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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래 Jun 02. 2024

인간이 싫다가도, 이내 또 좋아지고

국토종주 2일 차, 양산 구간


도보 국토종주 2일 차

구간: 양산 물금읍 ~ 밀양 상남면 (35km)

날씨: 오전 보슬비, 오후에 그치지만 쭉 흐림

통증: 양쪽 앞발목, 어깨, 왼쪽 햄스트링




부스스 일어나서 폼롤러를 좀 굴려 주었다. 바닥에 엎드려 하려니 팔꿈치가 깨질 것 같아서 이불을 끌고 내려왔다. 니플패치로 고통받는 날이 이어지고 있었다. 작은 움직임에도 이렇게 쩍쩍 떨어지면 뭐 두 손 모으고 가만히 앉아만 있으란 말인가. 분명 홍보 문구에 활동이 편해진다고 되어 있었는데!



풀어헤친 짐을 다시 챙겨 넣었다. 전날 짐을 쌀 때는 '뭐야, 왜 짐이 늘었지?' 싶었는데 이날은 넣고 나니 부피가 작아져서 어리둥절. 하루 만에 요령이라도 붙은 건가. 짐 무게가 한쪽에만 쏠리면 안 될 것 같아서 폼롤러 위치를 매일 바꿔주었다.



신발끈 꽉 쩜매고 두 번째 날 일정 시작.



이틀 연속 빗방울 떨어지는 아침. 작은 빗방울이라 일단은 후드와 패딩에 달린 모자로 버텨보기로 한다. 안경에 빗방울이 떨어지면 성가시므로 렌즈를 꼈다. 양안 시력이 다른데 어떤 렌즈가 어느 쪽인지 표시를 안 해와서 방향이 섞이지 않도록 조심조심 들고 다녀야 했다. 야바위꾼이 된 기분이었달까.



아침 일찍 여는 동네 김밥집에서 김밥을 한 줄 포장했다. 따끈따끈한 김밥을 받아 드니 지금 당장 열어서 한입 하고 싶어 진다.



하지만 식당에 앉아서 식사할 수 있는 귀한 기회를 그렇게 놓칠 수야 없죠. 문을 막 연 듯 한 복어집에 가서 밀복국을 주문했다.


"아이고. 밥이 안 돼서... 좀 기다려야 하는데..."

"얼마나 기다려야 돼요?"

"5분 정도..."


지어 나온 고슬고슬한 밥을 받아서 한 입 떠먹어 보니 5분 정도야 충분히 투자하고도 남을 맛. 복껍질무침도 먹고 싶었는데 마침 반찬으로 나와서 감사히 먹었다. 생각보다 생선 살이 없어서 아쉬웠지만 그래도 충분히 든든한 아침밥이었다.



어제 여정을 마무리했던 바로 그 지점으로 정확히 돌아와서 루트 기록하는 어플을 켰다. 어제 암흑에 파묻혀 있을 때는 다가갈 엄두도 나지 않았던 산이 이제는 그냥 평범하고 조금 축축해 보일 뿐이라는 사실이 묘하다.



얼마 안 가 두 번째 인증센터인 양산 물문화관 인증센터를 만났다. 10년 전에는 해가 질까 봐 도장을 찍는 둥 마는 둥 하고 허겁지겁 지나쳤던 곳인데, 아침에 오니 여유가 있어 좋다.


문제는 이 외진 곳에 혼자가 아니었다는 사실. 자전거를 타고 온 할아버지 한 명이 갑자기 바지를 내리고 노상방뇨를 하기 시작했다. 단순히 교양이 없는 인간일 수도 있었겠지만 주변에 아무도 없는 상황에서 성기를 내놓고 소변을 보는 성인 남성의 존재가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았다면 그것도 거짓말일 터. 머리를 짧게 자른 이후로 나가는 사람들(특히나 공중화장실에서 마주치는)이 으레 그러하듯이 나를 남자로 착각해 주기를 간절히 바라며 인증 도장을 찍었다.


그때였다. 그 할아버지가 좁디좁은 인증 부스로 불쑥 쳐들어온 것은. 한 명이 겨우 들어갈 정도의 공간에 굳이 굳이 비집고 들어온 그는 내 앞으로 손을 뻗어 부스 안쪽에 놓인 스탬프 잉크패드를 집으며 '이게 뭐야? 이게?' 하고 물었다.


정말 뭔지 몰라서 묻는 것 같지는 않았다. 인사는 물론이요 여기서 뭐 하냐, 왜 왔냐 등의 일반적인 질문 따위 모두 제끼고 냅다 물어볼 정도로 희귀하고 신비로운 물건도 아니었거니와, 손을 뻗지 않고도 충분히 집어서 볼 수 있는 바깥쪽에 똑같은 잉크패드가 두 개나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의 팔이 내 몸에 닿지 않도록 밀어내며 대꾸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일단은 무시당한 채로 가도록 하는 것이 상책이었다. 통하지 않으면 대응할 수 있도록 다른 쪽 손으로는 삼각대를 움켜쥐었다.


답이 돌아오지 않는 질문을 던지며 애꿎은 잉크패드만 열었다 닫았다 한참을 만지작거리던 노인은 이내 자리를 떴다. 별일 없어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불쾌한 기분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나는 얼른 자리를 벗어났다.



물안개 낀 강을 가로지르는 데크길을 걷고 있자니 물 위를 걷는 신비로운 느낌이었다. 마을이 사라지고 사람이 안 보이기 시작하니 걷기가 꽤나 심심했다. 노래라도 부를까 했지만 아직까지는 쑥스러워서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발목 앞쪽 통증이 계속되었다. 쉬고 싶었지만 이상하리만치 쉼터나 벤치가 나오지 않았다. 바닥에 앉자니 잔뜩 내린 빗물을 엉덩이가 다 빨아먹을 것 같아서 내키지 않았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면서 걸었다. 다행인 건 4시까지 온다던 비가 11시 반쯤 그쳤다는 사실이다.


*의 3D적 표현
젖은 풀들이 마치 소떼를 그린 추상화 같다


텅 빈 쉼터를 만나서 달게 쉬었다. 봄가을 성수기에만 운영하는 자전거 쉼터인 모양이다. 아무도 없는 천막 안에서 아린 발목에 파스를 잔뜩 뿌려 주고 초코바를 하나 까먹었다. 휴식이 길어지기 전에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내가 걷지 않으면 남은 거리는 줄어들지 않는다. 앞으로 나아가려면 걸어야만 한다. 그 어떤 꼼수도 통하지 않는 길을 나는 걷고 있다.



전날의 목적지였던 원동역을 만났다. 꽤나 멀리 있는 곳이었군. 기차역이 있으니 먹고 잘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것인데 막상 와서 보니 마을까지 가려면 돌아돌아 원거리를 가야 하는 데다 모텔은커녕 낡은 민박조차 없을 것 같은 분위기였다. 일찍 샷따를 내린 것이 못내 아쉬웠는데 물금에서 묵어가기로 한 게 얼마나 훌륭한 결정이었는지 여기 와서야 알게 되었다.



자전거와 보행자 외에는 들어올 수도 없는 이 길에 이 암호틱한 필기가 떨어져 있게 된 비하인드 스토리가 궁금네요.



비가 와서인지 체력이 떨어져서인지 몸이 자꾸 처지고 힘이 안 나서 벤치에 누워 잠깐 눈을 붙였다. 사람이 거의 없다시피 한 길이라 마음 편히 잤다. 프로 노숙러. 노숙이 적성.



후투티 보고 신나서 후투티 송 지어 불렀던 게 어제인데, 어느새 후투티를 세 마리째 보고 있다. 너 꽤나 흔한 새였구나?


새에 대해 생각하다가 물까치의 현란한 하늘색에 관심이 가 닿았다. 어디에 있든 예쁜 날개 색이 눈에 띄는 물까치. 보통의 새들은 나뭇가지 사이 숨기 좋은 색을 가지고 살아가는데 어쩌다가 물까치는 하늘색 새가 되어버렸을까. 물가에 사니까 하늘색이 보호색인가? 여기까지 생각을 했는데 갑자기 물까치 여섯 마리가 푸드득 하고 날아갔다. 야 너희도 양반은 못 되는구나.


아무튼간에 새가 참 많았던 길이었다. 큰 왜가리가 갑자기 날갯짓을 해서 깜짝 놀라기도 했다.



세월이 아니면 칠해낼 수 없는 색을 입은 거대한 구조물들이 늘어선 인기척 하나 없는 길을 걷고 있자니 디스토피아에 혼자 남겨지면 이런 기분이려나 싶었다. 마침 날씨도 우중충하고 축축하고.



홀로 떠난 여행에서 사진을 담당해 주는 나의 소중한 고릴라 삼각대. 셀카봉이나 일반 삼각대는 거치할 곳이 마땅치 않으면 고정이 어려운데 이 친구는 아무 데나 매달아 두면 되어 매우 편리하다. 단점은 머리통이 90도로 돌아가주지 않아서 세로 사진 찍기가 상당히 애매함.



갑자기 맞은편에서 열댓 명 무리가 걸어와서 깜짝 놀랐다. 근방에 마을도 없는데 어디에서 나타난 거지? 분위기는 무슨 자연관찰 투어라도 나온 듯했다.


가방이 짓누르는 바람에 어깨가 너무나도 아팠다. 왼쪽 햄스트링도 끊어질 것 같았음. 바른 자세로 걸어야 한다고 스스로를 계속 다그쳤지만 힘들어서 자꾸 무너져 내렸다. 밀양까지 1.5km. 조금만 힘내자!



마치 고대의 보물지도라도 되는 양 해져버린 안내도. 자전거길도 생긴 지가 10년이 넘었으니 보수해야 할 시설들이 여기저기 보인다.


밀양까지 1km 남았다는 표지판을 보고 1000걸음을 세며 걸었다. 한 걸음에 1m라고 생각했기에 1000을 세면 밀양일 거야! 한 것이다. 이 도전을 통해 내 자리가 생각보다 짧음을 알게 되었다. 1200걸음쯤 걸어야 1km가 될 듯.



기지국이 보이면 괜히 반가운 나는야 통신사람.



뒤쪽에서 자전거 속도 줄이는 소리가 들렸다. 아침에 봉변당한 사건으로부터 몇 시간 채 지나지도 않았는데 또 뭐냐고. 본능적으로 경계 모드가 켜졌다. 이내 가벼운 차림의 아저씨가 스쳐 지나가나 싶더니 내 앞에서 속도를 늦췄다.


"커피 드시고 하세요~"

"어... 어? 네, 네!"


예상치 못하게 건네진 캔커피에 잠시 사고가 멈췄다. 정신을 차리고 뛰어가서 커피를 받았다. 다시 속도를 올려 페달을 밟는 아저씨의 뒤통수에 대고 '감사합니다!!!!!' 하고 소리를 질렀다. 별 일도 아니라는 듯 돌아보지도 않고 손만 휘적휘적 내저으며 가던 길 가시는 쿨함에 한번 더 감동을 받았다.


그래 세상에 이런 사람도 있고 저런 사람도 있는 거지. 좀 전까지만 해도 인간이 싫고 되도록 피해야겠다는 마음이었는데 커피 한 캔에 인류애가 다시금 넘실넘실 차오른다. 인간에 대한 애정을 잃지 않게 해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캔커피 아저씨.



밀양까지 50m! 오늘도 시계를 넘는다!



10년 전 창원에서 밀양으로 막 넘어온 나, 그리고 양산에서 밀양으로 넘어온 10년 후의 나.



밀양 첫 번째 표지판. 눈을 부릅뜨고 왔음에도 No.1을 보지 못했다. 어쩌면 모든 표지판이 다 설치되어 있는 건 아닐지도?


이날 전반부는 대체로 데크길이다. 강가를 걸을 수 있어서 좋다가도 끝도 없이 펼쳐지는 변함없는 풍경에 지루해지는.



시 경계를 안내하는 표지판이 있어서 또 한 장 찍어 주었다. 난 이런 것 좋아한다. 걸어서 국경 넘기, 걸어서 시계 넘기, 이런 것들.



회색 천지였던 길 이제는 끝인가? 대나무숲과 늘어선 벤치들 발견.



기쁜 마음으로 앉아서 다리를 스트레칭해 주며 김밥을 까먹었다. 따뜻할 때 먹었으면 더 맛있었겠지만... 그래도 맛도리였다!


오늘은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지도를 늘였다가 줄였다가 하며 숙소를 찾았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잘만한 동네가 보이지 않았다. 불안했지만 일단은 걸어 보기로 했다.



다 먹은 김밥을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같은 김밥집 쓰레기가 두 개나 더 있었다. 사람들 생각하는 거 다 똑같구나 싶어서 웃었다.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지옥의 밀양 구간, here I co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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