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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래 May 26. 2024

국토종주를 준비하며

국토종주 같은 대규모 이벤트를 앞두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별다른 준비를 하지 않았다. 정석대로라면 체력도 좀 기르고, 미리 걸어 보고, 렇게 차차 준비를 했어야 하겠지만... 당시의 나, 좀 안일했달까. '그나마 이 정도는 했다' 수준의 사전준비 이야기.


D-38, 서울둘레길 걸어보기


따라 걷기만 하면 서울을 한 바퀴 돌아볼 수 있다는 서울둘레길. 8개 코스로 이루어져 있고 완주하는 데에는 일반적인 속도로 약 8일 정도가 소요되는 듯하다.


크리스마스이브에 연차를 내고 쉬게 된 나는 스스로의 체력도 측정해 볼 겸 둘레길의 작은 부분을 가볍게 걸어보기로 했다. 긴 시간 걸어본 게 얼마만이었는지. 한때는 걷는 걸 참 좋아했는데.


오랜만의 도보여행은 제법 재미있었다. 산길의 비중이 꽤나 높은 코스라 더욱 좋았다. 나는 산에서 유독 빠르다. 함께 산을 탄 친구가 다람쥐 같다고 한 적도 있다. '둘레길'이다 보니 가파른 경사는 없고 완만한 산등성이를 걷는 느낌이었다. 신이 나서 폴짝폴짝 뛰어다녔다.



길을 따라가다 보니 평소였다면 결코 와볼 일이 없었을 듯한 동네들도 지나가게 됐다. 영화 <기생충>에 나오는 것처럼 담장이 험악하리만치 높고 화려한 집들이 연이어 등장하길래 이 동네는 뭐 하는 동네인가 하고 봤더니 아니 글쎄 여기가 그 유명한 평창동이라는 거예요. 친구 사는 곳이라 이름은 들어 봤지만 하도 멀어 평생 갈 일 없을 것 같았던 정릉도 걷다 보니 우연히 지나가게 됐다.


날이 날이니만큼 걷는 동안 젊은 사람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대신 정말 많은 아주머니 아저씨, 할머니 할아버지들을 마주쳤다. 내가 올라가려는 길을 내려오시며 '여기 다 얼었어요, 조심해' 하고 걱정해 주시던 할머니, 뭐라고 칭찬을 하셔서 감사하다고 했더니 '어머나! 아가씨였네! 남학생인 줄 알았어~' 하고 웃으시던 아주머니, 여기 와보라고 손짓을 해서 의심을 가득 안고 다가갔더니 눈 소복이 쌓인 개천을 가리키며 '이거 햇빛 받아서 반짝거리는 게 너무 예뻐서, 좀 보라고...' 하시던 할아버지까지.


정말로 예뻤던 반짝이는 눈

익숙한 곳을 벗어나서 하루 걸었을 뿐인데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이렇게나 다양한 이야깃거리가 절로 생긴다. 그래 이런 게 도보 여행이었지. 부산에서 인천까지 여러 날을 걸으면 또 얼마나 많은 사람을 만나고 얼마나 많은 에피소드가 생길까. 가슴이 설레기 시작했다.


D-35, 폼롤러 구매하기


서울둘레길을 걸으며 챙겨야 할 준비물을 메모해 두었다. 그중 하나가 배낭에 들어가는 작은 폼롤러였다. 중간에 고관절 통증으로 속도를 줄여야 했는데, 스트레칭을 해도 별반 차도가 없었다. 폼롤러를 가지고 다니면서 지친 근육을 풀어주면 좋을 것 같았다.


마침 시중에 30cm짜리 폼롤러가 판매되고 있었다. 온라인 쇼핑몰을 넘나들며 가장 저렴한 옵션을 찾다가 마침 당근에서 새것과 다름없는 물건이 판매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집에서 꽤 멀리 떨어져 있는 동네였지만, 여행이라 생각하고 거래를 잡았다. 별 탈 없는 문고리거래였다. 아파트단지에서 길을 잃었다는 사실만 빼면. 아니 뭔 놈의 구조가 이렇게 복잡해요. (20분 정도 방황하다 결국 탈출하긴 했다.)


D-7, 워킹화 구매하기


나는 소문난 미니멀리스트로, 뭔가 구매하는 행위 자체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내 지출은 대부분 사라지는 것들, 생필품이나 먹을 것을 위해 이루어진다. 한번 산 것은 닳거나 구멍이 날 때까지 쓰고, 안 쓰게 된 것은 당근으로 팔거나 나눔 하거나 기부한다.


이런 나지만 국토종주를 앞두고는 기꺼이 신발 한 켤레를 새로 살 마음이 들었다. 10년 전, 운동할 때 운동화를 신어야 하는 당위성에 대한 이해조차 없었던 그 시절, 나는 누가 사다 놓았는지도 모르는, 신발장에 처박혀 있던 운동화를 신고 국토종주를 떠났다.


당시에는 별 생각이 없었다. 물론 발을 뒤덮은 물집 때문에 고생깨나 하긴 했지만 그게 신발 때문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몇 년 전 신발장 정리를 하던 엄마가 그 신발 사진을 보내올 때까지만 해도곧 버릴 신발을 찍어 '어보니 너무 딱딱하고 불편한데 딸이 이런 신발을 신고 국토종주를 했다고 생각하니 눈물 난다'며 메시지를  우리 엄마.


그제야 '아 그 신발이 불편한 신발이었군'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번 종주의 모토는 '서른의 나, 십 년 전의 체력은 없지만 대신 돈은 많다!'였기에 장비빨을 좀 세워보기로 했다.


내 여정을 함께해 줄 동반신발을 구하기 위해 찾은 곳은, 발 측정을 해서 걸음걸이를 보완해 줄 만한 신발을 추천해 주는 서울의 모 신발매장이었다. 항상 인기가 많아 몇 달 전에 예약해야지만 측정이 가능한데, 나는 다행히 이전에 구매했던 이력이 있어 새로 측정을 하지 않고도 신발을 추천받을 수 있었다.


운명의 신발을 점지받기 위해 기다리는 동안 매장을 둘러보았다. 얘는 어떨까? 아니 얘는? 사시사철 올블랙 패션을 고수하는 나였지만, 이번만큼은 요란뻑쩍지근한 컬러를 품어줄 의향이 충분했다. 어차피 옷은 올블랙일 터이니 신발만큼은 좀 튀는 색을 신어도 되지 않을까 하는 계산에서였다.


자, 신발 신어 보실게요~


누구 채도 -100 명도 -100 주문하신 분?


그렇다. 내 운명의 신발은 포인트 컬러 하나 없는 올블랙 신발이었다. 다른 색은 없냐고 물으니 '화이트가 있긴 한데, 재고가 없어서 주문 넣어야 해요~' 하는 답이 돌아온다.


주 끝나고도 신어야 하니까, 트보다는 블랙이 낫지. 그렇게 나는 신발을 받아 들고 매장을 나왔다. 나의 종주 패션, 올블랙으로 결정되다.


D-1, 스마트워치 구매하기


운동깨나 하는 사람이라면 모두 가지고 있는 스마트워치. 그리고 매주 풋살과 축구와 등산과 자전거와 헬스를 번갈아 하는 운동 좋아 사람임에도 워치는 사지 않고 버텼던 나.


사실 버텼다기보다 딱히 살 이유를 찾지 못했다는 쪽에 가깝다. 앱 알림은 집중에 방해가 되어 가능한 한 꺼두는 데다가, 운동 자체는 즐거워하지만 기록하는 데에는 흥미가 없 내게는 워치의 존재가 그리 매력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그랬던 내가 생각을 고쳐먹게 된 건, 서울둘레길에서 일어난 일이다. '워치 없이는 원하는 사진을 결코 얻을 수 없군!' 하고, 걷는 내내 절실히 느꼈다.


혼자 아무도 없는 길을 수 시간 걸으면서 남에게 사진을 부탁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결국 삼각대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는데, 구도를 잘 맞춰놓는다고 해도 막상 확인해 보면 생각했던 그림이 나오지 않거나, 아쉬운 점이 있어 다시 돌아가서 포즈를 잡아야 하는 일이 부지기수다. 제한된 체력으로 최대한 많은 걸음을 걸어야 하는 국토종주에서 이런 왔다리 갔다리는 불리할 수밖에.


하지만 나는야 미련한 미니멀리스트. 마음을 정하고도 십여만 원 하는 워치를 선뜻 지를 수 없어 구매를 차일피일 미루고야 만다. 결국 국토종주를 코앞에 두고서야 진작에 구매하지 않았음을 후회하게 되었다. 임직원몰에서 구매하면 큰 폭의 할인을 받을 수 있는데, 택배를 받으려면 최소 이틀이 소요되니 이미 버스는 떠나버린 것.


그렇게 나는 출발 전날 당근을 뒤져 '미개봉 새 제품' 워치를 구매하게 된다. 다행히 나쁘지 않은 가격에 원하는 사이즈와 컬러가 올라와 있었다. 판매자가 밤늦은 시간에만 시간이 된다길래 밤 11시까지 일하다가 추운 겨울밤 회사 정문 앞에서 거래를 했다.


나도 이제 워치 있다!

으로 돌아가 졸린 눈을 억지로 뜨고 초기 세팅을 하는데 설정 가능한 국가가 태국, 베트남만 뜨는 걸 보고 아차 싶었다는 후일담. 한국향 워치가 아니었던 듯싶다. 뭐라도 연동이 안 될까 걱정했지만 다행히도 별일 없이 잘 썼다.



D-1, 어플 설치하기



자전거 행복나눔

국토종주 자전거길을 따라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설치해 봤을 어플이다. 두 가지 기능을 주로 사용한다.



하나, 자전거길 경로와 인증센터 위치 확인하기. 화장실 위치 확인도 가능하지만 지도에 표시된 것보다 실제 화장실 개수가 더 많고, 때때로 동절기에는 폐쇄하는 화장실도 있어서 참고만 하는 게 좋다. 경로도 때때로 실제와 다르게 표시되는 경우가 있어서 내 경우 뒤로 갈수록 네이버 지도를 더 애용하게 됐다.


둘, 인증 도장 모으기. 인증수첩을 구매해서 연동하면 앱에서도 도장을 찍을 수 있다. 문제는... 수첩에 직접 도장 찍는 건 안 까먹어도 앱에 QR코드 인식하는 건 종종 잊어버린다는 사실. 그래서 내 앱에는 인증도장이 듬성듬성 비어 있다. 인증부스 근처에 가면 자동으로 도장이 찍히는 기능이 있기는 하나 앱이 실행 중인 상태에서만 랜덤으로 발동되는 듯.


Relieve

자전거로 출퇴근하시는 파트장님이 추천해 주신 경로 기록 어플. 실행해 놓고 걸으면 GPS 기록을 바탕으로 내가 걸은 길을 3D 영상화해 준다. 어플은 기본적으로 무료고, 유료 결제를 하면 더 다양한 BGM과 함께 중간중간 사진이나 영상을 첨부할 수도 있다. 퀄리티가 꽤 괜찮아서 유용하게 썼다. SNS에 올리니 문의가 쇄도했던 앱.


트랭글

경로가 사진 한 장에 기록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사용한 어플. 하지만 생각보다 이미지가 예쁘게 나오지 않고 사용성이 떨어져서 다소 불만족.


여기어때

숙박할 곳을 찾기 위해 설치했다. 등록된 숙박업체가 주로 모텔이라 민박 등은 따로 찾아봐야 한다는 단점이 있다. 시골로 갈수록 어플에 등록이 안 된 낡은 모텔이 많거나, 아예 숙소 자체가 없는 동네들이 많아 도시나 큰 동네에서만 주로 사용했다. 근방에 묵어갈 만한 동네 찾기, 빈 방 있는 숙소 찾기 등의 상황에서 유용하다. 이따금 쿠폰 인을 받을 수도 있다.


부산으로!


이것저것 준비하고 부랴부랴 배낭을 싼 다음 새벽이 되어서야 잠들 수 있었다. 긴 여정을 앞두고, 나는 죽은 듯 깊은 잠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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