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망의 첫날이 밝았다. 새벽같이 나가겠다는 원대한 계획이 있었으나 빛 하나 새어 들어오지 않는 모텔방에서 아침 일찍 눈을 뜨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밍기적대다가 8시 반쯤 몸을 일으켰다. 등이 불편해서 어깻죽지에 파스를 뿌려주었다. 담 오면 큰일인데.
날씨를 확인해 본 다음 내복을 벗어 배낭에 밀어 넣었다. 상의 두 겹, 하의 한 겹에 패딩을 입고 걷기로 했다. 남부지방은 겨울에도 따뜻해서 걷기 좋다. 짐과 빨랫감을 줄일 목적으로 스포츠브라 대신 니플패치를 챙겨 왔는데 아무래도 잘못된 선택이었던 것 같다. 몸을 숙일 때마다 쩌억 하고 떨어져서 거슬렸다. 항상 브라 안에 수납해 놔서 몰랐다. 가슴이 이렇게 잘 움직이는 존재일 줄은.
새 신발과 함께 레츠고
빗방울이 조금씩 떨어져서 후드티 모자를 썼다. 첫날부터 비 예보가 있어 걱정했는데 많이 오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밥을 든든하게 먹어두고 싶어서 근처 김밥집에 들어갔다. 김치찜을 주문하고, 점심으로 먹을 김밥도 한 줄 포장했다.
음식이 나오길 기다리는 동안 오늘의 목적지를 고민했다. 걸어야 할 거리를 남은 날들로 나누면 하루에 35km씩은 걸어줘야 기간 내 완주할 수 있다. 양산물문화관까지 35km, 삼랑진까지가 47km, 창녕함안보가 55km... 어디까지 걸을 수 있으려나?
곰곰 생각하던 와중에 김치찜이 나왔고 일단은 걸어 보는 것으로 결정을 내렸다. 푹 익힌 김치에 계란후라이 그리고 김. 거부할 수 없는 조합이죠. 배탈이 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며 포장한 김밥을 가방에 쑤셔 넣고 김밥집을 나왔다. 길을 건너면 을숙도로 가는 버스를 탈 수 있었다.
10여분 걸려 도착한 낙동강하굿둑 인증센터. 첫 번째 도장 찍어주기.
10년 전 이곳에서 마지막 도장을 찍었는데. 이 날은 첫 번째 도장을 찍게 되었다.
기념석 위치가 조금씩 바뀌어 있었다. 그때의 포즈와 표정을 그대로 재현해보려고 했는데 생각보다 쉽지 않다. 삼각대로 구도를 잡고 워치로 화면을 보며 찍는 일이 아직 익숙하지 않아서 원하는 사진을 건지는 데 시간이 한참 걸렸다.
고맙게도 점점 잦아들어주고 있는 빗줄기. 워치에서 '걷기' 모드를 켜고, 트랭글과 Relive의 위치 기록을 켠 다음 대망의 첫걸음을 내디뎠다.
버스 타고 온 길을 고스란히 걸어서 돌아가는 중.
자전거길에도 도로명이 붙은 게 신기하다.
국토종주 자전거길의 장점이자 단점은 강을 따라 걷는다는 것이다. 걷는 내내 아름다운 강의 정경을 볼 수 있어 좋지만, 그 멋진 풍경을 다섯 시간 동안 보고 있으면 솔직히 좀 지루하다. 강을 따라가느라 민가가 드문 지역을 지나가야 한다는 사실 역시 장점이자 단점.
멋진 전망대가 있길래 신이 나서 카메라를 세팅해 놓고 달려가서 사진을 찍었다. 사흘 뒤 이 영상을 보고 '야... 첫날에는 이렇게나 힘이 넘쳤구나...' 하고 생각하게 됨. 5m 뛸 힘도 없을 정도로 힘든 여정이었다.
여기저기에 동백꽃이 피어 있었다. 동백 덕분에 겨울에도 꽃 보는 즐거움을 잊지 않을 수 있다. 여러분 그것 아십니까. 부산시 지역화폐 이름이 동백전이랍니다. 정말이지 귀엽죠.
10년 전 그 길을 다시 걸으면 생각이 나려나? 싶었는데, 일단 이 구간은 꽤나 생생하게 기억난다. 마지막 날, '거의 다 왔구나!' 느끼게 해 줬던 외지고도 번화한 동네. 그때는 끝나가서, 이제는 시작이라서 설렌다.
표지판이 이렇게 흐물흐물 떨어져도 되는 건가요
슬슬 힘들어서 쉬어가야 할 것 같은데 아무리 가도 앉을자리가 나오지 않았다. 아까 그 정자가 마지막 쉼터였을 줄이야. 알았다면 진작에 쉬었을 텐데. 걷다가 걷다가 더 이상은 안될 것 같아서 살짝 촉촉해진 벤치에 자리를 잡고 엉덩이로 수분을 빨아들이며 쉬었다.
오른쪽 고관절 통증이 사라지질 않는다. 오른쪽 신발에만 깔창을 깐 느낌이랄까. 앉아서 고관절을 스트레칭하니 극락이 따로 없었다.
한때 '희한한 전철역 이름'으로 유명했던 괘법르네시떼. 10년 전에도 신기하다고 찍어 놨는데 또 마주치니 또 신기해서 또 찍었다.
위험한 것 치고 잠금장치가 너무 허술한 것 아닌가요.
뜻밖에 허리 통증이 심하다. 더워서 벗어다가 등과 배낭 사이에 끼워놓은 패딩 때문이려나. 피곤하고 찌뿌둥해서 무거운 배낭을 내려놓고 벤치에 누워 5분 눈을 붙였다. 이따금 산책하는 어르신들이 오갔지만 뭐 어때.
걸으면서 '길이 참 잘 되어 있네' 하고 생각했다. 울퉁불퉁 튀어나온 곳도 없고, 보행도로와 자전거도로 분리도 잘 되어 있고... 이 좋은 길을 자전거 타고 달렸다면 을매나 좋았을꼬.
10년 전 도보종주를 한 이유 중 하나는 내가 자전거를 탈 줄 모른다는 데에 있었다.두발자전거를 초등학생 때 처음 타 봤는데, 난생처음 올라본 것임에도 잘 못 탄다는 이유만으로 몇 시간 동안 흠씬 두들겨 맞았다. 그 뒤로는 자전거 따위 쳐다보고 싶지도 않게 되었다.
지금은 독립했다. 집으로부터, 그리고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로부터. 스물여섯 살 때 내 자전거를 샀다. 지금은 매일 자전거를 타고 출퇴근을 한다. 라이딩할 만큼 좋은 모델은 아니지만 때로는 멀리까지 타고 나가기도 한다. 자전거 탈 줄 모르는 스물을 지나, 자전거 타는 걸 좋아하는 서른이 되었다.
이번 종주는 자전거로 해볼까 하는 고민도 잠깐 했다. 하지만 지금 타는 자전거는 고작 기어가 7단짜리인 매우 무거운 모델이기에 차라리 맨몸으로 가는 게 부상 위험이 덜할 것 같았다. 종주만을 위해 새로 자전거를 사기에는 자금도, 타 볼 시간도 부족했다. 무엇보다 내게는 오래 걷고 생각하는 날들이 필요했으니. 고단하긴 해도 걷기로 한 건 잘 한 선택이었다.
어느새 걷힌 비구름
겨울 종주의 단점은 세상의 모든 풀이 흙색이라 아름다운 풍경을 즐기기 어렵다는 것
걷다 보니 컨디션이 좀 올라오기 시작했다. 밤 11시에 자고 아침 6시 반에 일어나는 생활을 5년째 해 오고 있지만... 최근 들어 나는 아침형 인간은 못 되는구나 하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닫고 있다. 몸도 머리도 오후가 되어야 좀 깨어나는 느낌이다.
걷다 보니 어느새 구포역. 10년 전 걸을 때는 구포역 찜질방에서 하루 자고 다음날 아침 18km를 걸어 완주했다. 이번에는 첫날이니 그것보다 훨씬 더 많이 걸어야 한다.
벤치에 앉아서 쉬는데 결혼식이라도 다녀오신 양 멋을 잔뜩 낸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오갔다. 멋쟁이 할아버지의 서스펜더가 탐이 나서 한참을 봤다.
화명생태공원 입구에서 오토캠핑장 관리실로 보이는 매점을 만났다. 식당을 못 찾을 줄 알고 김밥을 포장해 왔는데, 여기서 먹을걸! 후회됐지만 그래도 없는 것보다야 나으니 사길 잘했다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엄청나게 많은 컵라면들 중에서 안 먹어본 유부우동 라면을 선택했다.
그런데 정말 심각하게 맛이 없었다... 니맛도 내맛도 아닌 그런 밍밍함. 면도 맛이 없고 국물도 맛이 없었다. 차라리 잘 아는 맛을 고를걸. 위안이 되는 건 치킨치즈김밥이 맛있었다는 사실이다. 음식 남기는 게 싫어서 억지로 억지로 욱여넣었다.
밥 먹는 동안 다리를 쉬어 주고, 화장실에 들렀다가 나오니 새로 태어난 기분이었다. 오늘은 어디까지 걸을 수 있으려나. 나는 양산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