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없이 걷는 길이 이어진다. 나는 왜 이 고생을 사서 하고 있는가. 걷는 내내 스스로에게 이 질문을 여러 번 던졌다. 그때마다 돌아오는 답은 같았다. 재미있으니까.
나는 아마 앞으로도 이렇게 살아갈 것이다. 재미있을 것 같아서, 해내면 멋질 것 같아서, 일단 질러 놓고 책임을 지기 위해 오지게 고생하고 그렇게 또 해내고. 흥미진진해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고단한 그런 삶을 이어가겠지.
외진 길을 빠져나오니 어느새 마을도 보이고 게이트볼 하는 어르신들도 보인다. 인기척이 참 반갑다. 걷는 동안 나이를 더 먹으면 이런 한적한 곳에 와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사실 일자리만 해결되면 지금이라도 내려와 살고 싶다.
10년 전 16일 차에 묵었던 낙동장 여관이 저 멀리 보인다. 당시에 해가 졌는데 가로등이 없어서 너무 어둡고 무섭던 와중에 겨우 잘 데를 찾아 충격적으로 낡은 방 상태에도 아랑곳 않고 감사히 묵었던 기억. 다시 묵어 볼까 하는 생각도 있었지만 어쩌다 보니 낮에 지나가게 되었다. 하루를 마무리하기에는 너무 이른 시간이라 여정을 이어가기로.
10년 전 어두웠던 길과 컬쳐쇼크였던 낡은 방
당시에는 기차가 엄청나게 큰 소리를 내며 지나가서 무서웠는데 어디에도 기찻길이 보이지 않는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길과 전혀 달라 보인다. 어둠 속에서 보았기 때문이겠지.
긴 가뭄에 내리는 단비처럼 이따금 나타나 주는 고마운 존재, 공중화장실. 화장실에 가면 민생고를 해결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앉을 수 있어서 너무나도 행복하다. 변기에 앉는 것도 앉는 거거든요. 겨울이라고 아예 닫아 두는 화장실도 꽤 많기 때문에 이렇게 히터까지 틀어 주는 곳을 만나면 너무나도 반갑고 이름 모를 지자체 담당자에게 감사하게 된다.
밀양 8경 (닳아서 없어짐)
원래는 배낭에 날개 와펜을 달 생각이었다. 내 이름에는 날개라는 뜻이 있고, 나는 그 사실을 매우 좋아하므로. 10년 전 메고 갔던 책가방에 날개가 있었던 것도 그래서였다.
종주를 함께할 배낭은 정해져 있었다. 신입사원 연수 떠날 때 가져가라고 챙겨 준 빈폴 배낭. 많이 들어가는데도 가볍고 편한. 문제는 가방 디자인이 너무 밋밋하다는 사실이었다. 뒷모습을 많이 찍게 되는 종주의 특성상 배낭이 좀 아이코닉했으면 했는데 말이다.
원래는 큼지막한 날개 와펜을 달 계획이었다.중국 쇼핑몰 사이트에서 하나 찾아둔 것이 있었다. 디자인은 딱히 마음에 들지 않지만 사이즈가 충분했다. 하지만 출발 전에 찾아온 번아웃은 나를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로 만들었고, 별로 어렵지도 않은 인터넷 주문조차 하지 못한 채로 출발하게 되었다.
급하게 동대문에 가서 와펜을 구매하긴 했다. 하지만 손바닥 크기에도 못 미치는 작은 것이었고 내게는 그것을 다림질하거나 바느질해서 달 에너지가 남아 있지 않았다. 그래서 대신 보라색 리본을 달았다.
이 보라색 리본은 22년 독일 본으로 출장을 갔을 때 얻은 것이다. 퇴근 후 Bundekusthalle이라는 미술관에 갔다가 나오는 길에 이 작품을 보게 되었다. 브라질에 있는 Nosso Senhor do Bonfim이라는 교회에서 소원이 적힌 리본을 가져가서 팔목이나 창살에 묶어두었다가 글씨가 닳아 없어지거나 리본이 끊어지면 그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이야기를 듣고 영감을 얻어 제작된 작품이다.
작가는 30,000개의 리본에 자신의 소원들을 영어와 독일어로 적어 벽에 꽂아 두고, 관객이 자신의 소원을 적은 종이와 교환해 가게 했다. 글씨가 닳아 없어지거나 리본이 끊어질 때까지 손목에 매고 다닌 다음, 그 보답으로 당신의 소원이 이루어지는 걸 지켜보라고 되어 있었다. 개인적인 소원부터 지구평화를 위한 대의적인 소원까지, 여러 가지가 여러 색 리본에 쓰여 있었다. 색이 마음에 드는 리본 중 내 소원과 가장 비슷한 걸 골라 내 소원 종이와 교환했는데, 그때 얻어온 것이 바로 이 보라색 리본이다.
한동안 창틀에 걸어두었다가 자꾸 바닥으로 떨어져서 국토종주 오는 길에 데리고 나왔다. 아직 닳아 없어지려면 한참 남은 듯 하지만, 그래도 가는 길에 든든한 동반자가 되어주었음은 변함이 없다.
2017년 삼랑진으로 벚꽃 구경을 왔던 나와 친구
7년쯤 전에 삼랑진에 왔던 기억이 난다. 벚꽃을 보겠답시고 둘이 한복 색도 맞춰 입고 놀러 와서 느닷없는 딸기 축제 구경도 하고 딸기 막걸리도 사 먹었던 기억. 삼랑진 딸기가 유명하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 알게 되었는데.
삼랑진은 버스 정류장 배경도 딸기 사진
기왕 온 것 지나가다 딸기가 있으면 사 먹자고 다짐했다. 먹고 싶은 게 있으면 다 먹어줄 테다. 이 삭막한 길에서 딸기 상인을 만나기 어려우리라고 생각하면서도.
스트릿 패션 사진마냥 힙하게 나온 사진
10년 전 완주까지 50km도 채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기념하며 사진을 찍었던 장소를 발견했다. 같은 자리에서 같은 포즈 같은 표정으로 사진을 찍어 본다.
이렇게 옆에 두고 비교해 보니 그때와 비교해서 눈이 커진 듯하다.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많은 친구들이 쌍꺼풀을 만들어 오던 시기에 안검하수라는 단어를 처음 들었다. 이마에 손을 짚고 눈을 크게 떴을 때 이마가 움직이면 안검하수래, 원래는 눈꺼풀 힘만으로 눈을 뜰 수 있어야 한대.
새로운 정보를 들은 나는 쌍꺼풀 수술을 하는 대신 눈꺼풀 들어 올리는 힘을 연마하기 시작했다. 되려나 싶었지만 또 막상 의식적으로 하다 보니 쉬워졌다. 그로부터 10년 뒤 눈을 좀 더 크게 뜰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는 이야기.
감성 카페라고 불러줄 만한 건물들이 하나둘 눈에 띄기 시작했다. 작은 동네까지 차 몰고 놀러 오는 사람들이 많아졌나 보다. 네이버 지도에서 하나하나 눌러 메뉴를 확인했는데 아니 글쎄 딸기 라떼를 파는 카페가 있는 것이 아닌가. 삼랑진 딸기도 먹고 갈증도 해결하고 일석이조. 가슴속에서 딸기라떼를 향한 열망이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문제는 카페가 내가 걸어야 하는 루트에서 왕복 14분만큼을 벗어난 거리에 있었다는 것이다. 정해진 루트만 걸어도 힘든 길, 딸기라떼는 14분을 더 걷고서라도 쟁취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가? 카페가 바로 저 앞에 있는데 지름길로 질러갈 수는 없을까? 비록 그 길이 좀 험하더라도 말이다.
그렇게 나는 지름길로의 월담(?)을 시도한다. 루트와 카페 사이에 가파른 언덕이 있어서 그걸 넘어가 보기로 한 것이다. 절벽을 타는 산양마냥 험한 길을 기어올라갔다.
하지만 불행히도 저 너머로 보이는 것은 카페로 향하는 길이 아니라 아득한 낭떠러지. 네이버 지도가 돌아가는 길을 알려준 건 다 이유가 있어서였던 것이다. 나는 할 수 없이 언덕길을 다시 내려가기로 했다.
우당탕 하고 내려왔는데 어랏 핸드폰이 없다. 꼭대기에서 사진을 찍었으니 내려올 때 흘린 게 분명했다. 문제는 떨어뜨린 핸드폰이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보호색이라도 장착한 양 어지러운 흙바닥 어딘가에 감쪽같이 숨어버린 나의 핸드폰.
결국 나는 워치의 '내 디바이스 찾기' 기능을 사용했다. 이런 건 누가 쓰나 했는데 내가 쓰네. 딩딩거리는 소리를 듣고 어렵지 않게 핸드폰을 되찾을 수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카페. 딸기라떼가 품절이라거나 했다면 그 자리에서 와앙 울어버렸을지도 모른다. 다행히 예쁘게 진열되어 있는 나의 소중한 딸기라떼들. 척 봐도 제법 묵직한 병에 들어있는 것이 어째 불안했지만 여기까지 와서 안 사 먹는 옵션이란 없다. 나는 비로소 나의 전리품을 손에 넣었다.
고생 끝에 얻은 딸기우유는 정말이지 맛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 과육 크고 고소한 흰 우유를 쓰는. 병과 빨대를 처리할 수 있는 쓰레기통을 만날 리가 만무한 데다가 분명 가고 싶어질 화장실도 제때 나타나 줄 지 알 수 없었기에 딸기우유는 확정적 골칫거리였지만 그래도 먹고 싶었던 걸 먹으니 기분이 좋아졌다.
유독 동글맞았던 밀양의 고양이들
오르막길 시작. 자전거길이나 인도가 따로 분리되어 있지 않아서 벽에 딱 붙어 걷느라 고생했다. 하필 또 길이 굽이굽이 휘어져서 차들이 놀라지 않기를 기도해야 했음.
하지만 길 자체는 재미있었다. 마을이었기도 하고... 지도에 쳐도 안 나올 것 같은 현지맛집 바이브의 민물횟집이 길을 따라 늘어서 있었다. 1인분은 팔지 않을 것 같아서 관뒀다. 밥을 먹긴 먹어야 하는데.
힘들다 힘들어
국토종주 코스 중에서도 손꼽히는 힘 낭비 구간, 밀양강. 다리 하나 놓으면 삼십 분도 안 되어 갈 거리를 두세 시간 넘게 걷고 또 걸어야 한다. 길이 잘 깔려 있으니 자전거로는 탈만할지도 모르겠지만 도보로는 정말이지 지옥이다. 마을이 있는 것도 아니라 무척 지루하고 힘들다. 해가 지는 시점이라 마음도 초조했다.
앞으로 지겹도록 마주하게 되지만, 그래도 종주 중 처음으로 만난 소와 마시멜로(?)는 신기하고 반갑다. 얼마 전 기사를 읽고 알게 되었는데, 마시멜로의 정체는 여물을 싸서 발효시킨 것으로 소들에게는 겨우내 먹는 별식이라고 한다.
이걸 벤치가 있다고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다행히 얼마 안 가 지붕이 있는 쉼터를 만났다. 힘들어서 벌렁 드러눕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오늘은 어디까지 가야 하지. 숙소를 찾기 시작했다.
어랏 이렇게 당황스러울 데가. 오늘 걷는 길이 내내 마을 주변이라서 방심했다. 주변에 숙소라고 부를 만한 것이 한 개도 없었다. 낡아빠진 민박조차도. 길바닥에서 자게 생겼다.
20분 택시를 타고 나가 밀양역 근처에서 자거나, 세 시간 반을 더 걸어서 수산리에서 자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 이미 해가 떨어지고 있는 데다가 체력도 바닥나서 오래 걸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은데. 일단은 가능한 만큼 걸어보고 결정하기로 했다.
타는 속도 모르고 끝도 없이 펼쳐진 야속한 길. 그나마 위안이 되는 사실이 있다면 겨울 종주라서 강물이 불 일이 없다는 것이다. 우천 시 진입금지인 구간이 꽤나 많았다. 안 그래도 힘든데 비 왔다고 우회하라고 하면 화가 났을지도.
해가 지니 바람이 불어 꽤나 쌀쌀하다. 패딩 모자를 쓰고 장갑도 꺼내 꼈다. 비닐하우스에서 노숙할 수 있을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했다. 따뜻하게 작물 키우려고 설치하는 거니까 안에서 자면 최소한 얼어 죽을 일은 없지 않을까?
구세주처럼 나타난 공중화장실. 한편으로는 해가 있을 때 조금이라도 더 걸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지만 그러기에 나는 너무 춥고 지쳐 있었다.
오성급 호텔 다 비켜. 이때의 나에겐 이 화장실만큼 아늑하고 안락한 곳도 없었을 것이다. 따뜻하고, 밝고, 클래식 음악도 흘러나오고, 게다가 충전도 된다고? 진지하게 여기에서 잘까 생각했다.
찬 바람 맞아서 빨개진 얼굴
그렇지만 아직 시간이 이르니 좀 더 가 보기로. 한참 걸으면 나오는 오토캠핑장을 목표로 걸어보기로 했다. 텐트도 차도 없었지만 숙박비를 내면 화장실에서 눈이라도 붙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었다.
밖으로 나와 보니 세상은 절망적으로 어두워져 있었다. 머릿속에 세 글자가 떠올랐다.
'좆됐다.'
좆되었음을 깨달으니 오히려 머리가 차가워지고 마음이 차분해졌다. 마취를 한 듯 통증이 느껴지지 않았고 평소 같았으면 무당마냥 날뛰었을 상상력도 완전히 차단되었다. 내가 이렇게까지 냉정해질 수 있는 사람이었나? 스스로에게 놀랐다.
구름 때문에 별도 달도 보이지 않았던 어두운 날. 핸드폰 플래시 하나에 의존해서 걷고 또 걸었다. 플래시를 끄면 정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왼쪽이 플래시를 켰을 때, 오른쪽이 껐을 때 똑같은 장면을 찍은 것이다. 여기서 핸드폰 배터리마저 없었다면 얼마나 절망적이었을까. 최신기종의 배터리 효율과 중국의 실수 샤오미 보조배터리에 새삼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길에 있는 방향 표시가 잘 보이지 않아서 국토종주길 어플의 지도에 의존해 걸었다. 대체로 표시가 잘 되어 있지만 가끔 오류가 있는데 하필이면 그 구간을 이 야밤에 걸을 게 뭐람. 수상한 비포장도로를 걸으라길래 지도를 요리 돌리고 조리 돌려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음을 알아냈다.
더 가라고 했으면 무서웠을 텐데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들어오면서 보고 무덤이라고 생각했던 것을 나가면서 다시 유심히 보니 그냥 풀더미였다. 역시 공포는 상상력에서 비롯된다니까. 상상하지 말고 담백하게 걷자 담백하게.
길가에 우사가 많아서 소똥 냄새가 났다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설상가상이었다. 낮에 이미 한번 답한 바 있는 질문이 다시 한번 머릿속에 떠올랐다. 왜 나는 이 고생을 하고 있지. 이걸 하고 나면 내게 뭐가 남지. 얌전히 집안에서 쉬었다면 행복했을까.
걸음을 더하다 보니 마음이 다시 차분하게 가라앉았다.뭐든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해는 한참 전에 졌고 비는 오고 날은 춥고 들이킨 딸기라떼 때문에 오줌보는 터질 것 같고 다리는 아파서 절뚝이고 있고 그렇지만 어쨌거나 나는 지금 걷고 있다. 그리고 걸어낼 것이다.
10년 전 종주할 때는 밤길을 걷는 일이 너무나도 힘들고 무서웠다. 자꾸만 무서운 생각이 들었고 서러워서 울며 걸은 날도 많다. 하지만 지금은 저 멀리 켜진 채로 암흑 속에서 빛나는 가로등 불빛 한 개가 아름답고, 나 빼고 다 잠든 이 고요한 세상을 걷는 일이 근사하게 느껴진다. 열 살 더 먹은 나는 더 강하고 더 여유롭다. 그리고 앞으로의 나는 더더욱 그런 사람이 되어갈 것이다.
어두운 길을 한참 걷다가 유달리 밝은 가로등을 만났다. 마을 입구라 밝게 켜놓은 것 같았다. 어쩌면 이게 마지막 마을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로등 너머로 보이는 건 무한한 어둠뿐이었기에.
거의 탈진 상태에 이르러 있었던 나는 일단 한번 마을로 들어가 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누구라도 마주치면 붙잡고 마을회관 소파에서라도 눈만 좀 붙이고 갈 수 없겠냐고 빌어볼 작정이었다.
해진 뒤의 시골마을은 정말이지 무서웠다. 아무런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는 데다가 불 켜진 집 하나 없었다. 사람이 안 사는 동네래도 믿을 것 같은 싸늘한 분위기에 등골이 오싹해졌다. 온갖 기묘한 일이 일어나는 스릴러 영화의 도입부를 직접 찍고 있는 기분이었다. 낮이면 활기가 도는 평범한 마을이었겠지만, 어둠 속을 혼자 헤치고 있자니 별의별 생각이 다 드 것은 어쩔 수 없더라.
마을회관을 발견해서 문을 슬쩍 밀어 보았다. 잠겨있으면 어쩌나 했는데 스륵 밀리는 문. 럭키!
실내는 아무도 없는 듯 고요하고 어두웠다. 모니터에 띄워진 동네 CCTV 화면만이 유일한 불빛이었다. 하필이면 또 흑백 CCTV라 안 그래도 쪼그라든 간이 콩알만 해지는 것 같았다. 누구를 마주치기라도 하면 나라는 낯선 존재에 놀라실 것 같아 조심조심 노크를 하고 불을 켰다. 정말 아무도 없었다.
누구에게라도 허가를 받아야겠다 싶어 마을 이장님이든 누구든 간에 연락할 수 있는 전화번호를 찾아 두리번거렸지만 눈에 띄지 않았다. 서랍을 연다던지 더 뒤져볼 수는 있었지만 오히려 그게 더 도둑놈 모양새라 관뒀다. 불이 나간 화장실에서 핸드폰 플래시를 켜놓고 참아 온 소변을 세상으로 내보낸 다음 고양이 세수를 했다. 물이 차가워서 손이 시렸다.
마을회관 한구석에 놓여 있던 방석을 깔고 누워 패딩을 덮었다. 무릎을 한껏 굽혀야 발까지 덮을 수 있었다. 장롱 안에 이불이 있었지만 허락받지 않은 주제에 꺼내 쓰기가 죄송했다.
누구든 들어온다면 놀라지 않도록 휴지를 뜯어 사정을 설명하는 편지를 쓰고, 낮에 받은 캔커피와 함께 놓아두었다. 정말 눈만 붙이고 해뜨기 전에 나가야지. 새벽 5시에 알람을 맞춰 두고 잠을 청했다. 부디 내일 아침 무사히 눈을 뜰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