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내 정체성을 이루고 있는 가장 핵심 기억은?
도서명 : 파친코
글 그림 : 이민진
출판사 : 인플루엔셜
출판 연도 : 2022.08 (재출간)
별점 : ★★★★
난이도 : 쉬움
내 맘대로 한 줄 발제 : 지금 내 정체성을 이루고 있는 가장 핵심 기억은?
-책을 읽고 나서 -
이 책을 처음 본 건 신간이 나오자마자. 아마 17년 18년도쯤이었다. 신간에서 어느 정도 판매가 일어나면 베스트평대로 이동하는데 이 책은 그만큼 판매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바로 외국소설 서가로 들어갔다. 그냥 새로 나왔다가 서가로 들어가는 많은 책들 중 하나였는데 유독 눈에 띄었다. 한국 저자인 거 같은데 외국 소설? 그리고 신기한 건 이 이상한 책은 꾸준히 새로 입고되었다. 책이 판매되는 순간을 볼 수는 없지만 새로 입고되는 도서들을 정리할 때 얼마간에 한 번씩 꾸준히 포함되어 있는 걸 보면 이건 그래도 서가 책 중에 잘 나가는구나! 왜? 광고도 안 한 책인데 어디서 이 책을 발견하고 보게 되는 걸까. 그렇다고 이 책을 찾기 위해 문의를 하는 사람도 없었다. 그저 조용히 서가에 있었고 있으면 판매되었고 또 들어오고를 반복했다. 그리고 더 이상했던 건 평대에 내놓는다고 나가는 책도 아니었다. 아는 사람만 찾는 그런 책인가. 그러다가 시간이 흘러 이 책이 드라마화된다는 기사를 보았다. 사실 조금 뜻밖이었다. 초베스트도 아닌데 왜? 그러면서 해당 도서는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기존 출판사인 문학사상에서 출간된 도서가 절판이 되면서 새 출판사 인플루엔셜에서 재 출간될 때까지 품절 상태. 찾는 사람은 많지만 책이 없어서 팔 수가 없는 시기가 몇 개월 정도 지났다. 물론 나는 그런 이슈가 있다고 책을 사진 않는다. 다만 신기했다. 이런 책도 있구나. 호기심은 생겼지만 그저 기억에 갈무리해 뒀다. 직장 다니는 워킹맘이라면 책을 본격적으로 읽기 쉽지 않다.
빌렸던 책을 반납하러 간 스마트 도서관에 1권이 있었다. 도서관은 본디 1권이 잘 있기 힘든 구조다. 모두들 호기롭게 1권을 빌려 가지만 모두가 계속 읽어 내려가진 않는다. 이런 건 보일 때 바로 빌려오지 않으면 다음에 다시 만나기가 어려운 편이다. 하지만 쉽게 손이 가지 않는다. 익숙하지 않은 '파친코'라는 제목이 왠지 책 내용도 쉽지 않을 것 같다는 인상을 준다. 그리고 약간 난해한 표지도. 어려운 책은 소설이라도 잘 넘어가지질 않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빌린 책을 마냥 쳐다보고만 있을 수는 없는 법.
아. 재미있다. 문체가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이다. 나는 글을 쓸 때도 읽을 때도 짧고 간결한 걸 좋아한다. 있어 보이게 말하는 것보다 상대방이 알아듣기 쉽게 이야기하는 편을 선호한다. 젠체하는 걸 싫어한다. '파친코'를 읽었을 때 첫인상은 생각보다 잘 읽히고 재미있었다. 번역을 한 책인 것 같은데 번역가의 문체일까. 여하튼 쉽고 편안하게 읽히는 책이었다. 그리고 '대지'가 생각나는 책이다.
'대지'는 3대에 걸친 이야기이다. 이민자는 아니지만 중국에서 가난한 농부가 근면 성실하게 부자가 되어 그 자식의 자식들 이야기까지 3부작으로 알고 있다. 1부 왕룽의 이야기 밖에 읽어 보지 않았지만 비슷한 기분이다. 근면 성실한 사람을 좋아한다. 그래서 이 주인공들이 해피엔딩이길 계속 바란다.
어디든 아버지와 어머니의 성정은 단단하고 흔들림이 없고 그게 자식세대 손자 세대까지 전해지기는 쉽지 않다. 내 마음대로 자라지 않는 건 내 자식뿐만은 아닌 것 같다. 독립적인 인간으로 자라기 위해 지켜보고 응원해 줘야 하는데 실상은 구속하고 통제하고 내 맘대로 키우려고 하고 있는 건 아닐까. 아이들이 자라면서 하는 선택들이 내 마음에 차지 않는다 해도 그건 그 아이들의 인생이니까 인정하고 존중해 줘야 하는데 어렵다. 너무 어렵다. 끊임없이 잔소리를 하고 일을 그르치기 전에 올바른 길을 제시해 줘야 하고 아이들은 따라줘야 할 것만 같다. 하지만 내 마음대로 통제하다가는 나중에 엄마가 시키는 대로 컸는데 엄마가 책임져!라는 소리밖에 못 듣겠지.
'파친코'는 누구의 이야기일까. 훈이 부모님이 훈이를 낳아 양진과 결혼을 시키고 소중한 딸 선자를 낳았다. 선자는 일본에서 노아와 모자수 두 아이를 낳았고 그 아이들의 아이들까지 일본에서 나고 자란다. 어디서 어디까지가 한국인이고 어디서부터 일본인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사람의 정체성은 어디에서 생겨나는 걸까. 이 사람이 한국인인지, 일본인인지가 그 사람을 설명하는 중요한 키워드인 걸까. 내가 그런 상황이 아니어서 그걸 쉽게 생각하고 있는 게 아닐까. 책은 읽어 내리기 수월하지만 마음이 편안하지는 않다. 누군가의 인생은 그 사람의 선택이 아닌 어쩔 수 없는 일들의 연속일 수도 있었다. 어쩔 수 없는 일. 어디서 태어났는지, 누구의 자식인지에 따라서 선택할 수 있는 일들의 제약이 있고 그래서 어쩔 수 없었어라고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내가 선택할 수 없다면 나의 정체성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노아가 이해가 될 것 같으면서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내가 노아였다면 어떻게 했을까. 노아의 그 마지막 선택이 노아의 정체성을 설명해 주는 걸까.
등장인물들은 모두 각각의 색을 가지고 있다. 각자의 자리에서 치열하게 고민하고 선택하고 있었다. 하지만 마지막은 결국 파친코다. 아마 그 가족들이 그 사회에서 스스로가 할 수 있는 가장 근면하고 성실한 일을 찾았던 것뿐이다. 하지만 그 일은 일본에서 좋게 보이지 않고 오해받기 쉬운 일이었다. 그 사람이 올바른 사람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조선인이고 조선인을 배척하는 나라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을 것이다. 만약 선자가 일본이 아닌 미국이나 중국으로 갔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러면 일본으로 간 것보다 더 나은 선택이라고 할 수 있었을까. 조선에 그냥 남기로 했다면 그것은? 그 선택조차 사실 그때 선자가 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이었다. 나였다면 어떻게 했을까. 내가 그 시절을 살았더라면 굳은 마음으로 단단하게 자식들을 키울 수 있었을까. 무너져 내려서 되는대로 살게 되었을까. 필요 없는 가정이지만 가끔 그런 가정을 할 때면 참 다행이다 싶다. 그리고 나는 지금을 살면서 내가 할 수 있는 선택들을 쌓아가야지. 나의 정체성은 남이 주는 걸까 내가 만들 수 있는 걸까. 지금 시대라면 내가 만들 수 있는 게 아닐까. 최소한 그때보다는.
작가가 처음으로 쓴 소설은 '파친코'가 아닌 '백만장자를 위한 공짜 음식'이라고 한다. 미국 이민자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두 번째 책이 '파친코'. 이것도 일본 이민자라고 해야 하나. 선자를 기준으로 보면 이민자의 이야기라고 할 수도 있겠다. 다만 3세대, 4세대까지 와서도 이민자라고 할 수 있을까. 우리는 단일 민족이야,라는 마음이 강할수록 이민자와 외국인에 대해 경계와 배척이 심하다고 들었다. 우리나라는 어떨까. 우리나라는 그러지 않다고 할 수 있을까. 나는 또 어떻고. 아직 외국인이 많지 않다고 지나가나 보면 신기해하고 색안경을 끼고 있지는 않는가. 저 나라 사람들은 그렇지 뭐, 이런 생각을 가지고 외국인을 바라보고 있지 않는가. 이제는 우리나라에서 나고 자랐지만 외양이 한민족이 아니라고 한국말을 능숙하게 하는 걸 신기하게 보고 있지 않던가. 내가 소설 속의 일본 사람들과 다를 게 무어가 있지.
최근에 아이들과 인사이드 아웃을 다시 보고 나서 아들이 핵심 기억이 꽤나 인상 깊었었나 보다. 어느 날엔가 자기 핵심 기억이라면서 차 타고 지나가면서 보았던 아파트 풍경을 이야기했다. 그 기억이 꽤나 선명하고 시간이 많이 지났지만 기억이 난다면서. 이런 핵심 기억들이 모여서 아들의 정체성을 이루게 되는 걸까. 이런 사소한 기억들도 그런 역할을 하게 되는 걸까. 그때 그 풍경의 색과 그 속에 숨어있는 감정과 느낌, 시대상이 은연중에 남을지도. 그래서 엄마들이 기를 쓰고 아이들에게 체험과 경험을 시킨다고 데리고 다니는 지도 모른다. 다람쥐 쳇바퀴 같은 일상을 살면 그런 것들을 쌓을 수 없는 걸까. 나와 비슷 한 말투로 이야기를 하는 아이들을 보면 흠칫한다. 일상의 모든 것들이 아이들을 이뤄나가고 있다.
책의 마지막은 1989년이다. 내가 태어나고도 지난 시기. 지금 솔로몬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그때 선택을 후회하지는 않을까. 이제는 체념하고 인정하고 살고 있을까. 솔로몬의 자식은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지독한 인연이 그만 끝나길.
-책 속 내용-
1권_19. 무를 썩둑썩둑 썰고 있는대도 움직임이 없는 묵직한 소나무 도마 같았다.
1권_307. 너는 아주 용감해, 노아야. 나보다 훨씬, 훨씬 더 용감해. 너를 한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사람들 속에서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은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야.
2권_ 237. 우리에게는 조국이 없어. 삶은 솔로몬이 통제할 수 없는 일 투성이니까 적응해야지 내 아들은 살아남아야 해.
2023.11.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