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토종주길은 봄과 가을에 성수기를 맞는다. 심지어는 뜨거운 여름에도 적잖은 사람들이 뒷목을 지글지글 태우며 도전의 길에 오른다. 항상 복작이는 종주길이라지만 겨울에는 풍경이 좀 다르다. 겨울은 정말이지 국토종주 비수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14년과 2024년
이런 상황에서 나는 겨울 종주만 두 번을 했다. 그리고 언젠가 다시 종주를 한다고 해도 겨울을 선택할 것 같다. 추위가 너무나도 고통스러워서 한겨울에도 반팔을 입어야 할 정도로 보일러를 때고 작은 원룸에 살면서 난방비로만 한 달에 십만 원을 넘게 지출하는 추위 취약 인간임에도 그렇다. 단점도 많지만 장점이 더 많다. 겨울 종주의 이모저모를 이곳에 정리해 본다.
겨울 종주의 단점
1. 겨울에는 해가 짧다
겨울에는 해가 늦게 뜨고 일찍 진다. 말인즉슨 활동할 수 있는 시간이 매우 제한적이라는 의미다. 도시에 있을 때는 해가 져도 괜찮다. 천지에 깔린 것이 가로등과 각종 조명이니까. 하지만 도시를 벗어나면 말이 다르다. 국토종주 중에 걸어야 하는 길은 높은 비율이 산길이요 시골길이다.
위 사진이 찍힌 시간을 추측해 보시라. 밤 10시? 자정? 새벽 2시?
정답은 오후 7시다. 산과 밭에는 빛이 없다. 겨울에는 저녁 여섯 시 반만 되어도 온 세상이 칠흑 같은 어둠으로 뒤덮인다. 똑같은 길도 밝을 때 걷는 것과 어두울 때 걷는 것은 다르다. 시야에 제약이 생기고, 기괴한 상상력이 자꾸만 피어오른다. 어두운 숲에서 생각보다 많은 소리가 난다는 사실, 나도 알고 싶지 않았다.
해 떠 있는 동안 걷고 해 지면 들어가 자면 되지 않냐고? 해넘이 전에 숙소까지 닿을 수 없는 날이 훨씬 많다. 결국 몇 안 되는 매력 없는 옵션들, 어두컴컴한 산길을 세 시간 반 걷거나, 벽 있고 지붕 있는 곳 찾아 노숙을 하거나, 이들 중 하나를 선택하게 될 것이다.
밤길을 세 시간 걸어서 푹신한 침대가 있는 숙소에 도착했던 날. 무섭고 괴로웠다.
2. 날씨가 춥다
당연한 말이지만 겨울은 춥다. 기온이 매일 바뀌기 때문에 얇은 옷 여러 겹을 챙겨가서 그때그때 덧입거나 벗었다. 옷 무게만 해도 제법 되었을 것이다. 찬바람을 맞으며 걷다 보면 얼굴과 입술, 손이 자꾸 터서 아프기 때문에 로션이나 립밤도 필요하다. 날이 따뜻했다면 챙기지 않아도 되었을 짐이 추가되는 것이다.
바람을 하도 맞아서 빨개진 얼굴. 풀착장한 나.
추운 날 종주의 또 다른 단점은 하늘을 이불 삼아 하룻밤 쉬어갈 수 없다는 것이다. 몸은 지쳤고 해는 졌는데 숙소를 찾을 수 없을 땐 정말이지 노숙이 간절하다. 날이 따뜻했다면 어디 마을 정자 같은 데서 한두 시간 눈을 붙이고 여정을 이어갔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때는 한겨울. 노숙조차 육 면이 막힌 공간을 찾아야지만 가능한 사치로 변모하는 계절. 추운 데서 대충 잤다가 입이 돌아가거나 동사하는 위험을 감수하고 싶지는 않았다. 때문에 매일이 숙박할 자리를 찾는 전쟁이었다.
여름종주였다면 침낭을 들고 다니며 야외취침 했을 듯. 힘든 날 벤치나 정자에서의 낮잠은 정말 달았다.
3. 국토종주 비수기다
국토종주길 자체가 마을만을 끼고 가는 루트가 아니다 보니 국토종주자들을 타깃으로 장사하는 식당이나 매점이 외진 곳에 위치한 경우가 있다. 이런 가게들은 종주자가 많지 않은 겨울에는 아예 문을 열지 않는다. 화장실 역시 사용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 보니 동파방지를 이유로 잠가 두는 곳이 종종 있다. 크게 불편할 정도는 아니지만, 먹고 마시고 싸는 것이 기본적인 행위다 보니 아무래도 제약이 있으면 좋지만은 않다.
규모가 꽤 큰데도 운영을 하지 않던 쉼터
4. 아름다운 풍경이 없다
국토종주를 하면 하루 온종일 자연 속을 걷게 된다. 아름다운 경관을 질리도록 보게 되는 것이다. 겨울에 종주를 하고 있으면 세상이 이렇게까지 색을 잃을 수 있구나 하고 느끼게 된다. 다른 계절에는 총천연색이었을 산과 들도 겨울에는 죽은 풀과 겨우살이에 뒤덮인 앙상한 나뭇가지들에 가려져 물 빠진 갈색 외에는 색을 찾아보기 어렵게 된다. 안 그래도 지난한 여정인데 더욱 지루해질 수 있음 주의.
쨍한 하늘과 대비되는 칙칙한 풍경
겨울 종주의 장점
1. 그런데 또 그렇게까지 추운 건 아니고
추위를 심하게 많이 타는 편임에도 불구하고 종주하는 동안 추워서 힘들었던 적은 많지 않았다. 하루종일 걷고 있으면 몸에서 열이 나기 때문에 영하 10도로 떨어지지 않는 이상은 딱히 추위가 느껴지지 않는다. 추울 때 출근하는 것과 추울 때 국토종주 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랄까. 추운 날에 걸어서 열이 나면 따뜻해져서 더 신나게 걸을 수 있는 반면, 따뜻한 날에 걸어서 열이 나면 더위를 느끼고 금방 지치게 된다. 그래서 비교하자면 겨울 승.
걷다 보면 더워서 패딩을 벗어들고 다닌 날이 많았다. 심지어는 '반팔 가져올걸!' 하고 후회한 날도 있다.
10년 전 걸을 때도 추위 때문에 고생한 날이 많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번 종주는 정말이지 '이렇게 안 추워도 되나?' 싶을 정도였다. 초반에는 남부지방이라 따뜻하려니 했는데 종주 내내 눈 오는 걸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비는 주구장창 맞고 다녔는데 말이다. 지구야 아프지 마. 빙하가 녹고 있는 이 시대, 겨울 종주 못할 짓은 아닌 것 같다.
2014년 눈덮인 이화령과 2024년 덥기 그지없었던 이화령
2. 햇빛이 약하다
덜 덥고, 모자 선글라스 없어도 되고, 피부 안 타고. 태어날 때부터 까만 편이었고 거기에 나름 자부심이 있는 본투비 다크 스킨으로서 얼굴 좀 타는 게 큰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햇빛에 노출이 덜 되면 좋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날이 따뜻했다면 내놓고 다니는 부위가 많아서 몸뚱아리는 새하얗고 팔다리는 새카만 판다형 인간으로 탔을 터인데 겨울이라 꽁꽁 싸매고 다닌 덕분에 푸바오 사촌이 되는 일은 막을 수 있었다.
그래도 선글라스는 있으면 좋은 듯. 변색렌즈 안경을 쓰고 다녔는데 매우 유용했다
덜 탄다고 해서 선크림을 스킵하는 과오를 범하지는 마시길. 십 년 전에 그렇게 했다가 코만 새카맣게 타서 한동안 후회했답니다. 그리고 북쪽을 향해 가면 왼쪽 얼굴이, 남쪽을 향해 가면 오른쪽 얼굴이 뜨거운 햇볕에 주로 노출되기 때문에 야누스처럼 타고 싶지 않다면 반드시 선크림을 잘 발라주는 것이 좋다.
3. 도로 침수의 위험이 없다
국토종주길은 강을 따라 나있기 때문에 강가를 걷거나 다리를 건널 일이 많다. 그래서인지 '우천 시 또는 침수의 위험이 있을 때 우회하시오' 표지판을 심심치 않게 만날 수 있다. 한 걸음 한 걸음이 고행인 도보종주자에게 우회는 일어나서는 안 될 최악의 불행 중 하나다. 겨울에는 눈이 왔으면 왔지 폭우가 오는 길은 거의 없으므로 침수 우회의 리스크가 낮다.
힘들어 죽겠는 내게 우회하라고 했다면 바닥에 철푸덕 주저앉아 엉엉 울었을지도
4. 점심 도시락을 지킬 수 있다
낮에 식당을 만날 가능성이 낮기 때문에 종주를 하는 동안은 점심 끼닛거리를 사들고 다니곤 한다. 이때 선택되는 단골 메뉴는 뭐니뭐니해도 김밥. 가볍고, 부피 덜 차지하고, 식어도 맛있고, 든든한 데다가 영양소를 골고루 섭취할 수 있는 완전식품이다. 하지만 날이 따뜻했다면 쉴까 걱정되어서 사들고 다니지 못했을 것 같다. 괜히 맛이 간 음식 먹었다가 화장실도 없는 들판 한복판에서 배탈 나면 대단히 곤란한 상황이 되기에.
최애는 김밥이요 차애는 삼각김밥
중간중간 먹는 초콜릿이나 젤리 따위도 날이 더우면 흐물흐물 녹아버리는 대참사가 일어날 수 있는데, 겨울에는 그럴 걱정이 없어서 좋다. 심지어는 물도 시원하게 유지된다! 천연 냉장고 속에서 걷는 것과도 같달까.
평소 군것질을 거의 하지 않는데 국토종주 동안에는 젤리를 입에 달고 살았다
5. 사람이 없다
비수기가 괜히 비수기가 아니다. 마을이 가까워지면 그래도 사람이 좀 보인다지만 겨울 종주는 대부분의 시간을 끝도 없는 고요함 속에서 보내야 한다. 나는 외로움을 잘 안 타는 성격이라 괴로워하지 않고 자발적 고독을 즐길 수 있었다.
도보종주자에게 사람이 없다는 건 꽤나 큰 장점이다. 일단 국토종주길이 자전거를 위해 만들어진 길이기 때문에, 성수기에는 도보종주 자체가 위험할 수도 있다. 내 경우 라이딩하는 사람을 서너 시간에 한 명쯤 마주쳤기 때문에 걷는 데 크게 불편함이 없었다. 자전거길로 걷다가 소리가 들리면 갓길로 피해 주면 되었기에. 보는 눈이 없으니 삼각대 설치해 놓고 사진도 원하는 만큼 건질 수 있고, 피곤하면 벤치나 정자에 누워서 잠깐 눈을 붙일 수도 있고, 아주 자유로웠다.
이런 사진 찍고 생 쇼를 해도 쳐다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애초에 사람이 없으니까.
사람이 없어서 위험하지 않냐는 질문도 많이 받았다. 그런데 오히려 나는 사람이 없어서, 아예 없어서 안전하다고 느꼈다. 만약 내가 강간살해를 저지르고 싶은 범죄자라면 여자가 혼자 걸어 다닐 가능성이 0에 수렴하는 숲이나 들판 한가운데의 종주길보다는 인구밀도가 좀 더 높은 지역에 숨어 기다릴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게다가 요즘은 번화가, 출퇴근길, 직장, 집안에서도 범죄가 일어나기 때문에 이 여행으로 인해 내 명을 재촉한다는 생각은 딱히 들지 않았다.
하지만 범죄란 내가 당하면 100%인 것이므로 남들에게까지 안전했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개인의 안전은 스스로 챙기고 각자의 위험은 알아서 감수합시다.
6. 벌레는 없고 새는 많다
비록 풍경은 을씨년스러울지언정 각종 벌레로부터의 공격을 받지 않아도 되니 이 어찌나 솔깃한 장점인가. 날이 따뜻했다면 모기부터 시작해서 육해공 각각을 주거지로 삼는 오만 크고 작은 벌레들을 피해 다녔어야 할진대, 추운 날 걸은 덕분에 그럴 일이 많지 않아 좋았다. 모기 기피제? 그런 거 필요 없거든요. 날이 따뜻해진 탓에 나비나 거미 같은 걸 종종 마주치긴 했다만 흔하게 일어나는 일은 아니었다.
반면에 새는 정말 많이 볼 수 있다. '이게 국토종주야 탐조여행이야' 글을 이미 하나 발행한 바 있다. 겨울에만 한국을 찾아오는 겨울철새들이 많은 데다가, 나뭇가지도 앙상해서 찾아내기 난이도가 비교적 낮아진다. 새 보기를 좋아하는 예비 종주자라면 겨울 종주를 한번 고려해 볼 만하다.
겨울철새인 고니와 넓적부리. 양평에서는 고니의 집단 소개팅 현장도 목격했다.
그래서 겨울 종주
사실 자발적으로 겨울종주를 선택한 적은 없다. 그냥 그때가 가능해서 그때 했을 뿐이다. 하지만 이렇게 돌아보니 아무래도 좋은 선택이었던 듯하다. 다음에 한번 더 한다고 해도 이 시기를 고려할 것 같다.
'겨울 종주 할까말까' 고민하는 예비 종주자들에게 이 글이 도움이 되기를! 특히나 도보종주자들에게는 자신 있게 추천하는 옵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