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의 모순은 무엇인가. 혹시 모순이 없는 삶을 살고 있나.
* 소설의 결론이 포함되어 있음.
도서명 : 모순
글 : 양귀자
출판사 : 쓰다
출판 연도 : 1998.06.27 (1판)
2013.04.01 (2판)
2024.04.07 (2판 100쇄)
별점 : ★★★★
난이도 : 쉬움
내 맘대로 한 줄 발제 : 내 삶의 모순은 무엇인가. 혹시 모순이 없는 삶을 살고 있나.
-책을 읽고 나서-
친한 지인과 독서모임을 다시 시작해 보기로 했다. 코로나 전에 1984가 도무지 읽히지 않아서 잠정적으로 멈추다가 쉬운 책으로 시작하기로 했다. 어떤 책이 좋을까. 베스트셀러 목록과 스테디셀러 목록을 주욱 살펴봤다. 현재 소설 베스트 1위가 '모순'이다. 아니 왜? 나 어릴 때 본 책인 것 같은데. 이 책이 왜 아직도 베스트셀러일까. 내가 일할 때만 해도 아니었던 것 같은데. 무슨 일이 있었을까. 어쨌건 만장일치로 모순을 읽기로 했다.
처음엔 내가 한 번 읽은 게 확실한 책이었는데 표지만 보고서는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최소 20년 전에는 읽었으리라. 한동안 양귀자 님의 글에 흠뻑 빠져 여러 책을 읽기도 했던 것 같은 데 따로 기록을 남기지 않은 데다 시간이 지나고 나니 기억나는 게 전문하다. 하지만 몇 장 안 넘기고 이름 안진진. 을 보는 순간. 아 나 이 책 읽었어.라는 생각이 가득. 물론 여전히 전체 내용은 기억이 안 나지만. 이 이름은 꽤나 인상에 남았다. 안진진. 이름부터가 모순에 가득했던 그 이름. 이름이 예쁘다고도 생각했던 거 같다.
안진진은 모순으로 가득한 인생을 살고 있다. 일란성쌍둥이지만 이모와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는 엄마. 엄마를 사랑하지만 떠날 수밖에 없는 아빠. 저울질하고 있는 다른 성향의 두 남자. 뭐 하나 확실한 게 안진진의 삶에 없다. 아니면 안진진은 스스로가 모순을 골라가며 사느라 솔직하게 숨김없이 인생을 사는 방법을 모르는 된 게 아닐까.
책을 읽는 내내 과연 안진진은 누구를 선택할 것인가 가 나의 제일 큰 궁금증이었다. 일란성쌍둥이로 태어나 중매결혼으로 팔자가 바뀐 엄마와 이모. 공교롭게도 안진진에게도 두 명의 남자가 있다. 아주 다른 스타일의 두 남자. 정반대의 삶을 산 엄마와 이모를 보며 안진진이 일부러 선택의 기회를 만든 걸 수도 있다. 처음에 어쩌면 이미 예감을 했었는지도 모른다. 안진진은 김장우를 사랑하게 될 거라고. 엄마가 아빠를 사랑한 것처럼 (중매였지만) , 안진진이 아빠를 사랑한 것처럼. 원래 딸은 아빠 닮은 남자와 결혼한다고 하던데. 하지만 그렇게 되면 안진진은 그토록 싫어하던 엄마의 삶을 비슷하게 살게 되겠지. 이모의 단조롭지만 유복한 삶이 아닌 고난과 역경이 버무려진 아주 재미있는 삶. 그래서 속으로 계속 나영규를 선택하라고 응원했다. 이모를 동경하고 이모처럼 살기를 원했던 안진진. 김장우에게 솔직히 자기의 이야기도 다 못하고 꾸며서 보여주면서 그게 사랑이라고 믿고 있는 안진진. 그게 사랑이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었는데. 그게 설마 사랑이라고 하더라도 솔직하지 못한 사랑이 얼마나 가겠냐고. 평생을 함께 할 사람인데 서로 꾸며진 모습만 보이고 정돈된 모습만 보이고 산다면, 나의 온전한 모습을 사랑하는 사람은 없는 거냐고.
마침내 안진진은 누구나 불행하게 살 수밖에 없다면 내가 선택한 불행을 살겠다고 결정한다. 사랑도, 엄마도, 아버지도, 이모의 삶도 모두 내가 결정할 수 없는 부분이었지만 이 불행은 내가 선택하겠다고. 행복과 불행. 모두 자신의 선택이라는 말이 하고 싶었던 걸까. 엄마는 아버지를 선택해서 불행하지만 행복하게 살고 있었고, 이모는 이모부를 선택해서 행복하지만 불행했다. 안진진은 이모의 삶과 같은 행복을 선택했고, 어쩌면 불행해질지 모른다면서도 이모와 같은 선택을 하겠다고 한다. 내가 경험해 보지 않으면 얼마나 불행한 건지 알 수 없으니 가보지 않은 길을 가겠다고 한다. 사실 안진진은 말은 그렇게 했지만 불행의 무게를 저울질한 게 아닐까. 그래도 이모의 불행이 엄마의 불행보다 가벼워 보이니. 그렇게 행복을 선택한 거지. 언젠가 이모처럼 불행해질지도 모르지만 엄마의 불행보다는 낫다 생각 드는 거겠지.
행복과 불행이 짝꿍처럼 같이 다니는 거라면,
그렇다면 조금이라도 저울질해서 더하기로 갈 수 있는 선택을 해야겠지.
김장우를 사랑하리라 생각했지만 나영규를 선택하길 바랐다. 자신을 솔직히 드러내 보일 수 있고 내 상황을 주절주절 설명하지 않아도 나에 대해 이미 많이 알고 이해해 줄 수 있는 사람. 그게 정말 이해인지 알 수는 없지만 구구절절 설명이 필요 없이 서로 기대일 수 있는 사이라면, 위로가 될 수 있다면 그것도 사랑이 아닐까. 숨길 게 많고 설명할게 많은 사이는 그냥 설렘일 수도 있지 않을까. 폭풍같이 달리고 싶은 마음만이 사랑일까. 아버지가 그렇게 주정을 부렸던 순간처럼 결국은 겉치레는 벗겨지는 순간이 올 텐데 그때도 사랑받을 수 있을까. 무섭지 않을까. 아니면 그런 순간이 올까 봐 도망을 갔던 걸까. 나라면 김장우도 나영규도 아닌 다른 사람을 선택했을 수도 있을 거라고, 아니면 아무도 선택하지 않았을 수도 있지라는 생각이 들지만 사람 마음이라는 게 맘대로 되지 않으니. 그냥 적당히 안될까. 적당히 평범하고, 성실하고, 계획적이고, 낭만적인 그런 사람.
남은 것은
어떤 종류의 불행과 행복을 택할 것인지
그것을 결정하는 문제뿐이었다.
p.296
-책 속 내용-
12. 이름. 안진진
앞에 읽기 시작했을 때는 그냥 읽었던 것 같은데.라고만 생각했었다. 확실히 양귀자 님의 소설을 읽긴 했다. 그래서 원미동 사람들이라던가 다른 책들도 봤었으니까. 하지만 남기지 않은 기억은 사라지기 마련. 그랬는데. '이름. 안진진'을 보는 순간. 머리통을 세게 맞은 것처럼. 갑자기. 생각이 나버렸다. 안진진.
21. 참 이상한 일이다. 이렇게 정리를 해놓고 보니 너무 무겁다. 풀씨가 바람에 날리듯, 마음속에서 부유하던 생각들도 정색을 하고 정리를 해보면 깜짝 놀랄 만큼 심각해지는 것이 정말 이상하다.
맞아. 나도 그래. 그렇게 생각이 많지만 한없이 가볍게 느껴졌는데. 글자화된 나의 생각을 보고 있으면 기분이. 그래. 내가 이런 생각을 했었었나? 특히 기록해 놓은 지 오래된 나의 생각 꾸러미를 보면. 오글오글하면서 이게 나라고? 아닌 것 같아. 내가 아닌 것만 같아.라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21. 우리들은 남이 행복하지 않은 것은 당연하게 생각하고, 자기 자신이 행복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언제나 납득할 수 없어한다.
어쩜 이렇게 이기적인 걸까 남이 행복하지 않은 것은 당연하게 생각한 적이 없지만 크게 억울해하지도 않았던 것 같다. 그럴 수도 있지. 안 됐다. 하지만 내가 행복하지 않은 것에는 항상 납득을 못했지. 그런데 한편으로 내가 행복하지 않은 것에 납득을 하는 삶도 속상할 것 같다. 내 인생이 이렇지 뭐. 행복한 일이 생기면 이런 일이 진짜 일리 없어, 그냥 불행한 게 나야. 나아질 리 없지. 이게 편해라고 살고 있다면. 너무 하루하루가 무기력하지 않을까. 나아질 것이 기대되지 않는 삶이란.
43. 5월의 밤은 아름답다. 어제 내린 비로 밤하늘은 모처럼 총총 빛나는 별들을 보여주고, 먼 곳에서 흘러오는 라일락 향기는 너무 진하지도 너무 연하지도 않아 이 밤의 그윽함을 더해준다.
어려서부터. 봄밤이 너무 좋았다. 의식해서 맡으려 하면 도망가 버리는 라일락 향기가. 그 온도가. 봄만 되면 밤에 풍겨오는 꽃향기에 기분이 좋아진다는 걸 나는 정확히 알고 있었지. 그냥 좋은데 왜 좋은지 모르겠어가 아니라. 나는 그냥 내가 스스로가 어떤 걸 좋아하는지 잘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지. 그런데 이렇게 내가 좋아하는 이 순간을 이렇게 정확하게 적혀있다니. 문득. 기억이 나진 않지만 어려서 이 책을 보고 나서 이때 봄밤을 사랑하게 된 게 아닐까. 그냥 기분 좋음으로 뭔지 모른 채 좋다며 지나갔던 5월의 밤을 이토록 정확하게 묘사해 주는 글 때문에 더 확실하게 내가 무엇 때문에 무엇을 좋아하게 된 건지 알게 된 게 아닐까.
51. 내가 가장 싫어하는 인간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말을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표현으로 길게 하는 사람이다.
하하 나도 그래. 같은 말을 다시 한번 정리하듯이 이야기하는데. 지금은 정리가 아니라 행동이 필요한데.
62. 그러나 어머니가 알아낸 것은 책 속에는 해답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여전히 책이, 해답을 찾기 위한 가장 쉬운 방법이니까. 없다는 걸 알면서도 지푸라기를 잡는 거지.
75. 하지 않아도 될 말들을 부득불 해가면서 살아갈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아껴서 좋은 것은 돈만이 아니었다. 어쩌면 돈보다 더 아껴야 할 것은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내뱉는 말들이었다.
어릴 때는 종종 그랬다. 내가 하는 말이 촌철살인 같고 굉장히 날카로우며 요점을 잘 잡는다고. 지금 이야기를 하면 빵 터지거나 정곡이 찔린 것처럼, 혹은 한 대 맞은 것처럼 재치 있어 보일까. 하지만 대부분의 말들은 안 하는 게 더 좋았던 때가 많았던 것 같다. 하고 싶은 말을 꼭 다 할 필요는 없다는 걸. 그걸 이제는 깨달았지만 필터링 없이 나가는 말들은 여전히 통제가 잘 안 될 때가 있다. 아무 말도 없는 그 고요함을 견딜 수 없는 건 결국 나이기 때문에 집에 와서 대화를 곱씹으면서 후회할 걸 알면서도 말을 아낄 수 없게 된다.
83. 아무에게나 간단히 설명될 수 있는 사람으로 여겨지는 것은 누구에게나 치욕이었다.
전에 읽은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에서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지. 다른 사람이나 사건을 쉽게 단정해서 이야기하는 건 폭력이라고. 항상 유념하고 있는 부분이지만 아직도 은연중에 폭력을 저지르고 있다. 가하는 쪽에서는 폭력이고 당하는 쪽에서는 치욕이다. 누구도 좋아지는 게 없는데 왜 자꾸 다른 사람을 간단히 설명하려고 할까. 이럴 때도 있고 저럴 때도 있고. 내성적인 사람이지만 어디에선 가는 적극적일 때가 있고. 근데 너 왜 그래? 너답지 않아.라는 이야기를 들으면 괜히 발끈하게 되고. 나랑 거리가 먼 사람일수록 단정하게 되는 것 같다. 단정을 했다는 건 더 이상 그 사람에 대해 알려는 노력을 그만하겠다는 게 아닌가. 넌 이런 사람이야. 그럴 줄 알았어. 이러겠지. 라며 그 사람의 행동과 생각들을 내 맘대로 재단하고. 하지만 나와 거리가 먼 사람이기 때문에 그래도 나에게 미치는 영향이 없겠지. 아님 말고.
지금 보니 '아님 말고'라는 말 너무 무책임하다. 그런데 또 바로 곁에 있는 사람들을 살피는 것도 공이 많이 드는데 멀리 있는 사람까지 그래야 하는가 싶기도 하다. 그러면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 거지. 가장 쉬운 건 아무것도 판단하지 말고 그때그때 성심성의껏 신경 쓰기. 매사 눈앞의 사람을 대할 때 한눈팔지 않기. 내가 제일 못하는 것. 한 번에 두세 개씩 해야 정신이 여기저기 멈춰있지 않고 바쁘게 할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고는 이도 저도 아니게 되지. 원씽에서 멀티라는 건 허상이라고 했지. 결국 모두 같은 화살표를 가지고 있다. 온전히 집중하기. 사람에게 집중할 수 있다면 미리 단정할 필요가 없다.
92. 아버지는 부드러운가 하면 금방 사나웠고, 따뜻한가 하면 당장 차가웠으며, 웃고 있는가 하면 순간적으로 폭포수같이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었다. 아버지를 미뤄하지는 않았어도, 또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아버지를 정신병자라고는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지만, 어떤 때의 아버지가 진짜 안진진의 아버지인지 알 수가 없었으므로 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열 살의 안진진은 마음속으로만 다짐했다.
육아 서적이 나 프로그램을 보면 보호자의 일관성이 제일 중요하다고 했다. 동일한 행동에 동일한 피드백이 와야 아이가 헷갈려하지 않고. 어쩌면 안진진은 아버지가 일관성이 없었기 때문에 삶이 모순으로 가득 차게 된 게 아닐까. 엄마도 이모와 일란성쌍둥이라 다른 삶을 살고 있는 게 이상하다고 생각이 들고 아버지도 일관성이 없고. 안진진은 어디서 등대를 찾을 수 있을까. 항상 거기 있으리란 믿음. 그랬다면 사랑이 그렇게 불안하고 꾸며대야 한다는 생각을 안 할 수 있었을까. 내 모습 그대로 놔둬도 항상 사랑받고 있다는 기분.
94. 환한 낮이 가고 어둔 밤이 오는 그 중간 시간에 하늘을 떠도는 쌉싸름한 냄새를 혹시 맡아본 적 있니? 낮도 아니고 밤도 아닌 그 시간, 주위는 푸른 어둠에 물들고, 쌉싸름한 집 냄새는 어디선가 풍겨 오고, 그러면 그만 견딜 수 없을 만큼 돌아오고 싶어 지거든. 거기가 어디든 달리고 달려서 마구 돌아오고 싶어 지거든. 나는 끝내지고 마는 거야...
하. 이것도 내가 좋아하는 시간과 색. 어스름하고 푸르스름한 그 시간. 내가 좋아하던 것들은 어쩌면 책이 알려준 걸까.
127. 사람들은 작은 상처는 오래 간직하고 큰 은혜는 얼른 망각해 버린다. 상처는 꼭 받아야 할 빚이라고 생각하고 은혜는 꼭 돌려주지 않아도 될 빚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 상처가 제일 아프지.
142. 철이 든다는 것은 말하자면 내가 지닌 가능성과 타인이 가진 가능성을 비교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에 다름 아닌 것이었다.
철이 든다는 건 이제 타인에 대해서도 마음을 나눠 줄 수 있다는 거겠지. 나는 아직 철이 덜 든 걸까.
153. 우리들은 아버지의 자식들이었고 그랬으므로 푸르른 일몰의 시간은 숙명적인 우리의 아킬레스건이었다.
아버지의 입장에서야 돌아가고 싶은 시간이겠지만, 어머니는 꼭 그 시간이 아니더라도 항상 제자리에서 지키고 있다. 왜 안진진은 떠나간 아버지의 입장만 헤아리고 항상 제자리에 굳건히 있는 엄마의 입장은 몰라 줄까. 아버지의 자식들이지만 또 엄마의 자식들인걸.
173. 인생이란 때때로 우리로 하여금 기꺼이 악을 선택하게 만들고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그 모순과 손잡으며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주리는 정말 조금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안진진은 어떤 모순과 손을 잡았을까. 무슨 인생이 그렇게 복잡하고 이해가 안 되는 것들 투성일까.
178. 나와 그들 사이에 너무나 많은 시간이 흘러버렸다는 것을. 그러나 그 많은 시간들이 우리들 사이의 소통을 위해 한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는 것을 나는 절실하게 깨달았던 것이었다.
오랜만에 만난 오래된 친구는 약간 어색하다. 오래전에 함께 했던 이야기밖에 할 수 없다. 오랜만에 만나도 친구는 친구지 라고 생각했으나 근황을 공유할 수가 없다. 아무리 일 적으로만 만나는 사이더라도 일하면서 보내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큰 만큼 요즘 이야기는 같이 일하는 사람들과 더 많이 공감하면서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예전 이야기도 좋지만 결구 계속 소통하려면 현재도 같이 공유해야지. 그리고 서로 공간적으로 물리적으로 떨어져 있는 상태에서 현재를 공유하려면 어렸을 적 한 반에 억지로, 같은 수업을 들으며 친해지는 것보다 더 많은 공을 들여야 한다. 사람 사이의 소통이란 그냥 거저 되는 게 없는 것 같다.
188. 나의 불행에 위로가 되는 것은 타인의 불행뿐이다. 그것이 인간이다. 억울하다는 생각만 줄일 수 있다면 불행의 극복은 의외로 쉽다.
그래서 위로를 찾기 위해 일부러 타인의 불행을 찾고, 내가 겪은 만큼의 크기의 타인의 불행을 찾지 못하면 만들어내려고 하는 걸까. 요즘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내가 그렇게 당했기 때문에 그래서 그게 억울해서 보복을 해야 하고 그래서 네가 불행해져야 내가 억울하지 않다고 그래서 그런 일들을 벌이는 걸까. 비단 개인이 아니라 민족도.
191. 세상에 모든 잊을 수 없는 것들은 언제나 뒤에 남겨져 있었다.
잊을 수 있는 게 앞에 있는 것도 아니지. 결국 남겨진 것만 잊지 못한 거지.
193. 꽃을 사랑한다면, 당연히 그 이름을 자꾸 불러줘야 해.
영감이 나를 뭐라고 부르지? 생각해 보니 나를 부른 적이 거의 없는 것 같아. 이상하다. 왜지? 영감이 나를 부르지 않았어도 불편하지 않았는데. 곰곰이 생각해 본다. 나는 영감이 나를 부르기 전에 먼저 눈으로 영감을 찾고 있었나 봐. 영감이 나를 볼 때 바로 마주 볼 수 있게. 아니면 나를 부르지 않고 나를 가만히 기다리거나 먼저 나한테로 걸어왔지. 그랬던 것 같아.
195. 사랑이라는 몽상 속에는 현실을 버리고 달아나고 싶은 아련한 유혹이 담겨있다.
어떤 사랑을 하는 걸까. 오히려 사랑하면 그 사랑에 책임을 다하고 싶어지는 게 아닐까. 사랑하기 때문에 도망을 간다니. 그건 너무 책임감 없고 사랑을 핑계로 현실도피하는 게 아닌가.
200. 그러나 한없이 달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달리기만 할 줄 알고 멈출 줄은 모르는 자동차는 아무 쓸모도 없는 물건이듯이, 인생도 그런 것이었다.
나.. 나는 너무 쉬고 있는 것 같은데. 달릴 수 있는 것도 때가 있지.
219. 그래도, 사랑의 유지와 아무 상관이 없다 하더라도, 보다 나은 나를 보여주고 싶다는 이 욕망을 멈출 수가 없다. 이것이 사랑이다.
그건 사랑이 아니어도. 사람의 성향이 아닌가. 나를 더 꾸며내어 사랑받고 싶은 사람과. 내가 이것밖에 안되는데도, 나를 사랑할 테냐의 마음가짐. 전자이면 계속 꾸며낼 테고, 후자라면 계속 엇나가겠지.
250. 남김없이 다 솔직해버리면 사랑이 누추해지니까. 사랑은 솔직함을 원하지 않으니까.
아냐. 솔직하지 못하면 누추해진다고 생각하는 게 정말 사랑이야? 꾸며내야 하는 게 사랑인가.
277. 너무 특별한 사랑을 감당할 수 없어서 그만 다른 길로 달아나버린 내 아버지처럼.
안진진의 아버지는 보다 나은 나를 보여주고 싶은 사람이 아니라 이런 대도 나를 사랑할 테냐 의 쪽이었을까. 왜 번번이 돌아왔을까. 아내가 항상 그 자리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싶어서일까. 처음엔 약간의 불안함으로 일찍 돌아왔다면 나중엔 믿음이 커질수록 오랜 방황을 하고 돌아오는 걸까. 오히려 안진진의 엄마가 아빠를 떠났더라면 그의 방랑은 멈췄을까. 엄마에 대한 책임감이 있고 보다 나은 나를 보여주고 싶다고 생각했다면 그는 번듯한 가장이 될 수도 있지 않았을까. 떠났다 돌아옴으로써 엄마의 마음을 확인하는 게 아니라 다른 방법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면 좋았을걸.
295. 남은 것은 어떤 종류의 불행과 행복을 택할 것인지 그것을 결정하는 문제뿐이었다.
조금이라도 더 가볍고 쉬워 보이는 불행을, 선택할 수 있다면 선택하고 싶다.
**
298. 열심히 기계의 글자판을 두들기며 이야기를 이어가다 보면 손가락이 치고 있는 내용과는 관계없는, 그러나 소설의 뒤나 앞에서 반드시 쓰이거나 쓰였어야 할 문장들이 저 혼자 뚜벅뚜벅 머릿속을 걸어 다니는 일이 벌어지곤 한다. 그럴 때, 결코 그 문장을 놓쳐서는 안 된다.
-2024.05.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