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밤이 살아서 맞는 마지막 밤이 아닐까 걱정했는데, 다행히도 살아서 눈을 떴다. 일곱 시간 남짓을 자며 대여섯 번은 깬 것 같다. 누군가에게 들켜서 해명하는 꿈을 꾸고 또 꿨다. 꿈이었음에 안도하고 나면 추위가 선명하게 느껴졌다. 몸을 한껏 웅크려 패딩 안으로 욱여넣었다. 기나긴 밤이었다.
괜히 밍기적거렸다가 누군가를 놀라게 하고 싶지 않아 얼른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하룻밤 얼어 죽지 않고 신세 진 것만으로도 감사할 따름이었다. 불이 켜지지 않는 화장실에서 핸드폰 플래시를 켜놓고 출발할 채비를 했다. 다리가 너무 아파서 가는 길에 주저앉을 뻔했다. 파스를 잔뜩 붙이고 또 뿌렸다. 고양이세수라도 할까 했지만 손이 시려서 엄두가 나지 않았다.
새벽 다섯 시 반, 길을 나섰다. 여기저기에서 목청껏 질러 대는 수탉 울음소리가 들리는데 해는 아직 코빼기도 비추지 않고 있었다. 별도 달도 없는 캄캄한 새벽이었다. 날이 제법 쌀쌀해서 패딩 모자를 뒤집어쓰고 장갑을 꼈다.
조금 걷다가 맞은편에서 나를 향해 걸어오는 할아버지를 발견했다. 내심 긴장이 됐다. 착각일지 모르겠지만 저편에서도 긴장감이 느껴졌다. 이 새벽에 온통 시커멓게 차려입고 모자까지 덮어쓴 채로 걷고 있는 낯선 외지인을 마주치는 일이 흔치는 않을 것 같으니. 우리는 서로 가까워지다가 이내 서로를 스쳐 지나갔다. 안도의 한숨을 내뱉으려는 찰나 뒤쪽에서 '크흠!' 하는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예상치 못한 큰 소리에 화들짝 놀라고 말았지만 그뿐이었다.
무릎과 햄스트링이 뜯어질 듯 아팠지만 쉬어 가자니 등 뒤가 서늘해 잔뜩 긴장한 상태로 계속 걸었다. 두 시간만 더 걸으면 오토캠핑장이 나온다. 거기까지만 가자. 거기에서 잠깐 쉬자. 살면서 일몰은 질리도록 봤지만 일출을 본 경험은 많지 않은데, 이렇게 걸으면서 해 뜨는 것을 보게 될 줄은 몰랐다.
7시가 가까워지자 슬슬 하늘이 밝아지기 시작했다. 해가 다 뜨기 전에 캠핑장에 도착했다. 겨울이라 그런지 쳐놓은 텐트가 많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아예 없지도 않았다. 괜히 들키면 혼날까 봐 관리인이 있나 살피며 화장실로 들어갔다.
따뜻한 화장실에서 잠깐 몸을 녹였다. 화장실이 이렇게 아늑할 줄이야. 심지어는 향기도 난다. 국토종주 하면서 화장실을 사랑하는 수상한 사람이 되어버렸다.
어제 점심 이후로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쭉 긴장 상태였다 보니 허기도 느껴지지 않았던 모양이다. 비어 가는 간식주머니에서 아껴두었던 땅콩 엠앤엠을 꺼내 먹었다. 십 년 전 종주할 때도 종종 사놓고 힘이 필요할 때마다 먹었던 바로 그 초콜릿. 초콜릿은 잘 안 먹게 되는데 왜 땅콩 엠앤엠은 맛있는 걸까?
자전거길에도 도로명주소가 있는 게 신기하다
한참을 쉬다가 출발했다. 같은 길을 걷고 있는데, 세상이 밝아지기만 했을 뿐인데 이상하게도 이제는 하나도 두렵지가 않다. 10년 전에 찍었던 사진 중 가장 마음에 드는 한 장을 재현해 냈다. 당시 너무 괴롭고 힘들어서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며 고통을 잊곤 했다. 지금은 잡아당길 만큼 긴 머리카락도 없거니와 다른 고통으로 잊어야 할 만큼 다리가 아프지도 않다. 그때는 지는 해 아래서 남쪽으로 걷는 와중이었는데, 이제는 뜨는 해 아래서 북쪽으로 걷고 있다.
길에서 만난 왜가리와 고양이. 꿩도 대여섯 마리 만났다. 꿩은 항상 꾸루룩 푸드덕하며 날아올라가는 소리만 듣기 때문에 깜짝 놀랄 뿐 사진이나 동영상으로 포착한 적은 없다.
시가 적혀 있는 폐허
긴긴 우회로가 지긋지긋한 데다가 숙소도 없어 힘들었던 밀양 구간도 이제 끝이 보인다. 내가 간다 창원!
잔뜩 지쳐 있었던 10년 전과 그럭저럭 걸을만한 상태인 지금. 겉옷을 벗어던진 걸 보니 그때나 지금이나 날이 따뜻하긴 했나 보다.
드디어 창원 In! 험프티 덤프티처럼 떨어져서 머리통을 깨먹는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도록 엉덩이에 힘을 잔뜩 주고 걸터앉아 찍은 사진이다.
이른 시간인데 공원에 어르신들이 많이 나와 계셨다. 휠체어와 지팡이에 기대 풍경도 구경하고 수다도 떨고 하시는 것 같았다.
수산대교 근처에 마을이 있어 경로를 잠깐 벗어나기로 했다. 웬만하면 최단거리를 따라 걷자는 주의지만 17시간 만에 처음 만나는 마을이었기에 그냥 지나치는 것은 아예 고려조차도 하지 않았다. 일단 뭐라도 곡기를 좀 밀어 넣고 싶었다.
뜨끈한 밥 한 술이 간절했지만 엄청나게 큰 동네는 아니었던지라 식당이 많지 않았고 그마저도 너무 이른 시간이라 아직 문을 열기 전이었다. 다행히 번듯한 편의점을 발견해서 텅 빈 간식주머니를 채워 넣고 컵라면과 삼각김밥을 사 먹었다.
10년 전에는 편의점도 큰 동네에서나 갈 수 있는 곳이었는데 이제는 정말 식당도 없는 시골마을이 아니고서야 편의점 한두 개는 기본적으로 찾아볼 수 있게 되었다. 덕분에 중간중간 보급에는 어려움이 없었다.
식사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공사하는 청년들이 사투리로 대화하는 소리가 들렸다. 충청도나 강원도에서는 젊은 사람들의 사투리를 자주 듣기가 어려운데, 경상도에서는 아무래도 좀 더 많이 쓰나 보군... 하는 생각을 하며 고개를 들어 그들의 얼굴을 봤는데 아니 글쎄 세 명이 다 외국인 노동자가 아닌가. 한국어를 유창하게 하는 것도 신기한데 경상도 사투리까지 완벽 구사하는 그들의 실력에 감탄하고 말았다.
갈비뼈 같은 하늘. 아침엔 그렇게나 흐리더니 점점 개고 있다.
수산대교를 건넜다. 대교를 건너는 일은 항상 손꼽아 기다리게 된다. 새로운 챕터로 넘어가는 느낌이라 그런가. 하지만 건너는 도중에는 제법 힘들다. 길이도 꽤나 길고 옆에 차가 씽씽 지나다니는 데다가 낙동강물에 핸드폰을 퐁당 빠뜨리는 상상을 자꾸 하게 되어서 손에 힘을 주고 걷느라고 진을 쏙 빼곤 한다.
창원 첫 번째 표지판을 만났다. 창녕까지 10km도 안 되게 남았다고 하니 잘하면 오전 중에도 도착하겠다 싶었다.
다리가 아파서 계속 절뚝이며 걷게 된다. 쉬다가 다시 걷는 게 더 고통스러워 자꾸만 휴식을 미루게 되는 고통스러운 날이었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어 정자에 앉아 쉬고 있으니 저 멀리서 속도를 줄이는 자전거가 보인다. 사람이 많지 않은 비수기다 보니 걸으면서 사람을 만나는 일이 드문데, 자전거를 세우고 정자에 자리를 잡으시는 할아버지가 괜히 반가워서 잠깐 수다를 떨었다.
마산에서 창원까지 자전거를 타고 오셨다는 할아버지. 무릎 통증으로 걷거나 뛰기가 어려워 자전거를 타기 시작했는데 재미가 붙어 매일 여기저기 다니신다고 한다. 빛이 예뻐서 사진을 몇 장 찍어드렸더니 자전거 타는 것도 좀 찍어달라고 하신다. 흔쾌히 핸드폰을 받아 들고 저 멀리 달려갔다가 돌아오는 모습을 최고 멋지게 담아 드렸다.
우여곡절 끝에 나름 차분해게 만들어본 뒷머리
내 사진도 좀 찍어야겠다 싶어 삼각대를 설치했다. 아니 그런데 뒷머리가 완전히 까치집 저리 가라 할 정도로 뻗쳐있는 것이 아닌가. 물을 묻혀서 좀 눌러야겠다 싶어 생수병을 꺼내 기울이다가 각도 조절을 잘못해서 적시려는 뒤통수는 못 적시고 옷 안에 물을 냅다 부어버렸다. 에휴 잘하는 짓이다 응? 잘하는 짓이야.
어느새 새파래진 하늘 아래 끝도 없이 뻗은 지루한 길을 걸으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안 해도 되는 걸 '굳이' 하는 게 나고, 그게 나다운 거라고.
굳이 마이스터고에 가서 고졸 직원 되느니 대학교 진학하는 게 평범한 선택이었다. 굳이 인도 여행 가느니 다른 유명하고 좋은 곳으로 휴가 가는 게 안전한 선택이었다. 이 겨울에 굳이 국토종주 하느니 긴긴 휴가를 아늑한 집에서 보내는 게 편한 선택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 '굳이'를 꼭 해봐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다. 해볼 뿐만 아니라 해내고야 마는 사람이다. '굳이' 하겠다고 뛰쳐나왔을 때 겪고 느낀 것들이 나를 나답게, 특이하고 희귀하게 만든다. 그래서 '굳이 그 짓을 왜 해?'라는 질문은 나에게 어색하다. 나니까 굳이 하는 것이다. 안 해도 편하게 잘 살 수 있는 걸 굳이 굳이.
왼쪽 다리 햄스트링이 끊어질 것 같이 아파서 잠시 앉아 폼롤러를 굴려주었다. 햄스트링이 이렇게까지 아파본 건 또 처음이다. 통증은 항상 한쪽에만 온다는 사실이 나를 미쳐버리게 만든다. 양쪽이 같이 아프면 쉬었다 갈 텐데, 한쪽만 아프면 절뚝이며 걷게 되기 때문이다.
날씨도 좋고 하여 잠깐 누워서 눈을 붙였다. 변색렌즈로 된 안경을 끼고 있었기에 망정이지 안 그랬다면 쨍쨍한 햇볕에 눈이 꽤나 아팠을 터. 저 멀리 하늘에 자꾸만 자꾸만 빙빙 도는 맹금류 세 마리를 발견했다. 여기 뭐 동물이 있을 것 같지도 않은데 왜 여기를 떠나지 않는 거지. 혹시 내가 타깃인가.
하늘이 아름답고 길이 예뻐서 자꾸만 사진을 찍고 싶어지는 날이었다. 참 멋진 장면인데 나를 어디에 어떻게 욱여넣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아 한참을 뚝딱거리다 얻은 사진.
화장실에서 오늘의 첫 세수를 했다. 아침에는 너무 추워서 손에 물을 묻힐 엄두가 안 났는데 해가 점점 뜨거워지니 선크림을 발라줘야 할 것 같았다.
그리고... 생리가 시작되었다. 18일이나 걸어야 하니 언젠가 할 거라고 생각은 했다만 막상 닥치니 한숨이 나온다. 험난하기 짝이 없구만. 척척해진 앞머리를 탈탈 털어 말리고 오후 여정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