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장과 백업은 아주 중요해. 부끄러워. 차라리 날려버릴까.
하여간 줄기차게 쓴 것 같다.
고등학교 시절 막 발전하기 시작한 인터넷과 PC, 채팅. 채팅에 제일 빠져들었는데 그때는 그렇게 사람들이랑 소통하는 게 좋았고 재미있었다. 예전에는 채팅할 때 이상한 사람도 별로 없었던 것 같다. 오히려 나보다 어른 세대에게는 익숙지 않은 통로였기 때문에 내 또래 친구나 살짝 선배들을 만나기에 수월했는지 모르겠다. 여하튼 그렇게 채팅에 재미 들리면서 타자도 빨라지고 온갖 게시글과 답글을 달고 다니며 친한 척을 했다. 스스럼없이 먼저 말 걸고 다니던 그런 시절. 채팅기록이야 당연히 남지 않는 거고, 프리챌에 모임카페 같은 걸 만들었었는데 어느 날 보니 망했나 보다. 없다. 없어. 싸이월드로 친구들을 만나고 다니고 사진을 올렸는데, 역시나 없다 없어. 교보문고 북로그에 자리를 잡고 각종 잡글과 독서 리뷰들을 남겼지만 역시 최근에 없어졌다. 그리고 그 없어져 버린 모든 기록들에 백업은 없다. 아쉽다. 아쉬웠다. 왜 백업을 안 했을까.
그러다가 문득, 아직도 남아있는 플랫폼을 떠올렸다. 다음. 맨 처음 학교 수업시간에 한메일 계정을 처음 만들었던, 고등학교 때 가입했던 카페들이 아직도 남아있는, 바로 거기. 물론 여기도 휴면에 들어간 카페들이 대부분이었지만 그중 하나를 찾았다. 나름 당시에 잘 나가는 편이었던 대형 카페. 다행히 여긴 휴면상태가 아니어서 들어가 봤는데. 맙소사. 작성했던 글들을 찾았는데 손발이 오그라 드는 정도가 아니라 심장이 오그라든다. 이렇게 개발랄하고 깨방정에 이 귀여니체는 뭐지. 이런 글을 내가 싸지르고 다녔다니. 기억에 단편 소설 같은 것도 올렸던 것 같아서 찾아봤다. 오 맙소사. 상상 속에 점점 각색되던 소소하고 아기자기한 글이 아니다. 그리고 게시글을 더 뒤적뒤적하다 보니 내가 소설을 쓰다 만 것도 있다. 낯설지만 낯설지 않은 느낌. 장편을 생각하고 쓴 건지 4화 정도 짧게 올라갔는데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 이야기를 써 내려갔는지 모르겠다. 그때 당시 퇴마록과, 드래곤라자에 흠뻑 빠져있던 나는 판타지물을 쓰고 있었다. 다시 내용을 떠올리니 폐도 오그라든다.
그런 데 또 대견하다는 생각도 든다. 날짜를 보니 대략 고2 때 쓴 소설의 시작 부분. 그 당시 유행하던 1인칭 주인공 시점의 허세가 좀 있는 판타지 물이어서 여러 번 다시 읽어도 오글오글 너무 부끄럽다. 그렇지만 이런 걸 내가 썼다고? 다음 이야기가 궁금하다. 그렇지만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앞으로도 뒷이야기는 알 수가 없겠지. 그러고 보니 고등학교 시절 나는 A4 클리어 파일에 들어가는 격자무늬 종이에 만화 스토리랍시고 열심히 써서 주변 친구들에게 돌려보게 했다. 뭐가 그리도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을까. 지금은 어디에 둔지 기억도 안 나지만 만약 그 낙서들을 찾게 된다면 역시나 심장과 폐와 손가락 발가락 모두 오그라 들겠지. 그치만 그때는 그게 너무 재미있었다. 진부한 클리셰와 캐릭터가 뒤범벅이 된 그런 이야기. 게다가... 은 얼마나 찍어댔는지 글자수 보다... 개수가 더 많을 수도 있겠다.
글은 어떻게 쓰는 걸까.
그런 생각도, 고민도 없이 그냥 손끝에서 나오는 대로 적었던 것 같다. 발단, 전개, 절정 그런 순서와 구성없이 그냥 머리에서 나오는 데로 만연체로 읊어 내려갔다. 계획하에 치밀하게 구성하지도 않고 그냥, 그렇게. 어쩌면 판타지 세계에 살았던 적이 있던 내 안에 또 다른 인격을 불러와서 그 녀석이 살고 있던 곳의 에세이를 쓴 게 아닌가 싶다. 그러니까 이렇게 생각 없이 쓰지 않았을까. 하지만 이젠 머리가 크고, 아는 게 많아지고, 읽은 게 많아지면서 주춤, 하고야 만다. 내가 소설을 쓸 수 있을까. 그때처럼 그냥 편하게 내려쓸 수 있을까.
사실은 이것보다 사라진 기록이 더 많다. 20살이 넘고 나서는 친구들과의 카페에 글을 남겼고 북로그에는 사진을 곁들인 말랑 콩떡 한 감성에세이도 많이 남겼었던 것 같다. 늦은 오후 햇살이 따스한 날 늘어져서 자고 있는 고양이 느낌의 그런 에세이. 그치만 그건 정말 20대 초반 감성이라 지금은 다시 쓰고 싶어도 잘 안 써진다. 스무 살을 더 나이 먹으면서 바삭바삭 말라버린 감성. 혹시나 남아있지 않을까 여기저기 마음 안을 뒤적뒤적해 보지만 이미 글들은 딱딱해진 게 느껴진다.
그 순간에만 딱 맞게 나오는 글이 있다.
어려서, 사랑받는 순간이라, 나이 들어서, 힘들어서, 즐거워서, 슬퍼서 쓰는 그 모든 글들이, 그때 그 순간에 맞게 정제되고 소화된 다음 글로 흘러나오는 것 같다. 사람마다 쌓인 경험치나, 취향들이 다르기 때문에 똑같은 일을 맞닥뜨리더라고 다른 결과가 글로 보이게 되는 것 같아. 그리고 똑같은 사람이지만 나이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고. 책을 읽더라도 초등학교 시절 읽었던 감상과 성인이 되어 읽고 난 후기가 너무 다른 경우가 종종 있지 않나.
점점 나이가 들고 있다.
내가 들고 싶어 드는 나이가 아니고, 시간은 붙잡을 수 없지만 기록은 붙잡을 수 있다. 나는 붙잡아 놓은 과거가 별로 없지만 가끔씩 보물찾기 하듯 뒤적뒤적 찾아보다 보면 내 마음이 다시 어려진 것 같아 버릴 수가 없다.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어서 그게 나라는 걸 부정하고 싶기도 하고. 그렇지만 그 오글거리는 끄적임을 그러 모아 가끔씩 펴보고 싶다. 지금은 나오지 않는 그때 그 유치함이란. 아닌가. 지금도 가끔, 아니 자주 튀어나오는 것 같다.
언제쯤 나중에 읽어도 촌스럽지 않을 그런 글을 쓸 수 있을까.
"아..."
이디의 얼굴이 무지하게 빨개진다.
"아니.. 나는 노래 안 불러, 잘 못하거든.."
"그래? 어제 난 노랫소릴 들었는데..."
"아마 하프연주 소리였을 거야. 밤에 좀 탔어."
하긴.. 방금 들었던 하프소리가 어젯밤의 그 노랫소리와 비슷했어. 자다가 잘못 들었나 보다. 근데 16살이라고? 믿을 수 없어 거기다 떠돌이라니.. 우리는 그래도 기다리는 집이 있는데... 좀 불쌍하군.
"어디 갈데라도 있어?"
역시 유노는 착해.
"아니. 왜?"
"우리 지금 텔토에 가는데 뭐 레이와 단둘이 가도 돼지만, 너랑 가는 것 도 재미있을 것 같아서."
"유노는 나도 갔으면 좋겠어?"
"응.... 가만있자. 왜 레이는 형이고 난 그냥 유노지?"
"레이? 아, 형의 애칭인가 보지?"
"나만 그렇게 불러. 거의 페네 스라고 부르거든. 그리고.. 아니, 암튼."
"그야 유노는 정신연령이 낮으니까...."
"뭐야?"
역시 애들 싸움. 난 그냥 밥이나 먹어야겠다. 이디도 분명 같이 갈 것처럼 보인다. 당분간은 유노와 싸울 일은 없겠군.. 급할 것도 없는 데 천천히 재미있게 가야지.. 나는 터벅터벅 이디의 곁을 떠나서 원래 우리들의 밥이 차려진 테이블로 걸어왔다. 그리고
"아저씨, 잘 먹을게요!"
후.. 새로운 일들이 많이 일어났다. 프릴을 만났고 이디를 만나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앞으로 만나게 되고 또 떠나보내야 할까.
"으아아 힘들어 유노. 왜 내가 이 짐을 들어야 하는 거야?"
"짐꾼으로 따라온 거 아냐?"
"형! 뭐라고 말 좀 해봐.. 그렇게 웃지만 말고.."
후훗, 재밌다. 그나저나 요즘은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무슨 전쟁이 일어날 것 같다는 말도 안 되는 그런 소문이 나돌고, 드래곤들은 다 깊은 곳으로 숨어들고 있는 것 같다고 하고... 조금 이상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나에겐 먼 나라 이야기 같은 거니까. 일이 터지기 전에 텔토에 가보고.... 아, 가본다음에는 바람의 현자 이데니안에게 가서 텔토에 대해 여쭤봐야지.. 그분은 모든 걸 바라볼 수 있다고 한다. 그럼 그곳에 대해서도 뭔가 알 수 있겠지...... 왠지... 기분이........................................ 이상한.... 여행일 것 같다...
2024.10.08-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