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끗한 하얀 시트 더미 아래서 눈을 떴다. 몸이 무거워서 밍기적거리며 나갈 채비를 했다. 아침마다 양말과 속옷을 앞에 두고 하루 더 입을지, 빨아놓은 것을 입을지 심판의 시간을 가진다. 심사 방법은 언제나... 냄새 맡아보기. 이 정도면 하루 더 가능! 하며 어젯밤 널어놓은 속옷을 꿰어 입었다.
화려한 라인업
며칠 전 산 500ml 물병을 아직까지도 다 비우지 못해서 모텔에 있는 생수병을 그대로 두고 나왔다. 원래 물을 잘 안 마시는 편이긴 한데 이렇게까지 안 마실 줄은 몰랐다. 이 정도면 거의 낙타 아닌가. 안 좋은 습관이지만 종주 중에는 유용하다.
벌써 부산으로부터 177km나 걸어왔다! 날씨도 좋고 하여 불가사리 포즈로 사진 찍어줌. 이제 사람들이 지나가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사진을 건질 수 있는 경지에 다다랐다.
다리 중간에서 시계를 넘게 됐다. 대구 달성군에서 경북 고령군으로!
드디어 경상북도 입성! 감동적인 순간이었다. 마침 연락이 온 후배가 어디까지 갔냐길래 이 사진을 보냈더니 '아직도 경북?'이라고 답장이 왔다. 여기까지 얼마나 힘들게 왔는지 아냐고 쿠사리를 줬지만 내심 같은 생각이 드는 참이긴 했다. 지나고 보니... 경상남도 구간이 제일 길고 힘들다. 일단 경북 입성하면 이때까지 해왔던 것 대비해서 조오금 덜 힘들게 갈 수 있다.
고령 첫 번째 표지판! 길을 착실히 따라왔는데 어찌하여 첫 번째 표지판이 8번이란 말인가. 고령을 4km 정도 걷다가 달성군을 다시 지나가게 되는 모양이다.
점심 무렵이라 식당을 찾아보니 마침 멀지 않은 곳에 어탕 집이 있었다. 강을 따라가다 보니 자주 마주치는 메뉴라 안 그래도 먹고 싶었던 참에 잘됐다 싶었다. 루트를 많이 벗어나지 않아도 되었기에 고민 없이 결정을 내렸다.
한 명인데도 친절하게 안내해 주셔서 기분이 좋아졌다. 어탕을 처음 먹어본 날이 생각났다. 풋살 하다 만난 E언니의 초대로 천안에 놀러 갔는데, 하루종일 배가 찢어질 때까지 맛있는 걸 사 먹여 주어서 감사하고 재미있었던 기억이다. 갈비탕에 팥빙수를 먹고 배가 터질 것 같은데 '아직 먹어야 할 게 남았어!' 라며 비장한 표정으로 데려간 곳이 어탕집이었다.
그전까지 어탕이란 내 인생에 존재하지도 않는 음식이었다. 하지만 그날 E언니가 먹여준 어탕은 가득 차다 못해 넘치기 일보직전인 위장의 상태를 잊어버리고 밀어 넣을 만큼 맛있었다. 얼큰하고 걸쭉한 국물에 가득 든 죽과 국수가 정말이지 일품이었다.
혼자서는 처음으로 사 먹는 어탕이 곧 내 앞에 차려졌다. 그날의 기억을 망치진 않을까 걱정한 것이 무색하게 맛이 좋았다. 민물새우랑 다슬기가 그득그득 들어서 씹는 맛이 좋았다. 루트를 벗어날 가치가 있는 훌륭한 선택이었다.
식당 화장실 휴지에 쓰여 있던 충격적인 문구... 밥 먹다 소리가 들리면 좀 불쾌한 정도가 아닐 것 같은데...
거대한 나무 아래 숨은 나 찾기.
인스타그램에 스토리로 종주 이야기를 올리기 시작했다. 실시간으로 위치를 노출하는 건 위험성이 있다고 생각해서 며칠의 차이를 두고 올리게 됐다. 반응이 생각보다 훨씬 좋았다. 잘 보고 있다, 너무 재밌어서 쿠키 구워서 보고 싶다는 등의 DM들을 보고 있으면 힘이 솟았다.
10년 전 종주할 때는 일주일에 한 번 정도 페이스북에 글을 올리곤 했다. 그때도 사람들이 좋아요를 많이 눌러 주었고 그런 반응이 힘이 되었다. 하지만 이번에 인스타 스토리 업로드만큼 많은 호응을 얻지는 못했다. 아무래도 지금보다는 그때 아는 사람이 더 적었고, 무한정 올릴 수 있는 인스타 스토리와는 달리 페이스북에는 업로드할 수 있는 사진이 제한되어 있으니까.
많은 사람들이 내 인스타 스토리를 보며 마음으로나마 함께 걸어 주었다. 따뜻한 응원 메시지들 덕분에 내내 많은 힘을 얻었다.
이쯤 되면 모든 평야에 파크골프장이 있는 것 아닐까 싶을 정도로 수많은 파크골프장을 보게 된다. 나와서 걷고 사람 만나서 얘기도 하고 하니 어르신들 하기에 좋은 운동 같다.
길 따라 동상들이 여럿 서 있었다.
10년 전 이 구간을 지날 당시에는 비가 정말 많이 와서 잔뜩 지친 채로 걸어야 했다. 이날도 몸이 힘들긴 했지만 최소한 날씨는 아름다움 이상으로 쨍쨍하니 좋았다. 해가 뜨니 바람이 쌀쌀해도 괜히 기분이 좋다.
드디어 강정고령보 도착! 남쪽으로 걸었던 10년 전에는 대구시 방향에서, 북쪽으로 걷는 현재는 고령군 방향에서 사진을 찍게 되었다. K-Water 브랜드가 없어졌는지, 여기저기에 지운 흔적들이 있다.
전동킥보드 그림 너무 귀여운 것 아닙니까.
저 멀리 보이는 디아크
낙동강 하류 페이지를 완성했다. 낙동강길 완주도 얼마 남지 않았다. 짜릿해!
강정고령보에서 우회로를 탈지 원래 자전거길을 걸을지 고민이 됐다. 원래였다면 우회로를 탔겠지만, 칠곡에서 강정고령보까지 이어지는 데크길에 나름의 위험한 추억이 있기 때문에 다시 걸어보고 싶었다.
위험한 추억이란 무엇인고 하니, 10년 전 데크길을 걷는 도중 어떤 아저씨가 말을 걸어 동행하게 되었다. 중간에 있는 길에서 매운탕도 사주심. 딸 같아서 베푼 친절이려나 싶었지만 좋은 사람이라고 믿기엔 어딘가 불안한 데가 있었다. 대낮이었고, 산책하는 주민들이 종종 지나다녔고, 강 위로 나있는 데크길이라 나를 끌고 갈 데도 없었기 때문에 일단은 믿고 같이 걸었다.
대화가 선을 넘을락 말락 하던 그 순간 강정고령보에 도착했다. 나는 고령에 이모가 사셔서 데리러 오기로 하셨다며 거짓말을 하고 더 같이 있어주겠다는 아저씨를 겨우 떼어냈다. 혹시나 따라올까 싶어 한참을 근처에서 머뭇거리다 동네 찜질방을 찾아 들어가 경계하며 잠들었던 기억이다.
설령 그 아저씨가 정말 순수한 의도로 접근했다 한들, 혼자 여행하는 입장으로서는 좋은 사람도 경계해야 할 때가 있다. 좋은 인연 하나를 놓치는 것이 범죄의 타깃이 되는 것보다야 훨씬 나으니까. 씁쓸하지만 그렇다. 어쨌거나 무슨 일이 생기기 전에 끊어냈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그때의 일을 추억이라고 부를 수 있게 된 것 아니겠는가.
원래 경로를 타면 거리 차이가 너무 많이 나서, 중간에 휴식도 취할 겸 딸기라떼를 파는 카페까지만 데크길을 따라가고 이후로는 마을을 가로지르는 우회로로 빠지기로 마음을 먹었다. 윤슬 가득한 강이 너무 예뻐서 기분 좋게 걸었다.
다시 달성군으로 컴백! 오늘 안에 대구를 빠져나갈 수 있으려나. 그간 나를 많이 괴롭혔던 오른쪽 고관절 통증은 이제 거의 사라졌다. 대신 왼쪽 발목, 그리고 왼쪽 발날 쪽의 중족골이 아팠다. 걷다 보면 힘이 붙겠지.
뉘엿뉘엿 넘어가는 오후의 햇살이 따끈따끈해서 기분이 노곤노곤해졌다. 발밑에 밟히는 낙엽은 잘 말라서 바삭바삭하고, 밭에서는 타는 냄새가 살짝 났다. 걷기 좋은 날, 걷기 좋은 길이었다.
자전거길을 벗어나서 우회로로 나왔다. 차가 쌩쌩 달리는 길가에 서서 '보행자 횡단 시 누르세요' 버튼을 누르고 기다렸다. 한참을 기다렸는데도 불이 들어오지 않아 신호등을 바라보며 앉아 쉬고 있는데 맞은편 검문소에서 아저씨 한 분이 나와서 같이 기다려 주신다. 또 한참을 기다리니 불이 들어와서 횡단보도를 건넜다. 검문소 아저씨는 내가 길을 건너는 걸 보더니 그제야 다시 건물 안으로 들어가셨다.
빠지면 아쉬운 도깨비바늘 떼기
낮에 어탕을 배 터지게 먹었는데 벌써 배가 고프다니 믿을 수 없다. 식당과 카페가 조금 있는 마을, 하빈면에 도착했다. 들어오자마자 꽈배기집 광고 플래카드가 붙어 있었는데, 보는 순간 미친 듯이 꽈배기를 원하는 몸이 되어버렸다. 광고효과가 매우 뛰어나군요.
몰랐는데 하빈면에 칼국수 거리가 있었다. 딸기라떼만 후딱 먹고 갈 생각이었지만 칼국수 거리라는데 칼국수를 안 먹고 지나갈 수 없잖아요? 개중 가장 맛있어 보이는 곳을 골라 들어가 보았다.
식당이... 식당이 아궁이에 불을 때서 칼국수를 끓여준다... 2024년에 아궁이로 요리한 음식을 먹게 될 줄이야.
팔자에 없던 칼국수를 먹게 되었다. 끈적한 테이블이 있는 낡은 식당이었다. 칼국수는 정말 정말 맛있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호로록 먹기 좋은 얇은 면 칼국수. 함께 나온 경상도 김치와도 잘 어울렸다. /10년 전처럼 철저하게 자전거길만 따라갔다면 이런 마을, 이런 식당 마주칠 일이 없었을 텐데, 정해진 길을 벗어났을 때 비로소 재밌는 일들이 일어나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나오는 길에 만난 분홍코 고양이. 복슬복슬한 털을 한 번만 쓰다듬어보고 싶었건만 사람 손을 안 타는지 나를 엄청나게 경계했다. 식당 주인아주머니가 "새끼인데 가끔 와!" 해서 더욱 귀여워 보였다.
못 참고 꽈배기 사 먹으러 갔다... 그냥 동네에 하나쯤 있을 법한 꽈배기집이라 '꽈배기가 뭐 별 거 있겠나' 하고 샀는데 한 입 베어무는 순간 아 나는 이 꽈배기를 먹기 위해 국토종주를 시작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살면서 먹어본 중에 제일 맛있는 꽈배기였다. 아니 이런 표현으로는 부족하다. 이건 꽈배기를 벗어난 무언가, 탈꽈배기다. 떡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쫀득한 반죽에 바삭하게 튀겨진 표면 그리고 적절하게 붙은 설탕까지. 거기에 고소한 맛 그리고 갓 튀겨져 나온 덕분에 따끈함까지 더해져 천상의 하모니를 이루고 있었다. 행복하다 행복해, 이런 꽈배기를 먹을 수 있어서 행복해.
방금 밥에 꽈배기까지 먹고 뭘 또 이렇게 한 바가지 시켰냐고요... 일단 딸기라떼 먹으러 왔으니까 하나 시켜 주시고, 그리고 대구에 왔는데 콩국 한 번쯤 먹어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콩국도 하나 주문해 주시고.
아니 그리고 글쎄 여기서 수플레를 팔더라니까요. 수플레는 '부풀어 오르다'는 뜻의 프랑스 디저트인데 예전에 우연히 들어간 도쿄 카페에서 한번 먹어 보고 반한 바 있다. 그런데 이 수플레가 은근히 파는 곳이 없다. 수플레 치즈케이크, 수플레 팬케이크는 많아도 '수플레'는 잘 안 판다.
그런데 딸기라떼 먹으러 들어온, 달성군 어딘가의 카페에서 수플레를 팔고 있더란 말입니다. 안 먹을 수 없죠. 그래서 이렇게 한상차림을 받아 들게 되었다는 이야기. 참고로 세 개 다 싹싹 비웠습니다. 딸기라떼는 실망스러운 비주얼에 걸맞지 않은 훌륭한 맛이었고 수플레는 기대한 것만큼 고급스럽진 않았지만 적당히 괜찮았으며 콩국은 예상치 못한 맛이었다. 두유 같은 묽은 국물에 꽈배기처럼 텅 빈 빵을 넣어 먹을 거라고 상상했는데 국물은 걸쭉하고 건더기도 빵보다는 떡에 가까운 식감이었다. 나쁘지 않았지만 굳이 또 사 먹고 싶지는 않았다.
정말 주저앉고 싶었지만 더 가야 하니 카페를 나왔다. 하루종일 찬바람을 맞아서 얼굴이 새빨개졌다. 칼국수에 꽈배기에 카페까지, 이렇게 먹고 시간을 보낼 건 아니었는데, 몸이 힘들고 컨디션이 안 좋아서 걸어야 한다는 현실을 회피하고 싶었나 보다. 평소에도 힘들면 해야 할 일을 미루고 다른 것들에 시간을 쏟곤 한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입이 터져라 음식을 밀어 넣곤 한다. 길을 걷는 중이라고 해서 평소의 안 좋은 버릇이 사라지는 건 아니구나. 이런 스트레스 반응들을 잘 이해하고 관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다. 해 지기 전 귀한 시간을 카페에서 보내버린 것이 후회도 되지만 이미 지나간 일을 어찌하리오. 칠곡보까지 한번 가보자고 목표를 세웠다.
지는 해는 일주일째 봐도 여전히 야속하다. 하지만 겨울에 밖에서 해 지는 것을 실시간으로 볼 일이 얼마나 있겠나 싶어서 기왕 보는 것 즐기기로 했다.
6시 반쯤 왜관에 들어왔다. 무리하게 걷지 않았던 덕분인지 힘이 남아 있었다.
해가 지긴 했지만 길 따라 가로등이 있고 바로 옆에 차가 많이 다녀서 무섭지는 않다. 그리고 이 길의 끝에 번화가가 있다는 사실, 번듯한 숙소에서 잘 수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도 아주 큰 위안이 되었다. 나도 결국은 도시가 필요한 사람이었나 보다.
시골길을 걷다 보면 개, 특히 집 지키려고 키우는 큰 개를 묶어둔 집을 많이 지나치게 된다. 개들은 꼭 내가 지나가기만 해도 컹컹대고 짖더라. 신기한 건 차가 지나갈 때는 쥐 죽은 듯 조용하다는 사실이다. 차에 탄 인간은 냄새가 안 나나? 아니면 빨리 지나가리라는 걸 아는 건가?
쭉 가로등이 함께해 줄 거라고 믿은 내가 어리석었다. 어느 순간부터 자전거길과 차도가 갈라지더니 아예 허허벌판 한가운데 난 길을 혼자 걷게 되었다.
플래시를 안 켜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저 멀리 빛이 있는 곳에 무언가 있으리라고 믿고 앞으로 앞으로 나아간다. 길이 어두우면 아무래도 무섭다. 상황을 다 파악하고 있을 수 없으니 잔뜩 긴장하게 된다.
한껏 움츠리고 걷다가 올려다본 하늘에 탄성이 절로 나왔다. 어두우니 별이 쏟아질 듯 많이 보였다. 오리온자리와 카시오페이아, 북두칠성을 찾고 별자리 어플을 켜서 또 뭐가 있나 들여다보았다. 사자자리가 있다고는 하는데 잘 안 보였다. 걷고 있기 때문에 볼 수 있는 아름다운 장면들 중 하나.
허름한 쉼터에 벤치와 가로등이 있어서 잠깐 앉아 쉬었다. 이 어두운 조명이 이렇게까지 감사하게 느껴지다니. 역시 인류 최고의 발명품은 뭐다? 인공조명이다.
다시 어두운 길을 걷기 시작했다. 어디에선가 의미심장한 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려서 발소리인가 하고 경계 모드를 켰다. 소리의 정체를 알게 된 건 잠시 후 축구장을 지나가면서였다. 공간이 트여 있어서 소리가 멀리까지 울려 퍼진 모양이었다.
이 답에 대한 확신은 잠시 후 누군가가 DIY로 만든 것 같은 간이 골프연습장을 지나가며 잃어버리게 된다. 그것은 골프공 치는 소리였을까, 아니면 축구공 차는 소리였을까.
지난번 어두운 길을 걸을 때 겁이 나서 아무런 사진을 안 남긴 것이 후회가 되어서 용기를 내어 삼각대를 설치했다. 사진을 찍으려는 그 순간...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정말로 누가 오고 있었다.
지금이야 '동네 주민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지만 당시에는 공포영화가 따로 없었다. 발에 모터라도 단 듯 걸음이 빨라졌다.
드디어 드디어 마을이 코앞! 마지막 에너지를 쥐어짜보기로 했다. 화장실이 급해서 더더욱 인류의 문명이 절실했다.
길이 두 갈래로 나 있었다. 어둡지만 거리가 짧은 길, 밝지만 5분 정도 더 걸어야 하는 길. 평소였다면 고민할 것도 없이 지름길을 골랐겠지만 이 때는 좀 달랐다. 어두운 길은 신물이 나도록 걸은 참이라 이제는 밝은 길을 좀 걷고 싶었다. 그렇게 후자를 선택.
이날 나는 큰맘 먹고 빨래를 한번 하기로 했다. 숙소까지 가는 길에 코인빨래방이 있어서였다. 이때까지 찾으려는 시도는 많이 해 봤지만 루트에서 너무 멀리 떨어진 곳에 위치했다는 이유로 번번이 실패했던 바로 그곳 빨래방. 칠곡에 있는 곳 역시 20분 정도는 더 걸어야 했지만 이 정도는 양반이었다.
매일 입는 옷을 빨기 위해서 작전을 세웠다. 일단 가는 길에 위치한 늦게까지 여는 카페에서 음료를 한 잔 테이크아웃한다. 음료를 제조하는 동안 화장실 좀 쓰겠다고 하며 민생고를 해결하고 옷을 벗는다. 몇 번 안 입어서 안 빨아도 찝찝하지 않을 것 같은 내복을 입고 위에 패딩을 걸친다. 음료를 들고 빨래방에 가서 홀짝이며 빨래를 돌린다.
그렇게 도착한 코인빨래방. 라떼는 말이야 잉 십 년 전에 종주할 때는 코인빨래방 그런 거 없었어. 민박집 안 가면 빨래도 못 했다고.
불행히도 모든 세탁기가 돌아가고 있어 순서를 기다려야 했다. 다리를 쉬어줄 겸 얌전히 앉아 있었다. 내 순서가 왔는데 나중에 들어와서 세탁기 앞에 앉아 계시던 아주머니가 빨래를 넣으려고 하길래 기겁을 하고 기다리고 있었다고 말씀드렸다. 아주머니의 친구로 보이는, 먼저 와서 빨래를 돌리고 있었던 다른 아주머니가 나의 결백을 증명해 주셔서 다행히 분쟁 없이 빨래를 돌릴 수 있었다.
코인빨래방을 이용해 본 적은 많지만 건조기를 돌린 적은 잘 없다. 햇빛에 말렸을 때의 그 버석버석함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날은 햇빛이고 나발이고 다 필요 없고 빨리 말려 가져가야 했으므로 건조기까지 돌려주었다. 다 된 빨래의 후끈한 온기가 묘하게 위로가 되었다. 몇 시간 버렸지만 충분히 가치 있는 시간이었다. 뜨끈뜨끈한 후드티를 품에 안고 숙소로 향했다.
왼쪽 햄스트링 통증이 다시 올라오기 시작했다. 다리를 절며 걷게 되었다. 가까운 모텔들도 있었지만 내일의 나를 위해 조금이라도 더 걸어주기로 했다. 동네에 있는 숙박업소 중 가장 먼 곳을 향해 간다. 유독 깨끗하기도 하고. '괜찮아, 괜찮아, 거의 다 왔어...' 하고 되뇌며 스스로를 달래며 앞으로 나아갔다.
카드키 꽂는 숙소 오랜만
빨래방에 앉아있는 동안 모텔에 전화를 걸어 보았다. 방이 있냐고 물으니 만오천 원 더 내야 하는 특실밖에 안 남아 있다고 했다. 특실에는 안마의자가 있다. 안마의자, 과연 만 오천 원의 값어치를 할 것인가. 나는 '한다'에 걸어보기로 했다.
내가 옳았다. 안마의자는 극락을 선사해 주었다. 나는 낡아서 가죽 껍질이 벗겨지기 시작한 안마의자에 앉아 코스를 두 번 돌리며 그간의 피로를 신나게 풀었다.
신고 있던 양말 못 빨아서 숙소 와서 손빨래할 생각에 부담이었는데 마침 구멍이 나서 버려야 하다니 이거 완전 럭키비키잖아?
넷플릭스를 볼 수 있는 모텔이라 평소에 보고 싶었던, 매운맛이라는 예능 <투 핫>을 틀었다. 넷플릭스 가입한 적이 없기 때문에 이런 곳에서 뽕 뽑아줘야 함. 연애 프로그램들 나에겐 너무 답답하다. 그냥 인물 소개 보고 누구랑 누구 이어졌는지만 알고 싶다. 고구마를 잔뜩 먹은 기분으로 잠들었다.