지만 아직도 그때 충격이 생생하다. 정말 어딘가에 있을 것 만 같았던 인어. 인간과 별반 다르지 않지만 또 많이 달랐던. 인간은 이미 잡식이기 때문에 동물을 먹을수 밖에 없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먹어도 되는가. 인어는 먹어도 되는 종류인가. 못 먹는다면 그건 인간과 비슷하게 생겼기 때문일까. 의사소통을 하고 말이 통하기 때문일까. 생각을 하기 때문일까. '나의 문어 선생님'을 보고 나서는 문어를 과연 먹어도 되는가 싶었는데.


이미 제목도, 얼핏 본 내용도 머릿속에서 쉬이 떠나지 않는다. 분명 내가 힘들어할 종류의 내용일 것이 뻔해 쉽게 책을 들 수 없었다. 그냥 그런 책이 있구나. 볼까 말까를 괜스레 한참을 고민하게 만드는. 절대 편하게 볼 수는 없겠구나.


도서관을 드나들면서도 책을 들었다 놨다를 여러 번. 그러다 이럴 거면 빨리 읽어버리자는 생각에 들고 왔다. 들고 와서도 한참을 볼까 말까. 그런데 너무 궁금하다. 책을 한 번 읽기 시작하니 중간에 쉴 수가 없다. 그저 주르륵 끝까지 읽어 내려가는 수밖에.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이야기가 이어진다. 읽는 틈틈이 작가가 떠오른다. 전혀 안 어울리는 내용 같기도 하고. 너무 알려진 사람이어서 그런가. 중간중간 의아하지만 마지막에 가보니 의도는 알 수 있을 것 같다. 다 읽고 나니 조금 어울리는 것 같기도.


인간은 어디까지 잔인해질 수 있을까. 잔인하다고 할 수 있을까. 인어를 인간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아예 소나, 닭처럼 먹는 동물이라고 생각하면 괜찮지 않나. 먹는 동물에게는 잔인해도 되는 걸까. 어디까지 먹어도 되는 걸까. 요즘에는 먹는 동물에도 잔인하면 안 된다고 하지만 예전엔 그런 게 있었나. 어쩔 수 없이 먹어야 한다면 잔인함을 최소로 할 수 있어야 하지 않나. 인어는 사람인가. 어디서 봤는데 인종을 나누는 건 무의미하다고. 그저 인간이라고. 인어는 다른 인종인가, 다른 종인가.


딸아이가 죽을 병에 걸렸다. 오직 그 인어를 먹어야만 나을 수 있다는데. 생판 모르던 인어보다는 딸의 목숨이 먼저이지 않을까. 아버지는 결국 인어를 죽여야 하지 않을까. 세상 잔인하게 끓여서 인어 기름을 고아 내야 하지 않을까. 생명에 대한 존중과 자식에 대한 사랑. 어느 것이 우선일까. 이름을 지어주고 밥을 먹여 키우는 새끼 인어들은 이제 식구가 되었나.


꼭 인간과 동물 사이만 그런 것도 아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가지고 있는 범위가 다르다. 온 인류에게 범지구적인 공감을 하고 애정을 주는 이가 있는가 하면, 나 하나 앞가림할 정신도 없어서 바로 옆에 있는 가족에게도 공감을 못하고 외면하는 사람들도 있다. 다른 사람의 상황을 이해하는 것도 스스로에게 체력이 있고, 기운이 있고, 여유가 있어야 하는데 그게 그렇게 어렵다. 굳이 내가 타인을 신경 써야 하나 싶기도 하다. 나만 오래오래 잘 살면 되는 거 아닌가. 새끼 잃은 어미 인어의 마음을, 아비 잃은 새끼 인어의 마음까지 생각해야 하나. 게다가 그걸 먹으면 내 딸이 살 수 있어.


하지만 '그것'은 이제 '찔레'가 되었다. 영실이가 찔레를 어떻게 먹을 수 있을까. 혹여 먹일 수 있다 해도 영실이 살 수 있을까. 찔레가 아닌 다른 동물이었다면 상황이 나았을까. 영실은 똑같았을 것 같은데. 결국 인어가 아니어도 내 식구가 된 이상 어쩔 수 없지 않나. 그렇게 나의 범위가 넒어지기 시작하면 이제 어쩌지. 아무도 해하지 않고 살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혼자 살지 못하는 인간은 여러모로 도움을 받아야지만 살 수가 있는걸. 아무리 나무같이 살고 싶다고 이야기해도, 사람은 나무가 될 수가 없다. 차라리 나무였다면 좋았을 것을. 나무는 좋겠어.


왜? 강치는 안되고, 물고기는 되고, 인어는 안될까. 속이 답답하다. 인간은 어쩔 수 없나. 내가 직접 하지 않으면 상관없나. 직접 보고, 직접 하지 않아 나는 모르오, 하면 되는 걸까. 외면하면 없던 일이 되는 걸까. 계속 외면할 수는 있고? 상황이 되기 전까지는 말로는 무슨 소린들 못할까. 그 순간이 왔을 때 나는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내가 내 뜻대로 행동할 수는 있을까. 욕망에 눈이 멀지 않을 수 있나. 어디까지 감싸안을 수 있을까. 어디서 부터 냉정해지고 잔인해 질 수 있을까. 잔인할 필요가 없다면 더 좋겠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면. 덕무라고 그러고 싶었겠느냐고. 상황이 그를 그렇게 데려간 것 아니냐고. 아니, 그가 스스로 선택 한 걸 수도 있지.


상황이 오지 않길 바란다. 행동해야 하는 순간이 오지 않길 기도한다. 오래도록 무탈했으면 좋겠다. 그래서 이런 고민들을 안했으면 좋겠다. 내가 아닌 네가.



2025.07.25



35. 천 개의 질문 중 단 하나만 허락된다면 어떤 질문을 해야 할까? 단연코 '왜'라는 질문이다. '왜'는 목적이 아닌 동기를 묻는 것이고, 끝을 조준하는 것이 아니라 시작을 가리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왜'는 '너의 의도는 선하냐, 악하냐?'를 묻는 것과 같다.


73. 일상은 그저 그물코에 낀 바다 찌꺼기처럼 회한과 고독이 덕지덕지 붙은 보잘것없는 오늘의 나열이었다. 살면 살수록 외로워졌다.


130. 금방 헤어질 것에 정을 주면 안 되고, 금방 죽일 것에 이름을 지어 불러 주면 안 된다고 말이다. 이름을 부르는 순간 관계가 생기고, 관계가 생기면 사람처럼 대하게 되고, 사람처럼 대하면 잡아먹을 수 없기에 그냥 인어 새끼들, 혹은 물고기들이라고 부르라고 강권했어야 했다.


189. 죄를 짓고, 그 죄를 만회하기 위해 또 다른 죄를 짓고. 죄를 되풀이하는 동안 만들어진 굴레가 자신의 목에 저절로 채워졌음을 깨닫는 순간, 숨 막히는 좌절감이 엄습했다.


239. 서로가 서로를 바라보며 추하다고 느끼던 그 순간, 사람들은 상대가 품은 추한 욕망이 바로 나의 욕망임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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