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월 30일 부산역. 고등학교 졸업을 앞둔 스무 살의 나는 서울로 가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인천부터 부산까지, 633km를 18일간 홀로 걷는 대장정을 막 마친 참이었다. 설 연휴의 첫날답게 사방이 복작복작한데 내 기분만은 이상하게 차분했다.
그리고 2024년 1월 30일, 그로부터 십 년이 흐른 이 날, 나는 부산행 기차에 올라탄다. 십 년을 사이에 두고 한국땅을 왕복 종주하겠다는 불타는 야심을 안고.
이 모든 것은 무당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종주를 준비하며, 그리고 종주하는 동안 가장 많이 들은 질문은 '왜?' 였다. 버스도 있고 기차도 있는 21세기에 굳이굳이 걸어서, 그것도 이 추운 겨울에 혼자서 부산까지 가는 고생을 사서 하는 이유가 당췌 무엇이냐고.
때는 바야흐로 십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마이스터고등학교 학생이었던 나는 고등학교 1학년 겨울방학이 끝나갈 무렵 취업에 성공했다. 방학 때마다 인턴을 하고 졸업 직후 입사하는 조건이었다. 열심히 공부하고, 실습하고, 인턴을 하며 2년을 보냈다.
'유일하게, 그리고 마지막으로 주어지는 우리의 고3 겨울방학, 어떤 재미난 일을 하며 보내야 하는가'는 유독 길었던 3학년 2학기의 재생 속도를 조금이니마 빨리 감아주는 핫한 토론 주제였다. 친구들은 무조건 긴 여행을 해야 한다고 입을 모아 이야기했다. 직장인 신분으로 장기 여행은 언감생심 꿈도 꿀 수 없으니 이번 기회에 가야 한다는 것이 요였다.
나 역시 이견이 없었다. 실은 목적지도 정해 두었다. 열네 살 때 가족과 여행했던, 스물여섯의 엄마가 컴퓨터 강사로 일하며 모은 돈으로 홀로 떠났던, 머나먼 이국땅 유럽이 그곳이었다. 엄마는 항상 말하곤 했다.유레일 패스를 살 수 있는 나이에 유럽을 여행해야 한다고. 열정적인 학교생활의 결실로 장학금과 상금으로 모아둔 돈도 조금 있겠다, 한 달 정도 유럽을 여행할 작정이었다. 부족한 돈은 '엄마 카드 찬스'로 메꾸고 조만간 시작할 직장생활에서 갚아나가면 될 일이었다.
- 안 돼.
- 왜!!!!!!!!!!!!!!!!!!!!!!!!!!!!!!!!!!
납득할 수 없었다. 예상치 못한 반응이었다. 엄마라면 유럽여행에 대한 나의 열정을 이해해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반대하는 이유인즉슨 하나 내가 너무 어려서 위험하다는 것이었고 둘 당시 무속신앙에 푹 빠져있던 엄마가 다니던 신당에서 들었는데 내가 이번 방학에 유럽에 가면 죽을 수도 있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딴 게 어디 있냐고, 그러면 혼자 회사 다니는 건 안 위험하냐고, 나는 다 컸다고, 온갖 이유를 들이밀며 왁왁댔지만 죽을 수도 있다는 찝찝한 예언 앞에서 왠지 주눅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지금이라면 '기왕에 한 번은 죽을 거 유럽에서 죽겠다, 못 먹어도 고!'를 외치며 무대뽀로 나갔겠지만 그 때는 지금보다 목숨이 귀했던 모양.나는 결국 꼬리를 내렸다.
나래, 가출하다
사실 처음부터 국토종주를 할 생각으로 집을 나온 건 아니었다. 걷는 게 좋았고 걸을 길이 있어서 일단은 걸어본 것이 어쩌다 보니 이 대장정으로 이어졌다고나 할까.
내가 걸은 길은 당시 생긴 지 2년 정도 되었던 국토종주 자전거길이었다. 나는 종종 걸어서 시 경계를 넘는 도보여행을 즐기곤 했는데, 양평에서 남양주까지 가는 와중에 이 길을 발견했다. (유레카!)
그날따라 길이 참 좋았다. 길이 중간에 끊어지거나, 차들이 어깨를 스치고 지나가는 갓길을 걸어야 하거나, 비포장도로라 질척거리거나 하는 문제는 도보여행자로서 한번쯤 겪어보는 것일진대, 이 날은 뻥 뚫린 깨끗한 포장도로를 쭉 걷기만 하면 아름다운 풍경도 즐기고 목적지까지 도달할 수도 있으니 신세계가 따로 없을 따름이었다.
이건 어쩌다 만들어진 길이지? 이런 길을 더 걸어보고 싶다... 생각하는 와중에 당도한 능내역에서 길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이 길의 당시 이름은 4대강 국토종주 자전거길. 말 그대로 4대강을 따라 만들어진 자전거도로이며 당시에는 흔치 않았던 스탬프 투어를 운영해서 정해진 만큼을 다 찍으면 집으로 메달도 보내 주는 멋진 시스템이었다.
처음에는 그냥 한번 걸어볼 요량이었다. 당시 나는 인천 시민이었는데 마침 루트도 인천에서 시작하겠다 방학에 딱히 할 것도 없겠다 하루이틀 걷고 스탬프나 좀 찍을 생각이었다. 김포쯤 가니 걸어볼 만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울에 도착해 한강변을 걸으니 제법 재미있었다. 양평까지 가니 이제는 짐을 싸서 나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에게 가출 소식을 알린 건 충청도 쯤에서였다.엄마는 이때 유럽 여행 중이었는데 (저기요?) 근황을 물을 겸 전화를 걸었다가 딸내미가 충청도까지 걸어갔다는 듣고도 믿기 어려운 이야기를 듣게 된 것이다. 마침 너무나도 고된 하루를 보낸 터라 가까스로 잡은 모텔방에 들어갈 힘조차도 없었던 나는 먼지구덩이 현관에 신발을 베고 누워 목놓아 울면서 힘들다고 하소연을 했다.
엄마는 말했다. 그렇게 힘들면 돌아와, 넌 너무 어린 나이에 시작했기 때문에 거기서 그만둬도 뭐라고 할 사람 아무도 없어.
그런가 싶었다. 당시의 나는 스스로를 어리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딱히 와닿지는 않았지만 그것은 내게 중단을 고민할 좋은 핑계가 되어주었고, 나는 마지막 날까지도 그만둘지 말지를 고민하며 걸었다. 따지고보면 나는 부산에 도착할 때까지 부산에 갈 의지가 없었던 셈이다. 그만두지 않았고, 매일 걸었기 때문에 얼레벌레 부산에 도착해 버렸다고나 할까. 물론 그 과정에는 셀 수도 없이 많은 물집과 고통을 참기 위해 잡아당기다 뽑힌 머리카락 그리고 눈물방울이 수반되었지만.
서른이 되었습니다, 모험을 떠나주세요
스무 살에 국토종주를 완주한 뒤로 종종 '서른에는 뭘 하지'에 대한 상상을 하곤 했다. 원래는 PCT를 걸을까 했다. 영화 <와일드>의 배경이 되기도 한 PCT는 Pacific Crest Trail의 이니셜로 캐나다 국경에서 멕시코 국경까지를 잇는, 4300km에 달하는 트레일이다. 스무 살에 한국을 걸었으니 서른에는 이런 대장정을 한번 떠나줘야 하지 않을까, 막연하게 생각했다.
그리고 스물 아홉이 되었다. 이제는 정말로 서른에 무엇을 할 지 결정해야 될 때가 온 것이다. 어엿한 직장인이라는 말도 무색할 정도로 회사의 일원 그 자체가 되어 버린 나는 집보다도 편하고 익숙한 사무실에 앉아 휴가 계획 시스템의 화면을 띄워 놓고 고민을 시작했다.
어릴 적 상상했던 대로 PCT를 걷기에는 회사가 걸렸다. 장장 6개월이 걸리는 이 여행은 물론 여전히 매력적이었지만, 잘 다니고 있는 회사에 사직서를 던질 만큼은 아니었다. 연차를 아껴서 한 번에 몰아 쓰면 보름 정도의 시간은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국토종주를 한 번 더 할까보다.
어라? 오히려 구미가 당기는 아이디어였다.내게 주어진 연차 안에서 해결할 수 있으니 여행을 위해 퇴사하지 않아도 된다. 또 당시 나는 회사 업무로부터 비롯된, 겨울이불마냥 두텁게 쌓인 피로도에 눌려 다소 납작해져 있는 상태였다. 아주 단순하면서도 고단한, 머리 쓰지 않고 몸만 지치게 할 수 있는, 예를 들면 하루 8시간 걷기라던지, 그런 활동이 내게는 절실했다. 밑빠진 독마냥 내 시간과 노력을 바가지로 퍼먹으면서도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내 프로젝트. 그에 비하면 국토종주는 매일 매 시간 작은 성취를 끊임없이 이뤄낼 수 있는 힐링캠프나 다름없이 느껴졌다.
스무 살에는 인천부터 부산까지 걸었으니, 서른 살에는 부산에서 인천까지 걷는 거야.하얀 돌멩이를 주우며 집으로 돌아가는 헨젤과 그레텔처럼, 스무 살의 내가 남긴 빛 바랜 기억과 흔적들을 서른이 되자마자 역으로 따라가는 거야.
나는 연차 계획 버튼을 클릭했다. 일정을 정하는 데에는 긴 고민이 필요하지 않았다. 1월 30일, 10년 전 내가 부산에 도착했던 바로 그 날 부산으로 간다. 10년을 사이에 두고 인천과 부산을 왕복해보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