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사히 부산행 기차에 올라탔다. 조금만 더 뛰었다면 가슴이 터져버렸을지도 모르겠다. 긴 휴가를 떠나기 전 업무를 갈무리해 두기 위해 아침에 잠깐 사무실로 출근한 것이 화근이었다. 인수인계가 뜻하지 않게 길어지는 바람에 40분안에 기차를 타야 하는 타임어택 미션을 수행할 처지에 놓인 것이다.
같이 일하는 부장님께서 차로 데려다주겠다고 하셨지만, 차가 막힐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어 전철을 타기로 결정했다. 부장님이 법의 테두리 안에서 해낼 수 있는 최선의 속도로 역까지 태워다 주신 덕분에 열심히 달려 시간 안에 전철 플랫폼에 당도할 수 있었다. 좋아, 이 정도면 여유 있게 도착한다.
불행히도 서스펜스는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전철이 제 시간을 2분이나 넘겨 도착한 것이다. 여유 있었던 마음에 초조함이 보글보글 끓기 시작했다. 전철 도착 예상 시간에서 기차 출발 시간까지는 약 4분 정도 남아 있었다. 나는 '빠른 하차' 문에 들러붙다시피 서 있다가 문이 열리는 순간 총알처럼 튀어나가 젖 먹던 힘까지 써서 달리고, 달리고, 달렸다. 사자에게 쫓기는 가젤의 간절함으로 백여 개의 계단을 뛰어올랐다. 부산행 기차는 나를 삼키자마자 문을 닫고 출발했다. 탔다, 탔어!
낯선 아저씨 세 명과 테이블에 둘러앉은 채로 부산까지 가게 되었다. 타이밍 좋게 취소된 표를 잡은 덕분으로 세 시간을 입석으로 가는 신세를 면했으니 이마저도 감지덕지다. 도착하면 해야 할 일들을 적어보고,저쪽 자리에서 목청 높여 여자 얘기를 떠들어대는 중고차 딜러 둘을 때때로 흘겨봐주며, 나는 남쪽으로 남쪽으로 향해 갔다.
2014년 1월 30일, 국토종주를 마치고 서울행 기차를 탔던 나
10년 전, 18일간의 국토종주를 마치고 부산에 도착했던 스무 살의 나. 부산에 혼자 와 본 건 난생처음이었기에, 나는 제법 신이 나 있었다. 깡통시장도 가고 비빔당면도 먹고 씨앗호떡도 먹고 부산어묵도 먹어야지! 히힛!
하지만 안타깝게도 내게 주어진 시간은 그리 많지 않았다. 종주를 마친 날이 하필이면 설 전날이었던 것이다. 서울행 티켓의 가치가 가장 높아지는 바로 그날. 하루 자고 가자니 티켓이 없고, 연휴가 끝날 때까지 부산에 머무르자니 비용이 부담되고, 참으로 아쉬운 상황이었다.
당시 남자친구가 고맙게도 당일 저녁 서울행 티켓을 가까스로 하나 구해주었다. 내게는 약 일곱 시간이 남아 있었다. 한국인의 집념을 발휘하여 깡통시장도 가고 비빔당면도 먹고 씨앗호떡도 먹고 부산어묵도 먹고 거기에 유부주머니까지 야무지게 먹어주긴 했다만... '충분히' 놀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깊게 남아 십 년이 지난 이날까지도 선명했던 것.
그래서 이번에는 꼭 하루 일찍 부산에 가고 싶었다. 가보고 싶었던 부산 식당들도 들러 보고, 쉬엄쉬엄 구경도 하고, 아쉬웠던 스무 살 나의 마음을 달래준 다음 여정을 시작하고 싶었다. 맡은 바 소임을 훌륭하게 다해낸 허벅지 덕분에 그때의 한을 풀 수 있게 되었다. 부산으로 간다!
부산역 플랫폼에 올라오자마자 마주친 건 젤리와 사탕 따위를 무게 달아 파는 위니비니라는 가게였다. 중학생 때 얼마 되지도 않는 용돈으로 감질나게 사 먹던 추억이 있는 곳. 성인이 된 이후로는 이에 들러붙는 게 싫어 발길을 끊었는데, 이 날따라 어찌 된 일인지 한번 들어가 보고 싶다.
들어가서 한참을 구경하다가 '에이, 안 먹겠지' 싶어 그냥 발길을 돌려 나왔다. 목적지까지 버스를 타야 하기에 네이버 지도가 일러주는 출구로 나왔는데, 어째 주변이 휑하다. 이런 곳에 버스가 온다고? 가득 드는 의심을 애써 무시하며 기다려 보았지만 아니나 다를까 오지 않는 버스.
역전 버스 많이 오는 정류장에서 기다리는 것이 맞을 것 같다는 판단이 들어 다시 역으로 돌아갔다. 다시 마주친 위니비니. 이건 운명이야 어쩔 수 없어.
평소에 사탕이나 초콜릿, 젤리 같은 군것질을 거의 하지 않는 나이기에 '사봤자 안 먹을 것 같은데...'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젤리들은 꼭 사고 싶었다. 안 먹으면 걸으면서 해치우겠지 뭐. 젊은 직원의 말투에서 은근하게 묻어나는 사투리를 들으며 부산에 왔음을 실감했다.
결말을 미리 스포하자면... 나는 반나절도 안 되어 모든 젤리를 먹어치웠고, 국토종주 하는 내내 입에 젤리를 달고 사는 젤리 좋아 인간이 된다. 그리고 국토종주가 끝난 지금 다시 젤리와 어색한 사이 됨.
전포에 도착했다. 부산에는 몇 번 와 봤지만 전포를 찾은 건 이번이 처음이다. 한남대교 북단을 향해갈 때 보이는 것의 파스텔톤 버전 풍경 같네.
전포 온 이유: 라멘 먹으려고.
부산까지 와서 고작 라멘?!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이 집은 정말이지 궁금했다. 상호명이 '나의피는라멘으로되어있어'인 집의 라멘 맛은 과연 어떨 것인가.
메뉴는 고민할 필요도 없이 이에케 라멘으로 선택했다. 한국인 아재들에게 국밥이 있다면 일본인 아재들에겐 이에케 라멘이 있다고 한다. 걸쭉하고 진하고 고기 냄새나는 국물, 넉넉하게 올라가는 차슈와 시금치, 국물에 푹 적셔 싸 먹으라고 내주는 김까지. 든든-하게 한 끼 할 수 있는 그런 라멘이다. 살기 위해 먹는다는 후배 S에게 맛이라는 차원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준 메뉴이기도 하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나의 미각을 만족시키지는 못했으니. 이에케 라면은 보통 염도가 높은 편인데, 짜게 먹으면 물을 많이 마시게 되고 화장실을 자주 가야 하니 덜 짜게 옵션을 선택한 것이 화근이었다. 짠 걸 먹기 싫으면 이에케를 주문하지 말았어야지-!! 밍밍한 국물맛이 못내 아쉬웠다.
가필드 닮은 고양이
부른 배를 두드리며 은행에 갔다. 시골에서는 카드를 받지 않는 집도 있을 수 있으니, 현금을 좀 찾아둘 생각이었다. ATM에 체크카드를 넣고 출금 버튼을 눌렀다.
어라, 그런데 당황스럽게도 출금이 불가한 카드라는 메시지가 뜬다. 혹시나 싶어 다시 시도해 봐도 마찬가지다. 창구로 가서 물어보니 출금 설정이 안 되어 있어서 풀어야 하니 신분증을 달라고 한다. 평소에 잘 써오던 모바일 신분증을 내미니 이건 주민등록번호가 다 보이지 않아서, 행정안전부 어플에서 받을 수 있는 운전면허증만 인정이 된다고 한다. 자리에서 어플을 다운받아 보니, 운전면허증 갱신 기간이라고 발급해 줄 수가 없다고 한다.
아니 일이 이렇게까지 꼬일 수가 있나. 일단은 방법이 없어 은행을 나왔다. 다행히도 배낭에는 집에서 챙겨 온 현금 5만 원이 있었다. 이걸로 일단은 연명해 보고, 정 안 되면 대구쯤 가서 만나는 편의점에서 현금서비스라도 받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인증수첩을 구매하기 위해 낙동강하굿둑인증센터에 왔다. 10년 전처럼 온라인으로 구매할까 했지만, 홈페이지 재정비중이라 오프라인 구매만 가능했다. 혹시나 재고가 없으면 대참사인지라 미리 전화해 보고 방문했다.
악용사례가 많아서인지 이제는 신분증을 제시해야만 수첩을 구매할 수 있다. 수첩의 고유코드와 내 신상이 매치되기 때문에 도장을 찍어 타인에게 판매할 수 없게 되었다. 참 별의별 일이 다 있구로.
아무튼 앞으로 보름 넘게 함께할 지도와 수첩 구매 완료. 첫 번째 도장은 내일 출발할 때 찍기로 했다.
긴 여정이 시작될 지점!
그간 가보고 싶었으나 도심과는 거리가 있어 매번 포기해야만 했던 부산현대미술관. 낙동강인증센터에서 도보 5분 거리에 있길래 냉큼 방문해 보았다. 공사 중이라 볼 수 있는 공간이 많지는 않았다.
을숙도 생태공원. 한 바퀴 둘러보고 싶었지만 이미 체력이 방전된 상태라 쿨하게 보내주기로. 벌써부터 무리해서 좋을 것 없으니.
부산에 왔으니 어묵 먹어줘야죠. 하지만 딱히 맛있지는 않았다. 난 불어 터져서 국물이 잔뜩 밴 어묵이 좋아. 물떡도 하나 먹을까 했지만 저녁 먹기 전까지 소화시킬 수 없을 것 같아서 포기했다.
내일 출발지인 낙동강하굿둑인증센터에서 멀지 않은 곳에 숙소를 잡았다. 10년 전처럼 찜질방에서 잘까 하다가, 괜히 허리 배기고 잠 설치면 내 손해지 싶어 적당한 가격의 모텔을 골랐다. 이번 종주의 모토는 뭐다? 서른의 내게는 10년 전의 체력은 없을지언정 돈은 충분히 있다.
체크인 전에 편의점에서 과자를 이것저것 사서 넣어두고, 약도 좀 보충했다. 감기약과 배탈약을 조금 가져왔는데, 최근 배탈이 잘 나고 있는 데다가 중간에 약국을 찾지 못할까 봐 걱정이 되어 추가로 구매했다.
그리고 그것은 종주 내내 내린 것 중 최악의 결정으로 선정된다. 약이 시럽이었던지라 무게가 꽤 나갔는데, 내가 생각보다 자주 배탈이 나지 않아서 그걸 끝까지 이고지고 다녀야 했다. 버리자니 또 돈이 아까워서리. 그리고 아무리 낙후된 지역에도 약국은 꼭 하나씩 있더라. 상비약은 최소한으로 준비합시다...
누워서 좀 쉬다가 저녁을 먹으러 나왔다. 부산 지하철은 도착할 때 갈매기 소리가 난다. 지하철 좌석 패턴도 갈매기다. 갈매기에 진심인 도시.
먹을 곳이 없어서 버스정류장의 따끈따끈한 의자에 앉아 먹었다
멀리까지 와서 먹고 싶었던 건 바로 이 만두. 열었다기엔 닫은 가게가 너무 많고 닫았다기엔 영업하는 가게가 제법 있었던 저녁 시간의 시장에서 예전부터 가보고 싶다고 표시해 두었던 만두집을 찾아냈다.
좋아하는 음식 이름 나열로 지구 한 바퀴를 돌릴 수 있을 것 같은 나지만, 만두는 그중에서도 상위권에 속하는 최애 음식 중 하나다. 특히나 피가 얇은 찐만두를 좋아한다. 사알짝 바삭하게 구워주면 금상첨화다. 고기와 김치를 번갈아가면서 먹는 것도 좋아한다.
수정시장의 명당만두는 그 모든 것을 충족하는 환상의 만두였다. 엄청나게 화려하다거나 하진 않지만, 만두를 구성하는 백 개의 조건이 있다면 백 점을 꽉 채워 받을 만한 그런 충만한 만두가 바로 이곳의 만두였다. 부산에 내린 이래로 살짝 실망스러운 맛의 음식들이 이어져 아쉬웠는데, 이 만두 덕분에 행복해졌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목격하고 말았다. 지글지글 튀겨지고 있는 찹쌀호떡을. 딸기라떼가 먹고 싶어 찾다가 실패한 참이라 디저트로 이거라도 먹어야겠다며 포장마차로 들어갔다.
아니 그런데 이렇게 인기가 많을 일인가요. 살다살다 호떡집 웨이팅을 다 해보네. 대체 누가 호떡을 12개씩 사가냔 말입니다. 내 앞에 줄 서있던 아저씨가 기다림에 지쳤는지 호떡이 잘 팔리냐는 둥 호떡을 두 개 살지 세 개 살지 고민이라는 둥 여기저기 말을 걸었는데 바로 뒷줄 아주머니가 "아 좀 조용히 좀 하이소! 시끄럽네!" 샤우팅 하시는 바람에 조용해지심.
이렇게 작은 나라인데도 사는 지역에 따라 쓰는 말투가 달라지는 게 신기하다. 여기에서의 나는 한 마디만 말해도 티가 나는 외지인이다. 애매하게 사투리를 따라 썼다가는 되려 더 티를 내는 모양새가 되겠지.
가까스로 받아 든 호떡은 정말 정말 정말 정말 정말로, 정말을 오백사십 번은 더 쓰고 싶을 정도로 맛있었다. 보름달 마냥 큼지막하니 갓 용광로에서 건져 올린 양 뜨끈뜨끈한 찹쌀호떡. 철판에 들이붓듯이 썰어 넣은 마가린으로 자글자글 튀겨 나온 덕분에 짭짤하고 바삭한 겉껍질이 찹쌀 반죽 특유의 쫠깃쫠깃함과 대비되어 환상적인 맛을 자아냈다. 2대를 이어 온 50년 전통의 호떡이라더니 인정 또 인정합니다.
좋아, 이만하면 미련 없다. 부산 맛있는 도시로구만.
나는 숙소로 돌아가서 씻고 자리에 누웠다. 하룻밤만 자면 국토종주가 시작된다. 이번 여행을 하는 동안은 어떤 일들이 일어나고, 어떤 사람들을 만나게 될까? 어떤 위기가 찾아오고, 어떻게 극복해 낼까? 10년 전과 달라진 건 무엇이 있을까? 나는 과연 끝까지 완주할 수 있을까?
앞으로 펼쳐질 날들에 가득 채워진 미지수들. 직접 걷고 직접 살아내며 답을 채워갈 생각에 가슴이 뛰었다. 이런저런 장면들을 상상하다 스르륵 잠이 들었다.
2014년 1월 30일, 인천에서 부산까지 걸어온 나. 그리고 2024년 1월 30일, 부산에서 인천까지 걸어갈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