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의 삶을 살기 위해 어떤 생각을 선택했었나?
도서명 :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글 그림 : 신형철
출판사 : 한겨레출판
출판 연도 : 2018.9.22
별점 : ★★★★★
난이도 : 나에게 좋음.
내 맘대로 한 줄 발제 : 나는 나의 삶을 살기 위해 어떤 생각을 선택했었나?
발췌 : https://blog.naver.com/nalmadana/223399192996
-책을 읽고나서
책은 읽을 책을 사는 게 아니라 산 책들 중에서 책을 읽는 거라고 했지. 아르바이트할 때는 한 달 벌어서 월급날이 나오면 10만 원어치 책을 사대기도 했고. 사놓고 안 읽은 책이 많으면서도 또 사고 싶은 책은 왜 이렇게 많은지. 그렇지만 이제는 안 읽고 쌓아두는 걸 알기에 도서관을 기웃거리는데 요게 또 인기 있는 도서는 항상 대출 중이다. 요즘 책을 읽은 지 너무 오래된 것 같아. 쇼츠를 보면서 머리는 바보가 되어가고 있고 안 되겠다 싶어서 다시 책을 기웃기웃.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18년, 19년 그 어디쯤이었던 것 같다. 신형철 님의 에세이에 온 마음이 쏙 들어가 버려서 그 안에 추천된 책을 샀던 기억. 그리고 읽지 않고 책꽂이 어딘가에 넣어뒀던 그만큼의 무책임함.
그런데 도무지 기억이 안 난다. 내가 어떤 책을 좋게 읽고선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을 샀는지. 책 하단에 일부인은 흐릿하게 19.02.11이라고 찍혀있다. 신형철 님으로 도서를 검색했지만 이렇다 할 책이 없다. 그리고 그즈음 이 책이 인기가 많아서 표지 갈이를 한번 했었는데? 기억을 뒤집고 헤집어서 결국 찾아낸 단서. 슬픔의 위안. 신형철 님의 책에서 슬픔의 위안을 발견했다. 역시나 나와 같이 이 책을 보고 찾는 사람이 많았던지 현암사에서 '슬픔의 위안'을 표지 갈이를 하며 다시 출간했다. 나는 표지 갈이 전 책을 살 수가 있었고.
다만 그렇다면 내가 읽었던 책이 사실은 '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이고, 그 책을 보고 읽어보고 싶어서 더 샀던 책은 ' 슬픔의 위안(론 마라스코) '이었던 것이다. 어떻게 책을 읽었으면서 그 내용을 잊은 게 아니라 읽었던 기억을 잊었을까.
책을 펴보는데 사이에 오래된 대출증이 나온다. 잘 보이진 않지만 2019년 1월쯤 빌려 본 듯. 그리고 아마 소장하고 싶어서 책을 구매하고 한 달 정도 후에 슬픔의 위안도 추가로 구매하게 된 듯. 매장에서 일할 때 위로가 필요한 MD가 있으면 내가 아끼던 이 책을 아낌없이 평대에 진열하고 소개해 주는 즐거움이 있었지. 그때 구상했던 생각 중에는 이렇게 메인 책이 있고 그에 나왔던 관련 콘텐츠( 책, 영화 등)를 주렁주렁 같이 진열해서 보여주고 싶었는데. 사람들은 생각만큼 안 궁금해했고 생각만큼 구매까지는 이뤄지지 않은 데다 나의 열정도 그만큼 크지를 못해서 생각만 하고 말았던 기억.
그렇게 책꽂이에서 거의 5년을 빛바래가다가 평온한 수요일 오전에 나한테 선택되어서 읽기 시작했다. 읽어 내려가기 시작해도 내용들이 도무지 다 새롭다. 하지만 소개되는 것들 하나하나 나도 보고 싶다. 나도 그것들을 보게 된다면 저자처럼 같은 사색을 아니면 비슷하게라도 할 수 있을까.
아마도 아닐 테지. 사색의 깊이는 각자가 가지고 있는 배경에 비례하기 때문에 아마도 일천한 나의 배경으로는 심오하게 생각하기가 어려울 테니까. 하나만 알면 하나만 보이지만 둘을 알면 최소한 셋은 보이지 않을까. 특히나 문학 쪽은 성경이나 신화, 혹은 고전들이 너무나 당연하게 기본 지식으로 알고 있어야 해서 미처 다 알지 못하는 나는 쉽게 페이지를 넘어가지 못하게 된다. 글자를 읽는 것과 문해 하는 것은 다른 영역이라지. 분명 눈으로 글자를 읽어 내려가는데 머리에 쌓이는 내용이 없다는 건 내가 글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리라. 그래서 다시 기억이 안 나는 부분부터 한 문장씩 꼭꼭 씹어야 한다. 그 꼭꼭꼭 씹는 게 생각보다 책 읽는 속도를 느리게 하는 것만 같아 처음엔 마음이 조급하지만 이렇게 책 내용이 하나도 기억이 안 날 바에야 씹어 먹고 소화도 시키고 기록도 남겨놔야 하지 않겠나.
확실히 최근에 쇼츠나 2배속의 동영상만 보다가 책을 읽기 시작하니 자꾸 머릿속에 다른 생각이 끼어든다. 책을 읽으면 생각이 확장이 된다더니 책과 상관이 있는 이야기, 없는 이야기, 얽혀있던 추억, 나의 상황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책을 읽으면서 이 생각들이 휘발되어 버릴까 봐 걱정이 되면서도 막상 책을 놓지 못하는 건 흐름이 끊길 것만 같아서. 얼마 전에도 책을 하나 읽다가 미처 완독을 하지 못했다. 책을 읽어 내려가기 힘든 책이었는데 그래서 중간에 한텀 쉬게 되면서 그 쉬는 시간이 길어지고 다시 책으로 돌아가는 길이 너무 힘들고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번 읽으면 끝까지 달려야지.
이 책은 나오는 작품들을 다 알지 못해도 읽는 내내 흥미로워서 손을 놓을 수가 없다. 저자가 수차례 이야기했던 문장 자체의 아름다움을 저자 스스로도 추구하고 있는 것 만 같다. 이야기하려는 바를 모를 것 같으면 친절하게 작품의 일부를 발췌해 주었고 그 정도로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겠지만 혹시 이해가 안 되더라도 신형철 님의 문장 자체도 읽는 맛이 있다. 다 기억하고 저장해 두고 싶은데 기록해두지 않으면 또 까먹고 말겠지. 소설이 '콘텐츠'가 아니라 '예술'이(135) 되기 위한 필요조건도 아마 같은 것일 테다. 쇼츠처럼 멍하니 보는 게 아니라 하나하나 꼭꼭 씹어 소화해야 하는 것도 같은 이유일 테고. 네이버에 글을 쓰는 건 아마 단순히 콘텐츠가 되고 말 테지. 사실 콘텐츠라도 될 수가 있을지 항상 고민한다. 이렇게 글을 남기는 게 의미가 있는 일일까. 이렇게 시간을 들일 필요가 있을까.
읽다 보니 드디어 아는 작품이 나왔다. 이방인. 내가 이 책을 읽고 독토를 해본 적이 있었는데 기록이 어디 남아있으려나. 전부터 일관되게 기록을 모으지 못해 없어진 게 수두룩이고 그나마 있는 것들은 여기저기 흩어져있다. 그래도 비교적 최근에 읽었으니까 찾을 수 있을 거야. 라며 뒤적이는데. 2019년도 메모장에 다행히 발췌 몇 개가 남아있고 같은 2019 태그에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도 남이 있었다. 아아. 기억은 사라졌지만 그래도 기록은 남아 있구나.
1. 킬링 디어
P.27 그러므로 인간이 배울만한 가장 소중한 것과 인간이 배우기 가장 어려운 것은 정확히 같다ㅡ 그것은 바로 타인의 슬픔이다.
P.28 아마도 나는 네가 될 수 없겠지만, 그러나 시도해도 실패할 그 일을 계속 시도하지 않는다면,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말이 도대체 무슨 의미를 가질 수 있나. 이기적이기도 싫고 그렇다고 위선적이기도 싫지만, 자두 둘 다가 되고 마는 심장의 비참.
2. 슬픔의 위안
3. 혜화. 동
P. 47 사건은, 그것을 감당해 낸 사람만을, 바꾼다.
P. 53 지배하는 사랑과 미성숙한 사랑의 공통점 중 하나는 저울을 사용할 줄 모르거나 사용하지 않으려 하는 데 있다.
4. 열두 겹의 자정
P.79 대신 메뉴판에서 한 끼의 식사를 고르듯 적당한 미소와 웃음을 골라 하루하루를 연명한다. 그것들을 코르크 삼아, 울음이 치솟는 성대를 틀어막는다.
5. 로베트 펜 웨런. 우리는 왜 소설을 읽는가.
"소설은 우리에게 우리가 원하는 것만 주지 않는다. 더 중요한 것은, 소설이 우리에게, 우리가 원하는지조차 몰랐던 것들을 줄 수도 있을 거라는 사실이다. "
6. 우리가 보낸 순간. 시 김연수 P.175
"아름다운 문장을 읽으면 당신은 어쩔 수 없이 아름다운 사람이 된다."
인간은 직접 체험을 통해서만 가까스로 바뀌는 존재이므로 나를 진정으로 바꾸는 것은 내가 이미 행한 시행착오들뿐이다.
7.
p.217 타인을 조롱하면서 느끼는 쾌감은 인간이 누릴 수 있는 가장 저급한 쾌감이며 거기에 굴복하는 것은 내 안에 가장 저열한 존재와의 싸움에서 패배하는 일이다.
P.265 그리고 가장 중요한 질문에는 원래 답이 없다.
P.264 인간은 의미를 잊고 살 수는 있어도 의미를 빼앗긴 채 살 수는 없다.
P.280 그래서 요령이 필요하다. 한 작가에 대해 신속 정확하게 알고 싶으면 일단 세 권의 책을 읽으면 된다. 데뷔작, 대표작, 히트작. 데뷔작에는 한 작가의 문학적 유전자가 고스란히 들어있기 때문에, 대표작에서는 그 작가의 역량의 최대치를 확인할 수 있기 때문에, 히트작은 그가 독자들과 형성한 공감대의 종류를 알려주기 때문에.
P.358 개인의 고유성은 그 사람이 사용하는 어휘와 어법에서도 생겨난다.
이번에 읽으면서 발췌하는 내용과 같은 것도, 다른 것도 있다. 같은 책을 두 번 읽는 건 읽을 때마다 새롭고 새로운 기분이 들게 한다. 과거의 나를 약간은 타인처럼 바라보게 되는 것도 있다. 그때 나는 그런 사람이었구나. 지금 나는 이런 사람이구나. 덜렁 발췌만 해놔서 어떤 생각인지 100프로 떠올리지는 못했지만 왠지 알 것 같다.
어쨌든 나는 아직 반밖에 못 읽었는데 확실히 5년 전 기록보다 이번에 읽었을 때 발췌하고 싶은 문장이 더 많다. 뭐가 달라졌을까. 뭐가 더 마음에 와닿았을까. 문장을 고르는 사람이 고른 문장이란. 본인이 직접 고른 문장뿐만 아니라 써 내려간 문장도 그냥 넘어가는 게 없는 것 같은데. 어릴 때 나는 잘 몰랐던 것 같기도 하다. 어릴 때 글을 끄적일 때는 날 것이 것이 좋았다. 생각을 수정 없이 써 내려간 그 글자들이 남들이 보기에는 서툴고 어수선해도 내 기분, 내 상황을 그대로 생생하게 드러내는 거라 믿었다. 하지만 이제는 한번 쓰고 나면 두 번 세 번 읽고 고쳐보고 하려고 한다. 물론 그렇게 고치기 시작하면 더 자연스럽고 부드럽게 읽히지만 어설픈 내 모습은 꼭꼭 숨겨져서 꼭 내가 아닌 것만 같다. 어떤 걸 남에게 보여줄지는 아마도 내가 선택하게 될 테고 그게 내 모습이 되겠지.
책은 총 5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슬픔, 소설, 사회, 시, 문화.
첫 번째 장. 슬픔은 책의 메인이기도 하고 인상적인 부분이 많다. 머리말에도 글을 모아보니 슬픔에 대한 글이 많아 따로 묶어내었다고 한다. 타인의 슬픔에 결코 공감할 수 없는 인간의 한계와, 그걸 극복하기 위한 노력에 대한 이야기라고 내 마음대로 줄여도 될까. 나의 슬픔도, 타인의 슬픔도, 오롯이 겪어본 사람만 공감할 수 있고 정확히 인식한 사람들만 위로를 해줄 수 있다. 그런 슬픔이라면 너무 슬플 것만 같다. 이 또한 나만의 슬픔일 수도 있다. 슬픈 사람들끼리만 공감하고 위로할 수 있는 슬픔이라니. 그럼 그 슬픔 밖의 사람들은 그 안에 들어갈 수 없는 걸까. 노력을 해본들 너는 모르잖아로 배제되어 버리는 게 아닐까. 이렇게 먼저 선을 그어 버리면 그저 남의 일 보듯 구경만 하고 있으면 되는 노릇인가. 그건 아닐 거라고 생각한다. 내가 너의 슬픔을 오롯이 이해할 수 없지만 그래도 너를 이해하려고 노력할 거야. 내 위로가 너에게 닿지 않더라도 나는 어깨를 빌려주고 싶어.
두 번째 장. 소설. 책을 읽으면서 저자의 문장 하나하나가 수집하고 싶었다. 문장 수집이라는 말이 있는데 정말이지 수집해서 진열해 놓고 싶다. 두 번째 장을 읽다 보면 이런 이야기를 한다. "159. 동어반복처럼 들리겠지만, 소설적인 문장은 '소설적인 문장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 속에서 고뇌한 흔적을 품고 있는 문장이다. " 저자가 좋아하는 소설도 그런 흔적이 남아있는 소설들이었고, 그 소설에 대해 이야기하는 문장도 하나하나 고심한 흔적이 보인다. 고심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그냥 글을 줄줄 써 내려가도 이렇게 좋은 문장을 쓸 수 있는 사람일까. 전자든, 후자든 부럽다. 나도 글 하나하나 쓰면서 깊이 생각하려고 하지만 그렇게 쓰면 너무 꾸며낸 것 같아서 또 거부감이 들 때도 있다. 쌩얼의 내가 아닌 꾸며진 나. 그게 보기 좋을 수도 있지만 내가 아닌 가짜인 기분.
세 번째 장. 사회는 읽기 조금 어려운 구석이 있다. 나는 항상 내 생각을 주장하는데 굉장히 소심하다. 최대한 내 생각을 안 들어내는 편이고 드러내게 되더라도 이리저리 돌려서 내 본심을 콕 찍어서 모르게 두루뭉술하게 넘어가고 싶어 한다. 그래서 점심을 다 같이 먹는 것보다 혼자 먹는 걸 선호하는데. 여럿이 점심을 먹으러 가는데 뭘 먹고 싶어 하는지 말하는 게 너무나 힘들다. 다른 사람이 정해주는 점심 메뉴도 물론 먹을 수는 있고 맞춰주는 게 문제는 아니지만 나도 먹고 싶은 게 있는데? 그럼 먹고 싶은 걸 말하면 되는데 그걸 다 같이 먹으러 갔다가 입맛에 안 맞으면 괜히 내가 속상하다. 게다가 입맛에 맞지 않아 하는 상대방을 보는 것도 힘이 든다. 그러니 진짜 내가 먹고 싶은 게 있다면 그냥 혼자 가고 점심 메뉴를 고를 때 내가 먹고 싶은 걸 이야기하는 모임은 굉장히 편안함을 느끼고 있는 곳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그래서 이렇게 자기주장이 드러난 글을 읽으면 조금 불편하다. 이걸 불편하다고 해야 하나 신기하다고 해야 하나 부럽다고 해야 하나. 다른 사람을 아예 신경 쓰지 않는 건 아니겠지만 자기 견해를 밝힐 수 있고 그걸로 글을 쓴다는 게 대단하다. 글 한 꼭지마다 글을 쓴 날이 적혀 있다. 보고 있노라면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진 않았지만 언제 무슨 일로 이런 글을 쓰게 되었는지 어렴풋이 알 것 같다. 확실히 알 수 있는 것들도 있고. 책이 나온 지 오래되어 글이 쓰인 날과 내가 요즈음 읽은 날까지 10여 년 정도가 지났건만, 아직도 여전하다. 여전하다고 밖에 이야기할 수 없는 게 슬프다.
네 번째 장. 시. 얼마간 시를 읽으려고 노력했다. 매장에 있을 때 한동안 시 열풍이 있었다. 열풍이라고 해도 시가 워낙 대중적이지 못한 분야여서 약하긴 했지만. 그래도 그즈음 인기 있는 시인들도 많아지고, 베스트셀러에 시집도 올라가기 시작했으며 대중적으로 읽히는 시들도 많이 나왔다. 그래서 몇 권의 시집을 구매하며 나도 시의 감수성을 느껴보자 했다. 물론 유명한 시 외에는 잘 안 읽히고 재미도 없었지만 그래도 시에 대한 문은 좀 열어 두게 된 것 같다. 개인적으로 고심해서 단어를 골라 글을 만든다면 시보다는 소설 쪽이 더 친절하게 만들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더 편하게 느껴지는 거겠지.
다섯째 장. 문화. 타자의 타자성이 사라지고 있다. 내가 남과 다름을 견디기 힘들어하고 나와 다른 남을 어려워한다. 모두가 다름이 없는 상태에서는 굳이 생각할 필요가 없어진다. 늘 하던 대로 선택하고 행동하게 되는데 과연 그게 의미가 있을까. 프로그래밍된 대로 흘러가는 삶. 각자가 가지고 있는 의미들이 다 달라야 할 텐데. 나는 매 순간 최선을 다해 다른 선택을 했을까. 그저 좀 더 편하고 익숙한 걸 선택하고 있는 게 아닐까. 평소와 다른 걸 시작할 때 무척이나 걱정되고 초조하다. 그리고 익숙한 선택을 하게 되면 결국 결말은 정해져 있는 거나 다름없지 않을까. 정해진 결말이 뭐일지 모르겠으나 살아가면서 의미를 찾을 때 나오는 결론은 아닌 것 같다. 정해진 필터를 통하지 않고 매번 다르게 변화를 줄 때 인생이 풍성해지고 재미가 있는 게 아닐까. 나이가 들수록 시간이 빠르게 지나간다고 한다. 이미 알고 있고 경험한 것들이라 전보다 더 생각을 안 하고 관성처럼 처리해 나가는 일들이 많아질수록 그 순간순간들이 기억이 나지 않기 때문에 그만큼 시간이 빠르게 느껴진다고 한다. 어릴수록 1년이 길고 끝없는 것 같지만 나이가 들수록 뭐 했는지도 모르게 1년이 지나갔다. 1년을 1년같이, 10년같이 살아내려면 생각을 하고 살아야 하는데. 생각하는 건 힘이 드는 일이라 그냥 놔두면 멍하게 지나가려 해. 남과 다르고 싶은데 눈에 띌까 봐 또 걱정이다. 과거의 나와 다르고 싶은데 너무 힘들어서 그냥 있고 싶다. 그러면 안 되는 걸 알면서 그러고 있는다.
나는 이 책이 참 좋다. 어떻게 읽는 내내 머릿속에서 생각이 생기는 거지? 책을 보다가 밥 먹는다고 유튜브를 틀어놓고 밥을 먹으면 그 생각들이 쏙 사라진다. 이래서 책을 읽는 건가. 무언갈 배우려고 할수록 내가 아는 게 별로 없다는 걸 깨닫는다. 사실 이렇게 생각나는 걸 다 적어 내려 가는 것도 좋은 글쓰기는 아닌데 어쩔 수가 없다. 오랜만에 생각이 줄줄이 비엔나처럼 엮어 나오는데 가만히 둘 수가 없다. 기록해 둬야지. 이번엔 책을 읽었던 기억을 잊지 말아야지.
이 책은 아래 문장으로 끝난다.
그러나 어떤 질문은
그것을 간절하게 묻는 것만으로도
인생을 조금은 달라지게 한다.
정말 나는 그렇게 되었다.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p427
-책 속 내용-
슬픔에 대한 공부 (슬픔)
19. 타인의 슬픔에 대해 ' 이제는 지겹다'라고 말하는 것은 참혹한 것이다. 그러니 평생 동안 해야 할 일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슬픔에 대한 공부일 것이다.
온 갖 슬픔이 가득한 세상에서 다른 사람의 슬픔을 위로한다는 것, 이해한다는 것이 인간의 근원적 무능력이라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지겨워하지 않는 것뿐일지도.
23. 가장 정확한 의미에서의 복수는 ' 같은 경험'을 인위적으로 생산해 내는 기획이다.
(....) 이것은 인간의 근원적 무능력, 즉 '타인의 슬픔을 똑같이 느낄 수 없음'이라고 요약될 그것과 관계하는 사태이기 때문이다.
나와 똑같은 슬픔을 경험해 봐. 그게 내 복수야. 하지만 사실 그런 복수를 실현시키려면 그만큼 공을 들여야 한다. 과연 그 사람에게 내가 그만큼의 공을 들일 가치가 있을까. 그러나 아무것도 모른 채, 이해하지 못한 채 하하호호 하는 그것을 보면 도무지 참을 수가 없다. 가장 큰 복수는 사실 무시하고 사는 거라 하지만 도무지 무시할 수 없을 때는 어떻게 하란 말인가. 내가 노력하지 않아도 복수가 된다면 그게 제일 좋을 텐데. 세상과 신은 그렇게 친절하지 않다.
25. 이 경우 타인의 슬픔은 내가 어떤 도덕적 자기만족을 느끼면 공감을 시도할 만한 그런 감정이 아니라, 오히려 나를 추궁하고 심문하는 감정이기 때문이다. 그 슬픔은 그것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나를 불편하게 할 것이다.
나로 인한 타인의 슬픔. 만들지 않는 게 제일 중요하지만 사람은 그조차도 노력하지 않고 생겨난 슬픔에 대해 놀라울 만큼 무감각하다. 처음엔 그렇지 않더라도 점점 무감각해진다. 지겨운 슬픔이란 없는데.
27. 인간이 배울 만한 가장 소중한 것과 인간이 배우기 가장 어려운 것은 정확히 같다. 그것은 타인의 슬픔이다.
내 슬픔이 마냥 제일 크지. 각자에게 가장 큰 슬픔이라면 혹시 공감할 수 있지도 않을까.
31. 우리는 정작 내 가족들의 고통은 무심하게 보아 넘기면서도, 비슷한 상황에 처함 사람들을 드라마나 영화에서 볼 때는 뜻밖에 펑펑 울기도 하는 것이다.
가족에게 참 냉정하다 생각했다. 나만 정이 없는 아이라 그런 게 아닐까 생각했다. 해피엔딩의 만화를 보고도 눈물이 나는데 왜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소홀한 걸까.
38. 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사람이 나를 위로할 수는 없다. 더 과감히 말하면, 위로받는다는 것은 이해받는다는 것이고, 이해란 곧 정확한 인식과 다른 것이 아니므로, 위로란 곧 인식이며, 인식이 곧 위로다. 정확히 인식한 책만이 정확히 위로할 수 있다.
나에 대해, 나의 상황에 대해 정확히 겨냥한 책만이 위로가 될 수 있다. 물론 그 책은 나를 겨냥하고 쓴 것이 아니고 어쩌다 보니 나를 겨냥하게 된 것일 수도 있다. 나는 대중적이고 흔한 사람인가. 작가가 특별하고 대단한 사람일까. 후자라라고 믿어본다. 하지만 내가 흔한 사람일 확률이 더 크겠지.
53. 지배하는 사랑과 미성숙한 사랑의 공통점 중 하나는 저울을 사용할 줄 모르거나 사용하지 않으려는 데 있다.
항상 저울에 내 마음은 조금 올려놓았는데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왕창 올라가 있더라. 그게 내 마음대로 계산적으로 되면 얼마 좋겠어. 사용하고 싶지만 그렇게 내 맘대로 되는 거면 내 마음이 아니지.
63. 오히려 그 덧없음으로 인해 아름다움의 가치가 더 증대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지 않은가?
봄날의 벚꽃이 흩날리면 그렇게 아쉽고 허무하다. 3월 말에서 4월 초에 꽃이 피기 시작한다. 내 기억에 중간고사 기간이 되면 흐트러지는 벚나무 밑에서 공부하는 척 소주를 마시고, 중간고사가 끝나면 꽃구경 가야지 했다. 그러나 여지없이 봄비에 꽃이 다 떨어지더라. 그렇게 봄비가 야속했는데. 그렇게 빨리 져버리는 벚꽃이 아쉽고 허무했는데. 어차피 내년에 다시 꽃 피리라는 것을 알지만 그 덧없음 때문에 꽃놀이가 예쁜 건지도. 벚꽃이 1년 내내 소나무 이파리처럼 나무에 튼튼하게 붙어 있으면 그때도 설마 꽃놀이를 갔을까.
70. 인간은 본래 슬픈 짐승이고 우리는 모두 슬픔의 식민지가 아닌가. 이런 생각에 저항하는 일이 요즘 내게는 예전만큼 쉽지가 않다.
생각에 저항하기. 저항해야 하는 생각과 저항하지 않아도 되는 생각. 저항하지 않아도 되는 생각에 저항할 필요가 있나. 그걸 어떻게 구분하지.
76. 그러니까 어느 편에서 봐도 이것은 너무 사랑한 자의 비극이다.
한 번도 에우리디케의의 입장에서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다만 그녀는 사랑만 받았다. 그녀가 한 일은 아무것도 없고, 다만 너무 사랑한 자의 탓이라니. 오르페우스는 제정신으로 살 수 있었을까.
78. 그런데 너무 오랫동안 울음을 참아온 그는 정작 자신이 그래왔다는 사실을 모른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것 중 하나는 자기 자신이 슬픔이라는 것을 잊어버린 슬픔이다.
눈물이 많은 건 어쩌면 너무 많이 알아서 그런 걸 수도 있겠다. 아니 내 일이 아니어서 슬퍼하는 걸지도. 감히 눈물을 흘려도 되는 걸까.
81. 늘 참지 않는 사람은, 늘 참는 사람이 참고 있다는 것을, 모른다.
중간이 없어.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나는 참는 사람인 것 같다. 최대한 나를 숨기고 보여주지 않을 거야.
92. '폭력이란? 어떤 사람/ 사건의 진실에 최대한 섬세해 지려는 노력을 포기하는 데서 만족을 얻는 모든 태도.'
이 책의 가장 와닿던 부분 중 하나. 종종 나도 다른 사람, 상황들에 쉽게 판단하고 이야기를 한다. 넌 그런 사람이지, 난 이런 람이야. 이런 게 아닐까. 내가 그 사람의 인생을 다 아는 것도 아닌데 저런 사람이구나 쉽게 생각하고 쉽게 가까워지거나 더 쉽게 멀어지려고 한다. 그런 것도 모두 폭력의 일종이었다. 노력을 하지 않고 쉽게 만족을 얻으려고 했다. 이해하려고 노력하지도 않았다. 너는 그런 사람이니까.라며 그냥 그래, 그렇게 살아라고 했다. 한동안은 혈액형 타입이 유행했다. A형이라고? 어쩐지 소심하더라니. INFJ라 그런가 생각하는 게 특이하네. 그럴 줄 알았어라고 했던, 그 모든 생각들이 폭력일 수 있다. 내가 그런 식으로 평가받고 판단되는 것은 그토록 싫어하면서 상대방을 쉽게 유형화 시키려고 했다. 그게 세상을 이해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그게 폭력이었다. 좀 더 섬세해져야겠다. 만족을 쉽게 얻으려고 하지 말고 진실에 다가가자. 다가가면 잡히긴 하는 걸까. 진실은?
삶이 진실에 베일 때 (소설)
117. 어딘가에 단편소설은 삶을 가로지르는 미세한 파열의 선 하나를 발견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고 썼었다. 삶의 어딘가에 금이 가고 있는데 인물들은 그것을 모른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되고 나서야 그들은 파열을 깨닫는다.
문득, 내가 모르는 파열의 선이 있을까 걱정이 된다. 내가 앉아있는 거실에, 등굣길에. 미세해서 눈에 보이지도 않는데 그 금은 점점 커져서 돌이킬 수 없는 순간이 올까. 내 인생은 소설일까. 그냥 무난무난하게 버티면 지나갈 일들일까. 높낮이가 없다고 실망할 게 아니라 그런 파열선이 생기지 않아 다행이라고 가슴을 쓸어내려야 하는 게 아닌가. 좀 더 재미있게 소설 같은 삶을 살고 싶다 생각했는데 문득 그게 좋은 일이 아니란 생각이 든다. 소설이 아닌 그냥 평범한 삶을 살아내고 싶다.
120. 내가 타인을 보는 곳 말고 타인이 나를 보는 곳으로 가기. 거기서 내 눈을 버리고 타인의 눈을 얻기. 그리고 마침내 그 타인의 눈으로 나를 보게 되기.
낯설게 나를 바라보기는 쉽지 않다. 생각도 시선도 일부러 바꿔야 하는데 할 수 있을까.
125. 우리는 자유롭다고 믿는 순간 바로 그 믿음에 갇힌다.
가끔을 글을 쓰면 그 글에 갇히고야 만다는 생각은 든다. 말에는 힘이 있고 글을 더 힘이 세다. 글로 남겨놓은 것들이 나중에 나를 옭아매는 순간이 오고야 말 것 같다. 그것이 걱정되지만 생각하지 않고 쓰지 않을 수가 없기 때문에 적을 거리를 찾게 된다.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도 쓰지만 그래서 정형화된 생각에 갇혀버렸다. 쓰면서 갇히지 않을 수 있을까. 쓰면서 자유롭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이미 자유롭지 않은데 자유로움은 어떻게 믿는 거지.
128.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고, 진실을 알아내고, 그것을 후세를 위해 보존해두려는 욕구" (조지 오웰. 나는 왜 쓰는가)
너무 많이 보존되고 있다. 내 가공되지 않은 생각들을 가공시켜서 어쩌면 상대방이나 후세에 그 의미가 곡해될 수도 있음에도. 그래도 우선 안 하는 것보다야 하는 게 낫지 않겠나. 말을 함부로 하면 안 된다고 하는데 함부로 글 쓰고 있는 게 너무 많다. 그건 좀 걱정인데.
159. 동어반복처럼 들리게지만, 소설적인 문장은 '소설적인 문장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 속에서 고뇌한 흔적을 품고 있는 문장이다.
책 전체를 통틀어서 스스로 자신의 문장이란 무엇인가를 고민하면서 글을 쓰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발췌한 글들도 그에 대해 저자가 쓴 글들도 다른 책들보다 남겨놓고 싶은 글들이 많다. 어릴 때는 번역본이나 우리나라 책 들이나 상관없이 읽어댔다. 하지만 어느 순간 알아차렸다. 우리나라 작가가 쓴 글은 번역 글보다 훨씬 더 예쁘고 고민을 했을 거라는걸. 물론 번역본들의 원서들도 그 원서의 정서에 맞게 고민해서 쓴 거겠지만 번역의 과정에서 그 고민들을 모두 되살리기란 쉽지 않았을거다. 그래서 노벨 문학상에 한글 책이 오르기 쉽지 않은 것도 번역 때문이란 말도 있지 않은가. 여하튼 이후로 번역본을 읽는 것에 많이 주저했는데 그때 이후로 때마침 책 읽는 절대량도 후욱 줄어 버려서 여간 아쉽다. 좀 더 일찍 깨달았다면 많은 걸 배울 수 있지 않았을까. (대왕핑계쟁이)
169. 소설은 실험실이고 작가는 실험한다. 그리고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그 실험 보고서의 인식적 가치다.
소설을 써보고 싶었다. 조금 쉽게 생각한 것도 있다. 그저 글을 쓰고 소설이라고 이름 붙여주면 되지 않을까. 내가 무얼 원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어쩌면 실험하고 싶은 대상이 없는지도 모르겠다. 실험실이고 실험 자도 있는데 대상이 없다. 대상이 있어야 실험하고 보고서를 쓸 게 아닌가.
173. "소설은 우리에게 우리가 원하는 것만을 주지는 않는다. 더 중요한 것은, 소설이 우리에게, 우리가 원하는지조차 몰랐던 것들을 줄 수도 있을 거라는 사실이다." (로버트 펜 워런. 우리는 왜 소설을 읽는가. )
일할 때 자주 듣던 말인데 고객의 니즈 needs가 아니라 원츠 wants를 찾아서 채워줘야 한다고. 당신도 모르는 당신의 그 무언가를 개별적으로 찾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데이터가 나오고 그래서 당신은 아마 이걸 좋아할 거야,라며 구글은 내게 추천을 해대는 거겠지. 그럼 구글은 하나의 소설인가. 추천 목록을 보자면 소설을 하나 엮어낼 수도 있겠다.
175. "아름다운 문장을 읽으면 당신은 어쩔 수 없이 아름다운 사람이 된다. "(김연수. 우리가 보낸 순간. 시)
욕을 안 한다고 아름다운 사람이 되는 건 아니겠으나 욕을 함으로써 느껴지는 보잘것없음을 피할 수는 있겠다. 욕을 한다는 건 어디서 욕을 들었기 때문이겠지. 아예 안 들을 수는 없겠지만 보다 더 많이 좋은 글을 읽는다면 내뱉는 말들도 내뱉지 않고 좀 더 생각하고 고민하고 이야기하게 될 수 있을까. 요즘 식단 하면서 자주 보는 먹는 게 그 사람이 되듯이. 냉장고 속의 음식들이 내가 되는 거고 책꽂이의 책들이 내가 되는 거고, 내가 소비하는 것들이 또 내가 되는 거겠지. 결국 인풋이 좋아야 아웃풋이 좋아지고. 그래서 맹모삼천지교가 되는 걸까. 나도 어쩔 수 없이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
176. 간접 체험으로서의 문학은 다만 나의 실패와 오류와 과오가 어떤 종류의 것이었는지를 '파악'하는 데 도움을 주기는 할 것이다. 그러나 피 흘릴 필요가 없는 배움은, 이 배움 덕분에 내가 달라졌다고 믿게 할 뿐, 나를 실제로 바꾸지 못한다.
그냥 왜 틀렸는지 알겠는데 나중에 시험을 보면 또 틀리겠지. 직접 풀어봐야 알아. 내가 공부할 때 가장 좋아하는 방식은 그냥 보는 게 아니라 빈 종이에 아는 걸 다 써 내려가는 것. 모르는 건 모른다고 적어 두기.
그래도 우리의 나날 (사회)
185. 멜랑콜리 자체가 나르시시즘이기 때문이다.
한때 굉장히 멜랑꼴리하던 시절이 있었는데 그때 나는 나르시시즘이었었나. 그때는 그런 기분인 줄 몰랐는데 지금 보니 그때가 멜랑꼴리했던 때인 것 같은 느낌.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 그 어디쯤엔가.
188. 오늘날 '미성숙한' 인간이라 불리는 이들이 결여하고 있는 것은 지성이 아니라 감수성이기 때문이다. 성숙한 인간이 갖고 있는 감수성이란, '젠더 감수성'이나 '인권 감수성'이라는 개념에서 그 용례를 찾아볼 수 있는 것처럼, 사람과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들을 이해하고 행여 그것에 대한 잘못된 지식/믿음이 '차별'의 근거로 작동할 수 있는 상황을 예방하거나 비판할 줄 아는 민감함을 의미한다.
차이가 차별이 되지 않도록 민감하게 살펴보기. 그러한 노력을 하지 않으면 폭력이 될 테지.
191. 타인에게 열려 있는 통각이 마비돼 있거나 미발달된 이들이 하는 정치는 우리를 고통스럽게 한다.
정치는 개인보다 더 영향력이 있어서 더 예민해야하는데.
202. 인간은 자신이 잘 모르는 고통에는 공감하지 못한다. 그것은 우리 모두의 한심한 한계다. 경험한 만큼만, 느껴본 만큼만 알 수 있을 뿐이다.
위에 이야기했던 슬픔과 비슷하다. 자신이 잘 모르는 고통에 공감하지 못하고, 슬픔은 어쩌면 다른 사람의 고통이기 때문에 내가 모르는 슬픔을 공감할 수 없게 된다.
210. 그 대상이 누구건 어떤 이들을 간편하게 '규정'하고 '배제'하는 행위는 그 자체로 폭력일 수 있기 때문이다.
간편하게. 고민 없이. 나는 다 안다고? 갑자기 뜬금없이 궁예가 생각나네. 누구인가, 누가 기침 소리를 내었는가, 내가 가만히 보니, 네놈 머릿속에는 마구니가 가득 찼구나.
211. 공허한 삶을 '의미'로 채우기 위해서는 이용할 무엇이 필요하다. 나에게 할 일이 있다는 것, 그 일을 할 때 나는 중요한 사람이 된다는 것, 그러므로 나는 여전히 살 가치가 있다는 것...
그래서 나는 무슨 일을 어떻게 하고 살 것인가. 무엇으로 의미를 채우게 될 것인가. 지금이야 할 일이 많고 바쁘다 바쁘다 하지만 20년, 30년 후엔? 40년이 지나도 여전히 가지고 갈 수 있는 의미 가 있을까. 아니면 수시로 바뀌는 의미를 찾아야 할까.
216. 유명인이라면 감수해야 할 고통이라는 것이 있다는 말은 가학을 합리화하는 궤변이다.
여기서 가장 폭력이 빈번하게 일어나는 것 같다. 잘 알지도 못하는 상대에게 몇 가지 단편적이 조각들로 규정하고 평가하는 그 모든 것들이 폭력이니까.
217. 비판은 언제나 가능하다. 풍자는 특정한 때 가능하다. 그러나 조롱은 언제나 불가능하다.
가끔 풍자와 조롱이 헷갈렸다. 아니 저 사람한테 하는 건 괜찮고 이 사람은 안돼?
232. 사실은 믿지 않으면서, 나는 쓴다. 희망은 종신형이니까.
희망을 형벌이라도 하다니. 그래도 끝까지 그 끈을 놓지 않는다니 다행이다.
235. 이제 국가는 죽음을 방치하는 방식으로 살인을 한다.
가끔 내가 그렇게 무언가를 방치하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247. 나는 인간이 더 인간다워지기 위해 신이 필요할 수도 있다고 보지만, 신이 더 신 다워지기 위해 인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어린이와 어른도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어른은 아이를 이용하면 안 된다고.
시는 없으면 안 되는가 (시)
260. 그러나 언어는 문학의 매체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삶 자체의 매체다. 언어가 눈에 띄게 거칠어지거나 진부해지면 삶은 눈에 잘 안 띄게 그와 비슷해진다.
항상 말을 골라서 하려고 노력한다. 욕은 안 하려고 한다. 생각 없이 말을 뱉지 않으려고 한다. 똑같은 상황에서도 말을 예쁘게 하는 사람들이 있다. 아마도 평소에 그렇게 말을 했기 때문에 당황스러운 순간에도 그렇게 나오는 거겠지. 나는 그렇게 예쁘게 말하지 않으면서 뒤돌아서서 후회하는 경우가 많다. 내 삶이 언어와 비슷해졌다면, 지금 어떤 모습일지 걱정이 먼저 된다. 책을 많이 안 읽기 시작하면서 말도 많이 진부해진 것 같다. 예전에 했던 말들을 재탕해서 쓰고 산뜻하고 정감 있는 단어도 많이 까먹고 그.. 그거.. 저거 이러면서 대명사도 많이 쓰는 것 같고. 게다가 새로 배우는 게 적어지니 약간 바보가 된 기분도 든다. 삶이 먼저인가 언어가 먼저인가. 어쩌면 삶이 진부해져서 언어도 그렇게 비슷해진 게 아닐까. 어쨌든 둘은 같이 가는 거니 내가 움직일 수 있는 것부터 움직여야지.
263. 인간이라면 기본적인 생존에 만족할 수 없으며 자신의 삶이 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이 되기를 바란다는 것. 그런 갈망이 없다면 그것은 곧 노예의 삶이라는 것.
갈망을 느끼지 않는다면 오히려 마음은 편할지도. 편하게 살고 싶은데, 지금도 충분히 편한데, 그냥 이대로도 괜찮은데. 적당히 한량으로 살수 있는데. 뭔가 부족하다. 부족해.
264. 인간은 의미를 잊고 살 수는 있어도 의미를 빼앗긴 채 살 수는 없다.
내 의미는 어디 있지. 어디 숨었니.
269. '너는 너의 삶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 (...) 언제 이 구절을 읽든 우리는 똑같은 명령을 다시 받기 때문이다. 그동안 바꾸려고 노력했는가? 계속 더 바뀌어야 한한다. (...) 삶이 아주 느린 자살처럼 느껴질 때 나는 이 시를 자주 복용한다.
삶이 아주 느린 자살이라니. 열심히 산다고 생각했는데 천천히 죽어가고 있던 건가. 매번 통통 튀기도 쉽지 않은데. 사람이 나이 들면서 생기는 취향이라는 것도 나름대로 좋지 않나. 취향이 없는 나이 듦도 조금 심심한 것 같은데. 삶을 바꾸는 것과 취향은 다른 이야기일까. 취향은 어느 하나를 줄기차게 선택하는 바뀜이 없는걸 취향이라고 하는 게 아니었나.
291. 고독이 공기와도 같은 것이라면, 저 텅 빈 방은 지금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 고독으로 가득 차 있을 것이다.
다만 고독은 그냥 있는 거니까. 공기가 그냥 있듯이 무감하게 느끼면 되는 건가. 느껴지는 건가.
293. 그러니까 고독은 공기처럼 어디에나 있어서 잠시 잊어먹을 수 있을 뿐이고, 행복은 늘 등 뒤에 있어서 단지 기억될 수 있을 뿐인 것인지.
잊을 수 있고 기억될 수 있어서 다행이다.
324. 부정확한 비판이 분노를 낳는다면 부정확한 칭찬은 조롱을 산다. 어설픈 예술가만이 정확하지 않은 칭찬에도 웃는다.
정확한 칭찬은 그만큼 성의를 보여야 할 수 있는 것.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그 대상에 대해 정확한 칭찬을 해줄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칭찬을 하려면 그만큼 관심도 있어야 하고. 입발린 소리는 누가 들어도 그냥 입발린 소리.
넙치의 온전함에 대하여 (문화)
352. 그래서 문자메시지는, 이후의 통화와 그 이후의 대면을 위한 준비 작업일 때도 있지만, 더 은밀하게는, 모든 일이 이 문자의 층위에서 다 해결되면 좋겠다는 소망의 매체이기도 하다.
얼굴에서 음성으로, 음성에서 글자로, 당신은 축소 조정돼 왔다. 그러면서 당신은 쉬워졌다. 이 변화의 와중에 당신이 뭔가를 점점 잃어왔기 때문이다. 아, 이 사람은 나와 다르구나, 하면서 느끼게 되는 바로 그것, 그 '다름' 말이다. 철학 책에 자주 나오는 용어대로라면, 타자의 타자성 말이다.
일하면서 의사소통이 잘 안되는 경우가 있다. 보통 사무실에서는 메신저로 대화를 주고받았는데 왠지 이모티콘이 없으면 상대방이 화났나 싶고, 내가 하는 말과 상대방이 받아들이는 내용도 다르다. 반대의 상황도 종종 있다. 아무래도 글이라는 게 생각나는 데로 말하는 것도 아니고 한 번 손가락이라는 필터를 거쳐 정리해서 쓰는데도 내가 중요하다고 점을 찍은 곳과 상대방이 읽는 톤이 달라지고야 만다. 그러면 전화를 건다. 아니 이래이래서요. 아무래도 메신저를 쓰는 것보다 더 자세히 설명을 하게 된다. 그리고 화난 줄 알았던 화면 건너편의 사람도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래도 말이 안 통하면 위층 사무실로 뛰어 올라간다. 문제 상황을 직접 같이 바라보면 서로 똑같은 단어도 다르게 썼다는 걸 보다 더 쉽게 깨닫는다. 얼굴을 보면 화를 낼 수도 없고. 나도 문자 수준에서 모든 일들이 쉽게 끝나길 바라지만 사실 중요한 이야기는 전화나 직접 만나야 한다는 걸 알고 있다. 타자성이란 접점이 없어질수록 사라지는 걸까. 점점 비대면이 일상이 되면 개별성은 축소되어 가는 걸지도.
360. 또 나는 최근에 어떤 좌담을 읽다가 참석자들이 '굉장히'라는 부사를 습관적으로 사용하는 것을 보고 좀 놀랐다. 정말로 굉장할 때는 어쩌려는 걸까. '굉장히 굉장한'이라고 해야 할까.
어릴 때는 사랑이라는 말을 자주 하면 그 가치가 떨어진다고 생각했다. 진짜 사랑이 느껴지는 순간에만 진짜 진짜 그런 소중한 순간에만 쓸 거야.라고 생각했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영감님을 만난 후로, 지금은 아이와 눈만 마주쳐도 사랑한다는 말이 쏟아져 나온다. 아침에 일어나서 잠들어 있는 식구들을 볼 때, 밥 먹는 모습, 서로 장난치는 모습, 말 안 듣고 혼나서 눈물을 떨어뜨리는 순간에도. 하지만 너무 자주 해서 사랑한다는 말의 감정이 가치가 사라지지 않는 것 같다. 자주 많이 표현해야 더 생각나고 소중해지는 것 같다. 그렇게 표현을 해야 그 순간을 익숙하게 경험하고 느끼게 되는 것 같다. 굉장히도 그런 게 아닐까. 아무것도 아닌 순간에도 굉장하다고 하면 안 되지 않겠냐고 했지만 나는 그 모든 사소한 순간들도 굉장히라고 말할 수 있는 그 감수성이 더 좋다. 물론 쓸 수 있는 감탄사가 굉장히 밖에 없다면 조금 곤란하겠지만.
361. 정확한 순간에 제대로 사용될 때 어떤 오래된 단어는 갑자기 빛을 뿜어낸다.
순간에 꼭 맞는 이름을 찾아서 쓰고 싶다. 그냥 헐, 대박, 좋아. 가 아니라.
370. 생각하는 방법이란 곧 선택하는 방법이라는 것. 어떤 현실이고 맞닥뜨렸을 때 이를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 다른 생각을 의식적으로 선택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 그러지 않으면 우리는 늘 같은 방식으로만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상 생각을 하지 않는 것과 같다.
늘 같은 방식으로 행동하는 건 사실 아무 생각 없이 무의식적으로 자동화된 결과 일 테지. 예전에 생물 시간에 시냅스는 자주 쓰는 생각의 길만 굵게 키워준다고 한다. 어떤 생각을 할 때 빨리 전달할 수 있도록. 그래서 자주 쓰지 않는 생각의 길은 가늘어졌다가 없어지기도 한다고. 처음이 중요한데 쉬운 길로 한번 가면 그다음엔 새로운 길을 안 만들고 있던 길로만 가려고 한다. 그게 편하고 빠르니까. 내 머릿속에 얼마나 많은 길이 사라졌을지 모르겠다. 이제 와서 길을 늘려 보려고 여기저기 시도해 보는데 잘 되는지는 모르겠다. 아이들의 머릿속에 나쁜 길이 생기고 좋은 길이 없어지지 않도록 하려고 하는데 그게 또 말로 되는 일이 아니어서 참 어렵다.
375. 물론 최악의 경우는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 자신을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라 믿고 변화를 거부할 때일 것이다.
내가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 될까 항상 경계한다.
381. 나 역시 사람과 사람 사이에 능력의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 차이가 146배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아마도 멋진 신세계를 읽고 난 후였던 것 같다. 각자 책임질 수 있는 영역의 크기가 정해져 있을 텐데. 내가 책임질 수 있는 범위만 책임지려고 하면 스트레스 받지 않고 즐겁게 살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이 정도의 역량밖에 없는데 더 큰 역량이 필요한 일을 욕심내다가 혼자 지쳐 쓰러지는 건 아닐까. 그 차이가 146배까지는 아니더라도 있긴 있겠지. 이건 포기일까 차이일까.
385. 그러나 글도 '자주' 혹은 '빨리' 쓰면 말하기에 점점 가까워진다.
요즘엔 스레드가 그런 것 같다. 블로그에 글 중에서도 빨리 쓰는 글들은 글이 아니라 말에 가까운 게 느껴진다. 아무래도 글은 다시 한번 돌아볼 기회가 있으니까. 다시 한번 돌아보지 않은 글은 말과 같은 걸까. 돌아보지 않더라도 글을 쓸 수 있을까. 말을 글자화 시키는 게 아니라, 진짜 글을 써야 하는데.
389. 우리는 누구나 고유한 필터를 갖고 있어서 특정한 스타일의 대사나 연기 등에 거부감을 느낀다.
특정 스타일에 거부감을 느끼는 만큼 또 혹하게 되는 그런 게 있지. 깊게 생각하지 않더라도 호감이 생기는 그런 것들. 그것도 모두 나의 필터에 딱 걸려들었기 때문일까. 데이터에 필터가 있으면 정렬하기가 참 편하던 데다 그래서 살아가는 동안에 나도 모르게 필터를 끼우고 있었던 게 아닐까.
405. 왜 이렇게 긴 글을 썼냐는 물음에, 짧게 쓸 시간이 없었노라고 대답한 지혜로운 작가가 누구였더라.
하고 싶은 말이 참 많은데 그 말들을 고르고 골라 꼭 필요한 말만 하려고 해야 한다. 사실 이야기하는 걸 모두 다 들어주는 사람도 없고 다들 말하기 바쁜 세상 아닌가. 그걸 알면서도 꼭 사족에 사족을 또 더하고야 말아.
427. 그러나 어떤 질문은 그것을 간절하게 묻는 것만으로도 인생을 조금은 달라지게 한다. 정말 나는 그렇게 되었다.
그래서 어떤 질문을 하고 살 것인가. 나의 글을 항상 질문투성이다. 답을 찾고 있는데 쉽게 찾아지지 않아. 모든 게 의문투성이고 궁금한데. 이렇게 질문만 해대다 영영 답을 구하지 못하게 되면 어떻게 되는 거람.
2024.04.01
(2024.10.08 발췌부분 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