컵라면과 김밥으로 요기를 하고 걷기 후반부의 휘슬을 불었다. 아침의 비구름은 온데간데없고 새파란 하늘이 함께해 주었다. 화명생태공원의 아름답지만 길고 지루한 길을 걷기 시작했다.
발과 고관절이 계속 아팠다. 좀 푹신한 길을 걸으면 낫지 않을까 싶어 부러 잔뜩 쌓인 보드라운 나뭇잎을 밟으며 걸었다.
길디길고 길디길고 길디긴 종주길
풋살 하는 사람들을 지나쳤다. 내가 뛰고 있는 풋살팀은 이 당시에 겨울방학 중이었기에 공 차는 일이 그리워졌다.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물든 세상이 예뻐서 내 사진을 한 장 남기고 싶었다. 사람들이 꽤 지나감에도 불구하고 삼각대를 설치해 놓고 셀프 포크레이트 촬영을 시도했다.
민망함과 눈부심을 이겨내고 건진, 마음에 쏙 드는 내 사진! 짧게 잘라서 대충 털어말린 앞머리, 갈색 눈동자와 눈두덩이의 점, 캐주얼한 복장과 배낭, 제법 여행자 같아 보이는 모험 중인 나, 모든 것이 마음에 든다.
멋진 반영
현재 시각 4시 18분. 양산까지 800m 남았다. 오늘 무슨 일이 있어도 부산 뜬다! 7시 반까지 걸으면 할당량인 35km를 채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이 생겼다.
칙칙한 겨울 풍경에 색을 더해 주던 남천나무
호포역을 지나니 인구밀도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이따금 자전거 탄 사람 한둘이 지나갈 뿐이었다. 하루 종일 걷고, 스트레칭하고, 게이트볼 하는 어르신들로 북적이던 길이 어느새 고요해졌다.
양산 In! 하루 만에 시계를 넘을 수 있다니 기쁘고 짜릿하다!
하지만 부산 No.40과 양산 No.1 표지판을 놓친 건 왠지 분하다. 숙소를 찾는답시고 핸드폰을 들여다보다가 그냥 지나쳐버린 모양이다. 고개를 드니 양산 No.2 표지판이 있었다. 아니 어쩌면 그냥 없었던 것일지도. 아무튼 힘들고 기쁘고 힘들었다.
해는 지고 길은 고요하고
지도상으로는 잘 데가 마땅히 보이지 않아 한참을 고민했다. 양산물문화관 인증센터를 지나면 검색되는 숙소가 독채펜션밖에는 없었다. 좀 더 가면 원동역이 있는데, 비록 숙소가 검색되진 않지만 기차역 앞이니 낡은 모텔이라도 하나 있지 않을까? 15km 정도 더 걸어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커피 맥주 그리고 꼬리 곰탕 (?)
이어지는 끝도 없는 기나긴 길. 차라리 발만 아플 때가 덜 힘든 것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발이며 다리며 어깨 허리 등 모든 신체부위가 다 아프기 시작하니 이제는 통증이 느껴지지도 않을 지경에 이르렀다.
양산 황산공원에 입성했다. 해가 지고 있어서 마음이 초조하긴 했지만 너무 힘들어서 더 갈 수가 없었다. 무거운 가방을 내리고 벤치에 앉아 잠깐 쉬었다. 아침에 좀 더 일찍 나올걸... 후회가 됐다.
3km만 더 걸으면 양산물문화관 인증센터! 힘을 내 보려고 했지만 어깨를 짓누르는 배낭의 무게가 그 어느 때보다도 버겁게 느껴졌다.
여섯 시 반밖에 되지 않았는데 해가 거의 떨어졌다. 겨울종주의 장점은 해 떠있는 시간이 짧다는 것. 날이 슬슬 추워지고 있었다. 원래 목적지였던 원동역까지 갈 경우 예상 도착 시간은 9시. 이미 지쳐 있는 상황에서 두 시간 반을 더 걸어야 했다. 가로등도 없는 길을 밤에 걷자니 영 내키지 않았다. 이번에는 되도록 밤길 걷기를 지양하자고 마음먹었기에, 나는 바로 옆 동네인 물금에 여장을 풀기로 했다. 끝내고서야 하는 말이지만 이건 정말 첫날이라 할 수 있는 럭셔리한 생각이었달까. 밤길 걷기는 종주하는 내내 일상이었다.
어스름한 산이 근사했다. 한편으로는 두렵다는 생각도 들었다. 여기에 두 시간만 일찍 왔어도 좀 더 걸어봤을 텐데. 내일은 좀 일찍 나와서 선택의 폭을 넓혀야겠다고 생각했다.
10년 전 종주 때 자전거민박 사장님의 강매(?)를 거절하지 못하고 중간에 점프를 한 적이 있다. 차에서 내리고 스스로를 속인 것 같은 기분에 마음이 무거워 걸음을 멈추고 한참을 서 있었다. 그 기억은 당시 종주를 끝낼 때까지 사라지지 않았고 시간이 많이 지난 지금까지도 찝찝하게 남아 있다.
그래서 이번 종주는 절대로 점프를 하지 않겠노라고 마음먹었다. 부산부터 인천까지의 길을 오롯이 내 발자국만으로 이어보겠노라고. 다음 날 정확한 지점으로 돌아와 시작할 수 있도록 현재 위치를 캡처해 두었다.
마을을 향해 가다가 이번 종주에서의 첫 고라니를 만났다. 풀숲을 펄쩍펄쩍 뛰어다니기에 처음에는 큰 개인 줄 알았는데 점프력을 보면 고라니였던 듯. 10년 전에는 밤길을 걷다 보면 고라니가 자꾸 울어서 소름이 끼쳤는데, 이날 만난 고라니 한 쌍은 그냥 조용히 점프를 하다가 사라졌다.
아무도 없었던 어두운 길에서 가로등이 잔뜩 켜진 밝은 마을로. 물금은 생각보다 번화한 동네였다. 모텔도 여러 개 있고 심지어는 버거킹까지 있었다. 나중에야 알게 되지만 원동역 앞은 정말 아무것도 없는 동네였고 루트와도 멀리 떨어져 있어 많이 돌아가야 했기 때문에 물금에서 묵어가기로 한 건 정말 잘한 선택이었다.
고생했으니 끝내주게 맛있는 걸 먹어주겠다며 약 세 시간 고심한 끝에 고른 돈까스집... 은 17분을 더 걸으라기에 자신이 없어서 눈앞에 마침 나타난 돈까스집으로 들어갔다. '혼자 오셔도 환영'이라고 적어놓은 생선구이집의 멘트가 솔깃했으나 이 날따라 영 생선에 구미가 당기지 않았다. 돈까스는 맛있었다. 천상의 맛까지는 아니었지만 이 정도면 낫 배드.
모텔은 낸 돈을 생각하면 꽤나 가성비가 괜찮았다. 일단 방이 어마어마하게 넓었음. 조금 추웠는데 물 받아서 거품목욕을 하고 나니 열이 올라서 더워졌다. 그런데 방 이곳저곳에 카메라 그림 붙어 있고 (물론 알 수 없는 감성의 인테리어 목적이었겠지만) 자꾸 화장실에서 뭐 떨어지는 소리가 나서 조금 무서웠달까.
국토종주 첫날은 이렇게 마무리하기로. 내일은 꼭 꼭 반드시 일찍 출발하리라고 다짐하면서 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